< 제 88장. 아아! 청민아…. -02 >
청민의 시선이 서예지에게 향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의 뜻에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럼 저도 남겠어요. 저희 둘이라면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몰라요. 태무문의 정예와 함께라면···.”
“불확실한 가능성보다는 확실한 쪽에 저는 걸고 싶습니다.”
“장로님!”
현주혜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 정도로 지금 현주혜는 흥분한 상태였다.
거기에 서예지 역시 흔들리는 눈으로 청민의 손을 잡았다.
“그러기 싫어요.”
“무슨 일이에요?”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것일까.
태무문의 정리를 도와주던 아이들이 하나둘 모였다.
현주혜의 뾰족한 외침에 다들 의아한 얼굴로 모여든 것이다.
“시간이 없다. 다들 현 문주님을 따라 가거라. 예지는 태무문주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저도 남겠어요.”
현주혜가 단호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의견을 피력했다.
도망치는 것보다는 청민과 함께 싸우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저도요.”
거기에 서예지도 합세했다.
얼마나 큰 적이 다가왔는지 그녀라고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청민의 희생으로 살아남고 싶지는 않았다.
“명령이다.”
“하지만 사숙···.”
“난 너희들을 책임지라는 사형의 지시를 받았다. 그런 내가 어찌 너희들을 사지로 데려가겠느냐. 그러니 아이들을 데리고 최대한 멀리 벗어나라. 본산만 쳐다보고 가.”
청민이 삼엄한 얼굴로 말했다.
조금의 여지도 두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서예지가 현주혜와 마찬가지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거절은 허락하지 않는다.”
“다 함께 싸우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요?”
“말했지 않느냐. 불확실한 것보다는 확실한 쪽을 택하겠다고. 시간 없어. 얼른 가!”
“사숙!”
서예지의 목청이 높아졌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 역시 잔뜩 굳은 얼굴로 청민을 쳐다봤다.
이대로 갈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청민은 단호했다.
“부탁드립니다, 현 문주님.”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현주혜의 시선이 태무문으로 향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태무문도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그런 걸 배운 적도 없고요.”
“하지만···.”
현주혜가 어금니를 깨물며 청민을 쳐다봤다.
물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태무문과 청민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녀는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청민을 택할 터였다.
모든 생명은 평등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이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제가 느끼는 걸 문주님이 느끼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주혜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임을, 듣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어서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시간이 없다. 서둘러.”
“사숙님!”
양일우가 처음으로 큰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라도 청민을 붙잡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청민의 뜻을 꺾기에는 부족했다.
“가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사, 사숙님···.”
심소혜가 눈가를 글썽거리며 청민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청민은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가거라. 곧 뒤따라 갈 터이니.”
“약속하신 거죠? 정말 저랑 약속 하신 거예요?”
“물론이지.”
흔들리는 손으로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심소혜를 향해 청민이 늘 그렇듯이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심소혜는 불길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다른 호법님들과 같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청민은 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어 보이기만 했다.
한데 그 모습이 현주혜의 가슴이 화인처럼 박혔다.
또한 어째서 곤륜파가 명문대파라 불리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
현주혜가 말을 끊었다.
더 이상은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여기서 더 말한다면 서예지를 비롯한 제자들이 태무문을 떠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청민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문주님이 함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꾸욱!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전음에 현주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신을 휘감는 무력감에 자기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던 것이다.
“···가자.”
“저는 남겠습니다.”
“저도요.”
힘겹게 입을 여는 현주혜를 직시하며 양일우와 심대현이 입을 열었다.
청민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어서였다.
적어도 한 명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서 가지 못하겠느냐!”
“사, 사숙님!”
그러나 그 결연한 각오도 청민의 호통에 무너졌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 둘 다 화들짝 놀랐던 것이다.
“가거라!”
“···애들아, 가자.”
현주혜가 아이들을 이끌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와중에도 거리는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어떤 선택을 하던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 하지만···.”
“어서!”
현주혜의 호통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불안한 눈으로 그녀와 청민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청민은 이미 태무문을 나서고 있었다.
“서둘러. 시간이 없어.”
현주혜가 얼굴 가득 분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누구보다 이 자리에 남고 싶은 건 그녀였다.
비록 소속은 다르지만 전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게 그녀와 청민이었다.
그런데 그를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내가, 내가 약해서 그래.’
현주혜의 두 눈이 벌겋게 변했다.
그러자 아이들도 더 이상은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현주혜의 심정이 올올히 전해졌던 것이다.
“무, 무슨 일입니까?”
“천년마교에요. 어서 빨리 물러나야 해요.”
“오대전투부대라도 나타난 겁니까?”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서 태무문주가 다가왔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싸우기 전에야 중원무림을 수호한다는 기치로 달려들었지만 전쟁을 직접 겪어보니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가족과 제자들, 그리고 문도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보자 전쟁이 얼마나 참혹하고 무서운 것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존재일 지도 몰라요.”
꿀꺽!
보타문주인 현주혜의 말에 태무문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자신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터를 버리는 굴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피를 서둘렀던 것이다.
“가자. 최대한 빨리 호법님들과 합류해야해. 대호법님이 어디에 계시지?”
“거리상으로 반나절은 족히 달려야 해요. 청해성은 마을끼리의 간격이 워낙에 멀어서···.”
“전서응은?”
“여유분이 없는 것으로 알아요. 전서구가 있기는 한데 얘들은 아는 길로만 다녀서 전서응보다는 융통성이 떨어져요.”
전서구는 기본적으로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이용했다.
그렇기에 특정한 장소에만 보내는 게 가능했고, 이동 중에는 연락을 주고받기가 힘들었다.
“후우.”
“일단은 개방에 연락을 해볼게요.”
“그보다 이동이 먼저야. 한시가 급해.”
태무문주에게 상황설명을 끝낸 현주혜는 땅을 박찼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거리가 좁혀지고 있는 만큼 최대한 서둘러야했다.
저벅저벅.
아직은 어슴푸레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늙수그레한 노인이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낡은 무복이 아니라면 촌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등에는 무언가를 교차해서 메고 있었다.
“오늘은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겠어. 바람도 없고 구름도 보이지 않으니. 안 그런가?”
뒷짐을 진 채로 느릿하게 대로를 거닐던 노인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늘에 향해 있던 시선을 대로의 끝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청민이 있었다.
“······.”
“흘흘. 마교 종자와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건가.”
“한낱 종자라고 폄하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닌 것 같소만.”
“호오. 그래도 인정해 주는 건가?”
노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교라면 치를 떠는 중원인이, 그것도 곤륜파라는 명문대파의 제자가 자신을 인정해줄 줄은 몰라서였다.
물론 시간을 끌기 위해 일부러 말을 받아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근데 그건 아닌 것 같군.’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청민에게서는 다급함이라거나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굳은 결의만이 느껴졌다.
‘내 기운에 담긴 의지를 느낀 것인가. 별 볼일 없는 제자라고 알려졌는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되는군.’
노인이 내심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저 그런 녀석이었다면 자신이 친히 이곳까지 왕림한 게 무의미했을 텐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느낌이었다.
“언뜻 느껴지는 기운만 봐도 진명마가주 이상인데 어찌 마교 종자라 하겠소. 거마(巨魔)라면 모를까.”
“거마라고 하기에는 내가 좀 왜소하지 않나?”
“단순히 체격만 따지자면 피차일반 같소만.”
“흘흘! 패선의 사제라 그런가 입심이 대단하구먼.”
“누구시오?”
노인은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청민은 불안했다.
그의 기감에 다른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천년마교인 이상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누구일 것 같나?”
“모르겠소이다.”
“시간을 끌 생각은 아닌가보군.”
“그걸 바란다면 넘어가 주겠소?”
청민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로서는 시간을 끌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자신이 노인을 붙잡고 있는 만큼 아이들이 무사할 확률은 높아지니까.
“글쎄. 그건 좀 고민이 되는군. 대벽검(大壁劍)이 원래 목표이기는 했는데, 그래도 한 명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나으니까. 더구나 한두 명도 아니고 패선의 제자들이 모두 다 모여 있는데 대벽검 하나로 만족하기에는 좀 아쉽지.”
청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모든 걸 알고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태무문을 노린 것 자체가 함정일지도 몰랐다.
‘방심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란 말인가.’
은근히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다른 곳들과 달리 곤륜파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떤 곳보다 경계했다는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천년마교의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자 청민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테니.”
“자신 있나?”
“자신이 없어도 해야 될 일이 있는 법이오.”
“기개가 좋군. 역시 패선의 사제라고 해야 하나.”
노인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빈정대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청민은 스스로 죽을 자리로 걸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망이라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소속감이 끈끈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사질들을 구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청민의 모습에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찌됐든 그로서는 도망치지 않는 쪽이 좋았다.
“패선의 사제이자 곤륜의 제자다.”
스르릉.
청민이 검을 뽑았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몰랐지만 그는 두렵지 않았다.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었고, 중요한 건 언제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였다.
“그리 말하니 내 정체를 밝히지 않을 수가 없군. 무인다운 무인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 또한 예의이니. 노부는 곤마(棍魔)일세. 이름은 너무 오래 전에 잊어버려서 생각나지 않는군.”
“···설마 구마(九魔)이오?”
“그렇다네. 당대 구마의 한 명이 노부일세.”
청민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진명마가주보다 더한 고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하니 구마의 일인일 줄이야.
거물이어도 너무 거물이었다.
‘반대로 만하면 구마가 노릴 정도의 인물이 된 건가, 내가.’
< 제 88장. 아아! 청민아…. -02 > 끝
ⓒ 윤신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