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82화 (282/325)

< 제 88장. 아아! 청민아…. -01 >

탁.

붓을 내려놓은 제갈현의 표정이 어두웠다.

감숙성은 벽우진의 빠른 지원으로 한시름을 놓았지만 문제는 운남성이었다.

속가제자들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에 힘쓰고 있던 점창파에 또 다시 악운이 덮쳤다.

점창파를 무너뜨렸던 오독문이 재차 습격하며 또 다시 중원 진출을 공표했던 것이다.

“천년마교만으로도 정신없는 마당에. 아니. 그래서 노린 건가.”

오독문의 기세는 과거와 비교하면 확실히 약했다.

지난번 전쟁 때 입은 피해를 아직도 복구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정예라 할 수 있는 문주와 사군(四君)이 건재했기에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오독문에 상극이라 할 수 있는 사천당가가 현재 함부로 사천성의 성도를 떠날 수 없다는 점도 큰 문제였다.

“교활한 놈들.”

지도를 내려다보는 제갈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말 그대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느낌이었다.

“일단은 형산파가 잘 막아주길 기도해야지.”

아미파도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현재 운남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형산파였다.

그렇다고 해도 호남성 형산에 자리 잡은 형산파가 운남성까지 가려면 귀주성을 가로질러야 했다.

해서 귀주성의 백도문파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제갈현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다른 성들과 달리 귀주성은 백도세력이 그리 크지 않은 성이기도 했고, 특별히 강력한 문파나 가문도 없었기에 오독문을 상대하기에는 여러 모로 부족했다.

“설마 북해빙궁까지 갑자기 내려오는 건 아니겠지.”

생각지도 못한 오독문의 재침공에 제갈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니길 바라고 있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오독문과 달리 궁주와 십존이라는 최정예가 모두 쓰러지기는 했지만 북해의 패자가 북해빙궁이었다.

그런 만큼 전의 침공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전력을 상당 부분 복구했을 게 분명했다.

“하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천년마교만으로도 버거운 실정인데 여기에 오독문까지 가세하니 날이 갈수록 흰머리가 늘어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 소자 준이옵니다.”

“저도 같이 왔어요.”

“들어오너라.”

답답한 마음에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던 제갈현이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끊이질 않는 업무로 온몸이 쑤셔왔지만 그럼에도 자식들의 등장은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바쁘신데 저희가 방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너도 알지 않느냐. 일은 끝나지 않는다는 걸. 단지 일이 적느냐, 많느냐의 차이일 뿐.”

“맞습니다.”

제갈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제갈세가의 대소사는 제갈현이나 제갈명의 손에서 결정되어지지만 소가주인 그가 맡고 있는 소임 역시 적지 않았다.

소가주라는 직위는 이름만 있는 게 아니었기에 두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제갈준이 하는 일 역시 상당했다.

이번 사천행 역시 그가 책임지며 이끌었고 말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별다른 일은 없었느냐?”

“숙부가 저를 너무 강하게 키우려는 것 같습니다.”

“후후후.”

평소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하는 아들의 모습에 제갈현이 피식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누구보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게 아들이라는 것을 잘 알아서였다.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고?”

“저만 힘들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저보다는 다른 분들이 힘드셨죠.”

“집에 있어도 된다니까.”

“미약한 힘이지만 저도 한 손 보태고 싶었어요. 저도 중원인이잖아요.”

제갈미미가 다부진 얼굴로 말했다.

실질적인 무력은 별 볼일 없는 수준이었지만 대신 그녀는 제갈세가의 핏줄답게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군사부의 한 자리를 능히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오히려 저는 후방에 있는 게 죄송스러운데요.”

“각자의 역할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모두 다 검을 들고 싸워서는 승리할 수 없지.”

제갈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딸내미를 쳐다봤다.

항상 어린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다 큰 처녀가 되어 있었다.

어느새 한 명의 어엿한 성인이 된 모습에 제갈현은 흐뭇하면서도 씁쓸했다.

“소집령은 어떻게 되었느냐?”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거부한 곳들은 극히 드뭅니다. 그나마 거부한 곳도 사정을 들어보면 납득이 되고요. 웬만큼 안 좋은 상황이 아닌 곳은 전부 소집령에 응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편제만 남았구나.”

“예.”

제갈현이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천년마교라서 그런지 북해빙궁이나 오독문 때와는 사뭇 다른 대응에 그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번에도 뜻을 모으는 게 흐지부지 되었다면 지난번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피해를 입었을 게 분명했다.

‘아니. 무너졌을지도 모르지.’

늘 천년마교의 침공을 막아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중원무림의 암흑기 역시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다들 망설이지 않고 나서는 것이었고.

“어떻게 보면 가장 큰 문제가 남았지요.”

“그래도 해야만 해. 최대한 서둘러서.”

“때문에 군사부의 인원이 가장 먼저 배치된 것 아니겠습니까.”

“명이랑 미미와 함께 하니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있고.”

“안 그래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서 다 해야 했다면···.”

제갈준이 말끝을 흐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던 것이다.

칼을 쥐고 전선에 나서야 하는 무인들만큼은 아니겠지만 군사부 인원들이 감당해야 하는 업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내 앞에서 주름잡지 말고.”

“아, 죄송합니다.”

“일단 대략적으로라도 편제를 끝내 놔. 내가 확인만 할 수 있게. 특히 오단(五團)부터. 혼천천귀대가 지리멸렬 했다고 하지만 상대가 다름 아닌 천년마교야.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피해가 커도 금세 충원이 될 거다.”

“그리하겠습니다.”

“미미는 오빠 보좌해주고.”

“네.”

제갈미미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얼굴에 제갈현은 옅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부탁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힘든 거 있으면 가감 없이 바로 나에게 말하고.”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제갈현이야 두 말할 필요가 없었고 제갈준, 제갈미미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세 사람은 정말 할 얘기만 하고 헤어져야 했다.

달칵.

방을 나서는 아들딸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제갈현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야 일가의 가주이니만큼 이렇게 정신없이 일을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니었기에 그는 안쓰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막말로 아이의 손조차도 필요한 시점이 지금이었다.

그런 만큼 자식들의 도움도 절실한 상황이었기에 제갈현은 씁쓸히 중얼거렸다.

진명마가의 습격은 막았지만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청해성 곳곳에 마도와 흑도의 무리들이 발호했기에 오늘도 곤륜파의 제자들은 쉬지 않고 사방을 헤집고 다녔다.

“여기도 얼추 정리가 되어 가네요.”

“수준 차이가 너무 나.”

처음과는 달리 상당히 가까워진 서예지와 현주혜가 시체들로 가득한 장내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을 했지만 피해가 아예 없지만은 않았다.

그래서인지 태무문(太武門)의 문주는 멍한 얼굴로 죽은 문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거의 반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에 망연자실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죠. 청해성은 중원보다 세외에 더 가까우니까요. 괜히 변방이라 불리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신강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래도 다들 열심히 노력했을 거예요. 다만 한계를 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현주혜를 달래듯이 서예지가 말했다.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죽은 이들을 탓해서는 안 되었다.

죽은 이들이라고 해서 약자로 살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장문인은 잘 도착하셨으려나?”

“사부님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요.”

“너무 무신경한 거 아냐?”

현주혜가 피식 웃었다.

무기명제자라고 하지만 그래도 대제자라고 할 수 있는데 서예지가 너무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사숙님들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세요. 사부님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그래도 장문인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마. 서운하실 거야.”

“당연하죠.”

서예지가 두 말하면 잔소리라는 듯이 대답했다.

절대 면전 앞에서는 할 생각이 없어서였다.

“여기 계셨군요.”

“청민 장로님.”

두 사람 곁으로 청민이 다가왔다.

인솔자답게 가장 많은 이들을 상대한 모양인지 청민의 도복에는 핏자국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상처는 없어 보였다.

“굳이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남의 일이 아니잖아요. 저도 중원인인 걸요.”

“그렇긴 합니다만. 참, 보타문의 인원들이 막 섬서성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멀었네요.”

현주혜가 미간을 좁혔다.

소식을 전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감숙성조차 넘지 못했다는 소식에 현주혜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도 섬서성이면 금방입니다. 길을 잘 모를 수도 있고.”

“길 안내는 개방이 도와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하하하.”

청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그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였다.

사실 생각보다 속도가 늦은 편이기도 했고.

“거의 끝에서 끝으로 오는 거잖아요. 예기치 못한 일들을 겪고 있을 수도 있죠. 여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중원 역시 난리일 테니까요.”

“그래도 너무 늦어.”

서예지가 거들었으나 현주혜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동 속도가 너무 느린 것 같아서였다.

“좋게 생각하시죠. 느리긴 해도 별 탈 없이 오고 있지 않습니까. 연락도 꾸준히 되고 있고.”

“그건 다행입니다만.”

현주혜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둘러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전서응으로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이 한정적이라 설명을 다 못했을 겁니다. 문주님께서 이해하시죠.”

“최대한 서둘러 주었으면 좋겠어요.”

현주혜의 시선이 부상자들을 나르고 치료하는 곤륜파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지만 이제는 어엿한 무인 태가 나고 있었다.

찌릿!

그런데 그때 현주혜와 청민의 눈빛이 달라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주 강렬한 파동이 느껴졌던 것이다.

“장로님.”

“···문주님.”

파동을 느낀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한 건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 기운이라면, 천년마교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 거리가 상당함에도 살갗이 저릿해질 정도의 마기에 청민이 무거운 표정으로 주억거렸다.

동시에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기에 이 정도 마기를 흩뿌리나 싶었던 것이다.

‘진명마가주 정도의 수준인 것 같은데.’

청민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언뜻 느껴지는 기운이 진명마가주와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물러나야 해요.”

청민만큼이나 심각한 얼굴로 현주혜가 말했다.

그녀 역시 상대의 수준을 짐작한 것이었다.

아니, 대놓고 드러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따라잡힐 겁니다. 아마 일부러 이 정도 거리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거겠지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누군가는 시간을 벌어줘야 합니다.”

현주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여유로웠던 얼굴에는 다급함이 깊게 서려 있었다.

“제가, 제가 남겠어요.”

“저 쪽에서 원하는 건 문주님이 아닙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그리고 문주님께는 따로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 제 88장. 아아! 청민아….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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