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74화 (274/325)

< 제 85장. 진명마가(眞明魔家). -02 >

사위에 어둠이 짙게 내린 야심한 시각에 곤륜산을 오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무려 사백여 명이 넘는 인원이었는데 그들은 빛이라고는 초승달이 뿌리는 달빛 밖에 없는 야밤의 산을 너무나 편하게 올라갔다.

“저기 산문입니다.”

“부숴버려.”

선두에 서서 올라가던 반천우는 심복의 설명에 싸늘하게 지시했다.

오늘 이후 곤륜산에 존재하는 곤륜파의 물건은 단 하나도 멀쩡히 남겨둘 생각이 없었고, 그건 산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존명.”

“참나. 누가 마교 나부랭이들 아니랄까봐 하는 짓도 무식하기 그지없구나.”

스스슥!

난데없이 들려오는 음성에 피풍의를 입고 있던 흑의인들이 빠르게 반응했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몇은 암습에 대비하려는 듯 선두의 중년인을 자신의 몸으로 가렸다.

“네놈이로구나. 어쭙잖게 패선이라 불리는 놈이.”

“언제 봤다고 이놈저놈 하는 건지 모르겠네. 딱 봐도 나보다 어린새끼가 말이야.”

놈놈 거리는 말에 벽우진 역시 히죽 웃으며 맞받아쳤다.

나뭇가지에 비스듬히 앉아서 이죽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반천우도 만만치 않았다.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데에는 순서가 없지.”

“맞아. 개인적으로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고. 내가 특히 마도, 사파의 종자들을 잘 보내거든. 바로 저기로.”

벽우진이 비릿하게 웃으며 검지를 펼쳐보였다.

정확히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건 오늘로서 끝나겠군. 더 이상 네놈이 숨 쉬지 못할 테니까.”

반천우가 스산한 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벽우진의 기세에 한치도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다들 그렇게 지껄였지. 하지만 결과는 이렇더라고. 아마 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야.”

스스슥!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문을 향해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전의를 불태우며 곤륜파의 제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청민과 서진후가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빠릅니다. 인근의 개방도들을 싹 다 제거했는데도···.

“상관없다.”

심복이 은밀히 보내오는 전음을 중년인은 도중에 끊었다.

애초부터 암습하거나 기습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진명마가의 주인이었다.

천하제일문도 아닌 일개 곤륜파 정도는 정면 대결로도 충분히 박살낼 수 있었다.

“쯧쯧! 측근의 말을 그렇게 귀담아 듣지 않아서야. 생긴 것대로 독단적인 고집불통이구만.”

“시간을 끌어 보려는 속셈인 것 같은데, 소용없는 짓이다. 개방이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나 있을 테니까.”

“그렇겠지.”

“또한 곤륜산 역시 불바다가 되어 있겠지. 지난번 정마대전 때처럼.”

벽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반천우가 무엇을 노리고서 이런 말을 했는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건 네놈의 희망사항이겠지. 고작 사백 명 가지고 뭘 하겠다고.”

“곤륜파 따위를 멸문시키기에는 충분하지. 핏덩이들의 손까지 빌려야 하는 곤륜파와는 격이 다르다고나 할까. 후후!”

반천우가 조소를 머금었다.

나름 위풍당당하게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그러자 뒤에 있던 마인들 역시 비웃음을 터트렸다.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로군. 숫자만 믿고 까불다가 된통 당한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도 말이야.”

“그깟 놈들과 본가를 비교하지 마라. 진명마가라는 이름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니까.”

“아, 진명마가 출신이로구만? 근데 혼자서 왔어? 마교에는 여섯 개의 가문이 있지 않나?”

“곤륜파 정도는 본가만으로도 과하다.”

반천우가 단언하듯 말했다.

패선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중원에서나 통용되는 실력이었다.

나약한 중원인들 중에서나 최고이지 기준을 신교로 잡으면 이십 위 안에도 들지 못할 터였다.

“자신감이 대단한데. 물론 실력이 그걸 뒤받쳐 줄지는 의문이 들지만 말이지. 그래도 고맙네. 찾아갈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이렇게 찾아와줘서 말이지.”

벽우진의 표정이 일변했다.

방금 전까지의 장난기 가득했던 표정이 사라지며 살벌한 눈빛을 뿌렸던 것이다.

“중원인들이 떠받들어 주니 자신이 뭐라도 된 것 마냥 생각하는 모양이로군. 운 좋게 얻은 허명에 빠져 있는 모습이라니.”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여기 온 이상 네놈들은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점이야. 내가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거든.”

“건방진 놈.”

반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종일관 거만을 떠는 모습이 심히 거슬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건 수하들도 마찬가지인 듯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살기가 무섭게 솟구쳤다.

“더구나 네놈은 나에게 갚아야 할 빚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정확히는 두 개다. 네놈에게 아들과 동생을 잃었으니까.”

“아들?”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육반수에서 만난 녀석이 진명마가 출신인 것은 알고 있지만 아들은 떠오르는 바가 없어서였다.

“내 얼굴을 보면 기억이 안 날 수가 없을 텐데.”

“재수 없게 생긴 얼굴이 의외로 많아서 말이지. 딱 봐도 악당처럼 생긴 놈들이 세상천지에 이상하게 많더라고. 근데 그 중에서도 비열한 외모로는 네놈이 상위권인데···.”

벽우진이 말끝을 흐렸다.

가만히 보니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서였다.

저 얼굴에서 한 십 년 정도 젊어지고 좀 더 얍삽한 인상으로 바꾸자 얼마 전에 마주쳤던 이가 떠올랐다.

“셋째 제자?”

“맞아. 그 녀석이 바로 내 아들이다.”

“어쩐지. 생긴 게 아주 쏙 빼닮았네. 하는 짓도 똑같고.”

벽우진이 이죽댔다.

그러나 의외로 반천우는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서늘한 눈으로 벽우진을 응시하기만 했다.

“하고 싶은 말 다해라. 잠시 뒤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을 테니까.”

스윽.

말을 마친 반천우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명마가의 마인들이 땅을 박찼다.

가주의 수신호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향하는 방향이 이상했다.

“와라!”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네놈들은 모를 것이다!”

검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진명마가의 마인들을 향해 청민과 서진후가 포효했다.

벽우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벼르고 벼른 이들이 바로 두 사람이었다.

곤륜파의 참사를 직접 보지 못한 벽우진과 달리 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지켜봤었다.

그렇기에 둘 다 악귀와 같은 얼굴로 마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괜찮을라나.’

평소답지 않게 살기를 풀풀 날리며 달려드는 두 사람의 모습에 검후가 미간을 좁혔다.

둘의 실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였다.

싸움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게 평정심인데 그녀가 보기에 두 사람은 평정심이 많이 흐트러져 보였다.

“괜찮을 게야. 흥분한 것처럼 보여도 검극이 안 흔들리잖아.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한 상태야.”

“그래도 상대가 진명마가의 마인들이에요. 숫자도 많고요.”

“숫자는 큰 의미가 없어. 우리에게는 말이지. 그걸 검후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꽈아아앙!

격돌의 시작을 알리듯 묵직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흑의인들이 튕겨져 날아갔다.

기세 좋게 달려들었으나 아쉽게도 청민의 참격을 버텨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까앙! 까아앙!

밀리기는 했어도 크게 다치지 않은 마인들이 재차 달려들었다.

그리고 호법들과 현주혜 역시 본격적으로 전투에 돌입했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마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콰콰쾅!

거기에 제자들도 합세했다.

마인들의 측면을 노리고서 기습적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진명마가 측의 전선이 크게 출렁였다.

어리다고 만만하게 보기에는 제자들의 실력이 너무나 출중했던 것이다.

“우리도 있다!”

“온 건 마음대로 왔어도 가는 건 마음대로 못 간다!”

강기를 줄기줄기 내뿜는 제자들의 일격에 마인들이 크게 밀려났다.

장로들이나 호법들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빈객들도 합세하니 처음의 폭발적이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재미나게 돌아가지?”

나뭇가지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그러나 반천우는 웃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이번 전투를 쉽게 생각했었다.

되살아나는 곤륜파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하나 진명마가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으음!’

그런데 결과는 그의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소수정예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곤륜파의 무인들은 수하들과의 싸움에서 팽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네 명은 그로서로 경시할 수 없을 정도의 무위를 뽐내고 있었다.

그게 그는 믿기지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하필이면 이곳에서 벌어질 줄이야.’

패선 말고는 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패선마저도 딱히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았었고.

한데 그게 실수였다.

“표정이 심상치 않아. 큭큭!”

처음과 달리 심각해진 반천우의 모습에 벽우진이 키득거렸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얼마안가 달라질 것이다. 지금이야 초반이니 좋은 모습을 보인다지만, 쪽수 앞에서는 장사도 별 수 없는 법이지.”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그 말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아. 뭐, 네놈이 가세하면 조금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크아아악!”

우연처럼 반천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처절한 단말마가 들려왔다.

현주혜의 검에 네댓 명의 마인들이 양분되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반천우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좋은 선택이야. 지금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소문대로 입만 살았군.”

“다른 곳도 살아 있는데, 이거 참 보여줄 수도 없고. 몸이 젊어지면서 정말 왕성해진 곳이 따로 있는데 말이지.”

벽우진이 씨익 웃으며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허리띠를 만지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반천우를 쳐다봤던 것이다.

“지저분한 놈!”

마치 자신을 놀리는 듯한 벽우진의 모습에 반천우가 일장을 내질렀다.

더는 더러운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쾅!

한순간에 뿜어져 나온 경력에 벽우진이 앉아 있던 나뭇가지가 폭발했다.

막강한 장력에 가루로 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줄기 경력이 강타하기 직전 몸을 날린 벽우진이 깃털처럼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우리도 슬슬 시작해야지? 농담 따먹기나 할 정도로 우리가 친한 사이도 아닌데.”

뒷짐을 진 채로 바닥에 착지한 벽우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북해의 얼음처럼 한없이 싸늘했다.

“내가 할 소리를 하고 있군.”

“난 또 잊은 줄 알았잖아.”

반천우의 양손이 검게 물들었다.

농밀한 마기로 인해 마치 어둠에 삼켜진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그렇게 섬뜩할 수가 없었다.

콰아앙!

마기를 끌어올린 반천우의 주먹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벽우진을 박살내겠다는 의지가 다분히 담긴 권강이 낙뢰처럼 떨어져 내렸다.

“흥!”

그러나 느닷없는 공격이었음에도 반천우의 주먹은 맨땅을 후려쳤다.

시커먼 권강이 닿기 직전 벽우진이 움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는 예상했었다.

‘운룡대팔식인가.’

곤륜파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경신술을 떠올리며 반천우가 땅을 박찼다.

벽우진이 빠르게 움직인다면 그는 그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면 되었다.

‘맞으면 뒈지는 건 똑같으니까!’

< 제 85장. 진명마가(眞明魔家).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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