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6장. 전란의 시대. -02 >
얼마나 놀랐는지 돌부리에 걸려 엉덩방아를 찍은 반천우를 향해 삼 장로와 사 장로가 달려왔다.
격전 중에 가까스로 빠져나왔다는 듯이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말이다.
오직 반천우를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빠져 나온 두 사람은 곧바로 벽우진에게 쇄도했다.
반천우가 몸을 뺄 시간을 벌 요량이었다.
“쓸모없는 짓이야. 이미 저 놈은 삼도천에 발을 디뎠거든.”
“······!”
삼 장로와 사 장로의 동공이 일순 확대되었다.
안 그래도 둘 다 갑작스러운 기운의 폭발에 놀랐었다.
근데 그게 선천진기를 터트린 것일 줄이야.
“나로서는 네놈들이 제 발로 와줘서 고맙지만. 안 그래도 저 놈은 효용가치가 다 되었는데.”
“큭!”
갑자기 터져 나오는 위압감에 두 장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무릎 꿇기를 강요하는 듯한 묵직한 중압감에 몸이 휘청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고수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인들이었다.
이내 공력을 일으켜 벽우진의 기운에 대항하고는 이내 검과 창을 휘둘렀다.
‘우리 둘이 함께라면!’
진명마가주인 반천우가 선천진기까지 사용해야 할 정도의 강자라는 걸 둘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벽우진 역시 내공소모가 상당했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막강한 무위를 선보였다고 하나 벽우진 역시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적지 않은 내공을 소모했을 터였다.
‘승산은 있다!’
눈빛만으로도 뜻이 통하는 두 장로가 좌우로 갈라졌다.
벽우진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둘은 내심 바랐다.
무너졌던 반천우가 한손 거들기를 말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그걸 제대로만 사용해준다면 승산은 더 올라간다.’
검을 움켜쥔 이 장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에 반천우만 합세한다면 승산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쉬이익!
마기로 이루어진 시커먼 검강이 벽우진의 심장을 노렸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삼 장로의 창극이 단전을 노리고서 섬전처럼 파고들었다.
귀신같이 서로 다른 곳을 노린 것이었다.
착.
그 광경에 두 장로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손발이 맞는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나 그 미소는 얼마 가지 못했다.
“아니···!”
동시에 이뤄지는 협공을, 누구라도 쉽게 감당하지 못할 공격을 벽우진은 너무나 쉽게 받아냈다.
아니, 받아내는 것을 넘어 두 사람의 애병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우우우웅!
이윽고 붙잡은 병장기를 통해서 벽우진의 막대한 진기가 흘러갔다.
놀랍게도 벽우진은 단숨에 내공대결로 싸움을 바꿔버렸던 것이다.
“크으윽!”
“흐읍!”
애병을 타고서 넘어오는 무지막지한 공력에 두 장로의 얼굴이 금세 시뻘게졌다.
하지만 얼굴에 핏줄이 솟아날 정도로 전력을 다해 내공을 끌어 올렸음에도 검과 창에 서려 있는 마기는 눈에 띌수록 약해져갔다.
둘을 상대로도 벽우진이 오히려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벽우진의 표정은 평온했다.
“꿇어.”
쿵! 쿠웅!
내공대결은 너무나 허무하게 끝났다.
두 장로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던 것이다.
“끄으으!”
다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병장기를 넘어 그들의 몸속으로 파고든 벽우진의 진기는 마치 야생마처럼 두 사람의 내부를 쉴 새 없이 휘저었다.
말 그대로 인정사정없이 전신 혈맥을 찢어발기자 두 장로의 입에서 이내 시뻘건 선혈이 흘러나왔다.
“장문인.”
“그쪽도 끝난 모양이군요.”
“장로들은 정리되었습니다. 마인들 역시 금방 끝날 겁니다.”
삼 장로와 사 장로가 고통으로 몸을 덜덜 떠는 걸 일별한 벽우진이 다가오는 설백을 쳐다봤다.
그러자 설백이 피에 젖은 검을 털어내며 빙그레 웃었다.
“피해가 제법 있네요.”
“이 정도면 그래도 대승이지 않습니까.”
제자들 중에 죽은 이는 없지만 빈객들 중에는 제법 있었다.
마교의 습격에 망설이지 않고 힘을 보태준 이들이었기에 벽우진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대승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죽은 이들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죽은 분들의 시신을 잘 챙겨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벽우진이 시선을 돌렸다.
아직 살아 있는 반천우를 쳐다봤던 것이다.
“다행히 아직 시간이 있네. 우리 대화 좀 할까? 물론 비협조적이어도 상관은 없어. 오늘은 주둥이가 꽤 많거든.”
꿀꺽!
반천우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자결할지 말지를.
이미 자부심과 자긍심은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기에 그는 고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죽기 직전까지 갖은 굴욕과 치욕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사실 크게 기대하고 있지도 않고. 물론 나야 순순히 협조한다면 좋겠지만.”
반천우가 두 눈을 감았다.
아들의 복수도, 동생의 복수도 해주지 못한 게 너무나 가슴 아팠지만 이제 그는 알았다.
둘의 죽음이 불가항력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이다.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것이다.’
핏발 선 눈으로 벽우진을 노려보던 반천우의 입에서 검게 죽은 피가 흘러 나왔다.
“흥.”
하지만 그 모습에 벽우진은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멀쩡하더라도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만약에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대세를 바꾸지도 못할 터였고.
퍼퍼퍼펑!
반천우를 일별한 벽우진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허공에 거대한 장인이 생성되며 진명마가의 마인들을 압살시켰다.
“어마어마하네요.”
“역시 지켜보라고 한 이유가 있었어.”
적은 전력임에도 오히려 진명마가를 압도하는 곤륜파의 전력에 멀찍이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던 석정후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 역시 천년마교의 악명은 익히 들어 왔었다.
그렇기에 마인들이 습격해온다는 말에 내심 걱정을 많이 했었다.
벽우진을 못 믿는 건 아니었으나 수적으로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서였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믿고 지켜보면 된다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 근데 표정은 엄청 심각했잖아. 동공과 두 다리가 떨리던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저도 한 손 보탤까 고민하던 것이었습니다.”
“말은. 근데 진짜 믿기지가 않는다. 그냥 다 때려잡네. 사부님도 그렇고 호법님들도 그렇고.”
“괜히 곤륜파를 호랑이 굴이라고 부르겠습니까. 다 이유가 있는 거죠.”
백륜이 감탄한 얼굴로 도망치는 마인들을 뒤쫓는 곤륜파의 제자들을 쳐다봤다.
처음에는 사실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고수층이 두텁다고 하나 수적 차이는 어쩔 수가 없는 듯했다.
하지만 벽우진이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나도 저기서 함께 싸워야 하는데···.”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맞아.”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석정후의 귓가로 수십 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는 그와 백륜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곤륜파의 속가제자들 전부가 모여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다들 언제라도 싸울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너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지만, 우리는 다르다고.”
“우리고 싸울 수 있는데.”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
“잃고 싶지도 않고.”
송찬승을 비롯하여 몇몇 속가제자들의 눈빛은 뜨거웠다.
천년마교의 습격을 보자 작년에 있었던 은월단의 암습이 떠올라서였다.
그때 많은 사형제들이 죽었고, 그 상처는 여기 있는 모두에게 여전히 깊게 남아 있었다.
“아직은 무리인가.”
“많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피 튀기는 혈전을 지켜보던 속가제자들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함께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벽우진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너희만 그런 게 아니다.”
“청욱 장로님.”
“너희는 속가제자지만 난 장로이지 않더냐.”
뒤에서 들려오는 문중헌의 목소리에 속가제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문중헌은 그 모습에 손을 저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인사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나는 호법인데.”
“흠흠! 사소한 것은 넘어가시죠.”
“너무 서운해 하지들 마라.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나중에는 너희들이 귀찮을 정도로 일을 시킬 게 분명하니까 지금은 참아.”
“그런 날이 올까요?”
“물론. 다음 세대의 주인공은 너희들이다. 또한 곤륜파를 이끌어야 하는 것도 너희들이고. 그러니 잘 봐두도록 해라. 장문인과 일대제자들이 어떻게 싸우고, 지키고 있는지를.”
말투는 가벼웠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더없이 묵직했다.
그렇기에 속가제자들은 활활 불타는 눈빛으로 전투를 지켜봤다.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라는 말이 그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본격적인 시작인가.’
투지와 열망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내는 속가제자들과는 달리 전장을 지켜보는 비현의 표정은 어두웠다.
지금부터가 시작임을 그는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번이야 잘 막아냈지만 문제는 다음이었다.
육대마가 중 두 곳만 와도 곤륜파는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아무리 장문인이라고 하더라도 모두를 지키며 싸울 수는 없다.’
벽우진의 무위를 생각하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살아남을 터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을 지키며 싸울 수도 없었다.
“올 한 해는 유독 길겠구나.”
“그럴 것 같습니다.”
속가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은 얼굴로 문중헌이 대답했다.
예전에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그리 할 수 있었다.
‘그때의 장로님들과 일대제자들의 마음이 이러했겠지.’
모두가 죽음을 직감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 마음을 문중헌은 이제 와 깨달았다.
“정리하러 가자꾸나.”
“예!”
마무리가 되어가는 듯한 모습에 비현이 입을 열었다.
아침이면 곤륜파를 찾아올 손님들에게 시체와 핏자국이 가득한 산문을 보여줄 수는 없어서였다.
잠시 후 비현과 문중헌을 위시로 속가제자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꼭두새벽에 사천당가가 벌컥 뒤집혔다.
갑작스러운 천년마교의 진군은 물론이고 청성파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곧바로 비상태세에 돌입했던 것이다.
벌컥!
대전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당민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로 사천당가의 장로, 간부들이 차례대로 등장했다.
비상사태에 모두가 대전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태상가주님.”
“소식을 가져온 아이는?”
“둘 모두 기식이 엄해 현재 치료 중입니다.”
“심각하느냐?”
당민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을 들어보니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숨은 아직 붙어 있습니다만···.”
“마교의 짓이겠군.”
“아닙니다. 하수인이었습니다. 사천성에 터를 잡고 있는 마도문파의 제자였습니다.”
“으음!”
당문경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가 알아차렸던 것이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따라 뛰는구나.”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지 않습니까. 다만 문제는 너무 갑작스럽고, 빠르다는 점입니다. 청성산이 함락 당했다는 소식 말고는 아직까지 알아낸 것이 없으니까요. 청성산 인근의 개방도들 모두 소식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당민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소식이 끊어졌다는 뜻은 다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게 천년마교의 방식이기도 했고.
‘굴복하지 않는 자는 모조리 죽이는 놈들이지.’
마인이되 광신도인 놈들이 바로 마교도였다.
그런 만큼 붙잡혔으면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 제 86장. 전란의 시대.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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