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6장. 전란의 시대. -03 >
“죽은 개방도들은 안타깝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청성산과 본가의 거리는 지척입니다. 절정고수를 기준으로 삼으면 하루를 꼬박 달리면 본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말을 탄다면 더욱 빠르겠지. 말이야 청성산에서 구하면 되니까. 그만한 자금력도 있고.”
장로들이 무거운 얼굴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비상회의를 연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청성산과 사천당가가 있는 성도와는 지근거리라는 점 때문이었다.
“현재 청성산을 차지한 마교도 놈들의 전력도 파악되지 못한 상황이니.”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그거다. 적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해. 아미파에는 연락 했느냐?”
“혹시 몰라서 전서응으로 보내 놓았습니다. 개방도들이 연락하기는 했겠지만 전서응보다는 느릴 테니까요. 살아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개방도가 아니더라도 거지가 보이면 발견되는 족족 죽이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당문경은 소식을 듣자마자 아미파에도 연락했다.
청성산에서 가까운 것은 아미산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본가로 출발했을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도 예상해 두어야 해.”
당민호가 아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청성파를 무너뜨린 천년마교가 기세를 살려 그대로 진군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더구나 선택지가 두 군데 뿐이니만큼 그에 따른 대비를 해야 했다.
“안 그래도 지시를 내려놓았습니다. 당가타 전체가 전투 준비 중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본가의 장원이 철옹성이라고 하나 상대는 천년마교야. 천년마교의 전력이 우리 쪽에 집중되면 확실하게 방어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어.”
“그래서 주변의 무가와 문파들에게도 인편을 보냈습니다. 아마 천년마교가 성도에 진입하는 것보다 지원군이 당가타에 도착하는 게 빠를 것입니다. 이미 연락망을 구축해 놓기도 했고요.”
어수선한 장원의 분위기와 달리 당문경은 이미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사천당가 뿐만 아니라 성도 인근의 정도문파들 역시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제갈세가에는?”
“같이 보냈습니다. 다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오후 정도는 되어야 제갈세가에 연락이 닿지 않을까 싶습니다.”
“빨라야 오후이겠군. 늦으면 저녁 일 테고.”
“그렇습니다.”
“곤륜파는?”
대처가 어느 정도 끝난 듯해 보이자 당민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청성파가 당한 마당에 곤륜파라고 안전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사천성보다 더 인접해 있는 게 청해성이기도 했고.
“아직 들어온 소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전서응을 보냈습니다.”
“으음.”
당민호는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곤륜파를 경유하지 않고 다른 길로 사천성에 들어올 가능성도 있지만 그럴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일반적으로 등 뒤에 적을 남겨놓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 정마대전 당시 가장 먼저 천년마교의 침공을 받았던 곳이 곤륜파이기도 했고.
“날이 밝아야 소식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방이 가장 활발히 움직이고 있으니 아침이면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선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그게 먼저이니.”
당민호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가 아는 벽우진은 결코 제자들을 희생시키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위험하다 싶으면 물러날 터였다.
개인의 무력 역시 천하제일인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당민호는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생각했다.
“예.”
“당가타에는 내가 가겠다. 그러니 가주는 본가를 맡거라.”
“알겠습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이들을 지나며 당민호가 대전을 나섰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마교도들이 몰려 올 수 있기에 당민호는 서둘렀다.
중원이 발칵 뒤집어졌다.
머지않아 천년마교의 침공이 있을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충격적으로 시작하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었다.
침공을 알리는 시작이 청성파의 멸문이자 중원무림의 시선이 사천성으로 향했다.
구대문파 중 한 곳인 청성파의 멸문도 충격이었지만 청성파가 자리 잡은 청성산은 성도와 아미산과도 가까웠기에 모두의 시선이 사천성으로 향한 것이다.
더불어 수많은 무림인들이 사천성으로 모여 들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천년마교의 침공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수많은 의인협객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거점인가.”
소식이 전해지기 무섭게 사천당가를 찾은 제갈현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 그의 시선은 사천성의 지도에 향해 있었다.
“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일단 천년마교에도 거점은 필요하니까. 다만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어서 의문이지.”
“선발대라고 하기에는 전력이 상당하니까요.”
“진명마가를 제외한 육대마가의 전부가 모여 있으니까.”
방 안으로 당민호가 들어왔다.
그런데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모양인지 눈 밑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천년마교가 곤륜파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지요.”
“예전이었다면 충분했겠지. 다만 지금 곤륜파에 그 녀석이 있다는 걸 간과한 게지.”
“맞습니다. 현재 곤륜파에는 패선이 있으니까요. 그것도 독이 바짝 오른.”
“독이 바짝 오르다라는 표현은 본가에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말이지. 중원에서 독 하면 본가 아닌가. 그리고 천년마교에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건 본가 역시 마찬가지야.”
“그렇게 따지면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제갈현이 옅게 웃었다.
피곤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 했다.
증원도 곧 있을 예정이었고 말이다.
“청성파가 멸문지화를 입은 건 안 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크게 도움이 되었어. 만약 청성파가 당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중원무림이 결속되지 못했을 거야.”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습니다. 아마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러갔겠지요. 상당수는 눈치를 살폈을 테고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이 팽배한 것 또한 사실이니까.”
당민호가 혀를 찼다.
이기심은 개인과 단체를 가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어쩌면 저희의 가장 큰 적은 천년마교가 아니라 이기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아직은 여력이 있는 모양이군.”
“사실 급한 건 저희보다는 곤륜파입니다. 벽 장문인이 있다고 하지만 위험한 상황이 끝난 건 아니니까요.”
“오대마가의 전력이 청성산에 있는 것도 위험하지만 가장 큰 위협은 천년마교의 전투부대들이지. 다섯 개의 전투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파악이 안 되고 있으니까. 천산에 있으면 다행인데 만약 이미 중원에 들어와 있다면···.”
당민호가 말끝을 흐렸다.
만약 다섯 개의 전투부대가 이미 중원에 들어와 있다면 청성파와 같은 꼴이 수많은 곳에서 발생할 터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당민호는 육대마가보다 다섯 개의 전투부대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개방을 믿어 봐야지요. 천이각(千耳閣)도 거의 완성단계이니 곧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무림맹이라.”
“사실 지금도 좀 늦었습니다. 청성산을 공격하기 전에 준비가 다 끝났어야 했는데.”
“아직도 늦지는 않았어. 이미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도 했고. 다만 걱정되는 건 전력을 반으로 나눈 거지.”
당민호의 시선이 지도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아미산이 그려진 곳을 쳐다봤다.
“알려진 병력이 사실이라면 육대마가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합니다. 두 곳 중 어느 곳 하나 압도하기 힘드니까요.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유리한 건 저희들입니다. 지원군이 계속 늘어날 테니까요.”
“근데 어디로 왔을까. 소수로 흩어져서 왔다고 해도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는데 말이지.”
당민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인 이상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는데 귀신이 도와주기라도 한 것처럼 천년마교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마른하늘에서 청성산으로 뚝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서장을 경유해서 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천성은 서장과도 인접해 있으니까요. 곤륜파야 당연히 신강 쪽에서 넘어왔을 테니까요.”
“서장이라. 포달랍궁이 가만히 있을까?”
당민호는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신강에 천년마교가 있다면 서장에는 전통의 강자인 포달랍궁(布達拉宮)이 있었다.
또한 포달랍궁 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세력을 갖추고 있는 뇌음사도 있었기에 당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야 많으니까요. 단순히 길만 이용하는 거라면 의견조율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는 말처럼 상황에 따라 입장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당민호의 표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천년마교만 하더라도 골치가 아픈데 여기에 포달랍궁까지 합세한다면 정말 더욱더 힘들어질 터였다.
“안 그래도 개방주에게도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서장의 상황도 같이 살펴달라고요.”
“없던 머리카락이 더 없어지겠는데.”
“대신 사천성은 당가에서 좀 더 신경 써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사천성이 우리 앞마당인데.”
“하하하.”
제갈현이 옅게 웃었다.
살짝 과장되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어서였다.
불가와 도가계열의 문파인 청성파와 아미파에 비하면 사천당가는 속세와 깊게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근데 이 정도 병력이면 한 번 붙어볼 만 하지 않나? 더구나 지금 저 놈들이 자리 잡은 곳은 청성산인데.”
“아직은 아닙니다. 저희의 병력이 늘어나는 것처럼 천년마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마도문파들이 청성산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지금 해야 할 건 그들의 합류를 저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보급도 방해해야 하고요.”
“일이 많아.”
“그래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제갈현의 표정이 달라졌다.
보급로만 틀어막아도 전쟁이 몇 배는 쉬워질 터였다.
게다가 마도문파들의 합류를 막는 건 보급을 방해하는 효과도 같이 가져왔다.
아무리 뛰어난 고수도 결국 사람이었고, 먹지 못하면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일단 목줄부터 틀어쥐자는 말이지?”
“예. 청해성은 벽 장문인께 부탁드렸습니다.”
“그럴 만한 여력이 있나 모르겠네. 아직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 더구나 진명마가까지 상대한 뒤잖아.”
“청해성을 대표하는 문파는 곤륜파이지만 청해성에는 곤륜파만 있지 않습니다.”
“아하.”
당민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이 너무 곤륜파에만 집중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곤륜파가 워낙 커져서 그렇지 청해성에도 뛰어난 군소방파들이 제법 있었다.
제갈현은 바로 그들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사천성 역시 마찬가지고요. 사천당가와 아미파는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든든하고 막강한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요. 그래야 육대마가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합니다.”
“장기판으로 치면 졸들의 싸움인가.”
“그렇습니다.”
“근데 좀 아쉽군. 정작 놈들이 등장했는데도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게.”
손이 근질거리는지 당민호가 얼굴 가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지난 정마대전을 직접 겪었던 만큼 그는 갚아야 할 빚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곧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지금은 말 그대로 폭풍전야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만 해.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얌전히 있을 테니까.”
“말씀드렸던 것도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 여기는 사천성이라고.”
당민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일어났다.
현재 가장 바쁜 사람이 제갈현이니만큼 시간을 더 이상 빼앗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역시 할 일이 산재해 있기도 했고.
“믿겠습니다.”
“아아.”
왠지 모르게 벽우진이 연상되는 듯한 말투와 함께 당민호가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을 일별한 제갈현은 다시 두 눈과 두 손을 바삐 움직였다.
< 제 86장. 전란의 시대.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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