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73화 (273/325)

< 제 85장. 진명마가(眞明魔家). -01 >

“결과적으로 저희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일단 마교주의 셋째 제자를 처리했으니까요.”

“전력상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지.”

교활하기만 할뿐 딱히 위협적이지 않았던 셋째 제자를 떠올리며 벽우진이 차를 들이켰다.

사실 청년을 처음 봤을 때 많이 실망하기도 했었고.

도대체 어떻게 마교주의 제자가 되었나 싶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래도 셋째 제자이지 않습니까. 충분히 경고가 되었을 겁니다.”

“근데 너무 반응이 없어서. 사기를 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벽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제자가 죽었다.

길길이 날뛰고도 모자랄 사건인데 이상하게 천년마교는 너무나 조용했다.

마치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기를 가늠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쟁이라는 게 마음먹은 순간 바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더구나 천년마교의 규모를 생각하면 준비할 게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흐음.”

“그래서 더더욱 서둘러야 합니다.”

“다음은 소림사인가?”

“예. 장문인께서 거절하셨으니 소림사로 가볼까 합니다.”

제갈현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듯이 은근한 눈빛을 보내왔다.

납득은 했지만 아직 포기한 건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소림무제라면 자격은 충분하지. 역량도 두 말할 필요 없고.”

“하지만 장문인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강호무림의 동도들은 나보다 소림무제를 더 반길 거야. 왜 그런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테지. 게다가 차차선도 있잖아?”

벽우진의 손가락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의미를 제갈현은 단번에 이해했다.

“저로서는 가급적이면 법무 대사께서 무림맹주 자리를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준비는 차곡차곡 되고 있지만 그래도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서요.”

“잘 설득해봐.”

“부맹주 자리는 어떠신지요?”

“아, 갑자기 머리가 아프네.”

갑자기 딴청을 피우는 벽우진의 모습에 제갈현이 실소를 흘렸다.

역시나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사람인 이상 명예에 초탈하기가 쉽지 않은데 벽우진은 정말 진심으로 귀찮아하고 있어서였다.

“애초에 부맹주라는 직위는 없습니다. 다른 분들이 인정할 리도 없고요.”

“그럴 테지.”

“하지만 힘은 보태주실 거죠?”

“당연히. 천년마교에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건 그들만이 아니야.”

벽우진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누가 말려도 천년마교와 싸울 사람이 바로 그였다.

곤륜파를 멸문시킨 곳이 다름 아닌 천년마교였기에 복수심으로 따지자면 그 누구도 벽우진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 말이 듣고 싶었습니다.”

“바쁜 사람이 실없기는. 그보다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가 있는데 말이지.”

“저를 말씀이십니까?”

“응. 제갈가주에게도 무의미한 시간은 아닐 거야.”

벽우진이 씨익 웃으며 박수를 쳤다.

이윽고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작은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당찬 얼굴로 들어오는 소년을 본 제갈현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빛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다가와서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석정후라고 합니다.”

고요했던 청성산이 한순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청성파의 도인들은 물론이고 빈객으로 머물러 있던 손님들조차 횡액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꺄아아악!”

“우아앙!”

차가운 병장기들은 여자나 아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살아있는 이들을 찌르고 베었다.

“이, 이놈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신음소리에 자다가 버선발로 뛰쳐나온 청성파의 장문인이 노성을 터트렸다.

맨발이지만 검은 챙겨 나온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살기를 줄기줄기 뿌려댔다.

청성파의 제자들이 썩은 짚단처럼 베어 넘겨지는 모습에 극도로 흥분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애검에서는 서릿발 같은 검기가 줄줄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제야 나왔나.”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느린데.”

“청성파가 예전 같지 않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군.”

살기등등하게 포효하던 장문인이 멈칫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다섯 명의 중년인에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던 것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안목은 있나 보군.”

“그래도 꼴에 장문인인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누구냐.”

어느 누구 하나 만만해 보이지 않는 다섯 명을 주시하며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짐작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마기를 못 느낄 리는 없을 테고.”

“뭘 받아주고 있어. 뻔히 시간 끌려고 하는 거구만.”

장문인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너무나 정확히 속내를 짚는 말에 순간적으로 반응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언제라도 싸울 수 있도록 공력을 끌어올렸다.

“시간을 끈다고 달라질 게 있나?”

“어차피 죄다 죽을 텐데.”

“내 말이.”

장문인이 움찔거렸다.

그의 속내를 정확히 짚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그러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때를 기다려야 했다.

‘목숨을 걸어야 세 명인가.’

반박귀진은 기본이라는 듯이 다섯 명이 풍기는 마기는 평이했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만 보기에 그럴 뿐이었다.

실제로는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기운을 숨기고 있었다.

꿀꺽!

장문인이 남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오늘이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꾸욱!

하지만 이내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제자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자신의 목숨만 건사할 생각은 없었다.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간다.’

툭.

격렬하게 흔들리던 동공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들고 있던 검집을 바닥에 던졌다.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뜻이었다.

“어라? 저 녀석 끝까지 싸울 생각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도 일파의 수장인데.”

“기본은 되어 있네. 난 당연히 도망칠 줄 알았는데.”

“나도.”

중년인들이 히죽 거렸다.

필사의 각오를 다지는 장문인을 앞에 두고도 여유를 부렸던 것이다.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청성산에서 말이다.

‘다섯 명을 여기에 잡아두는 것만으로도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중년인들의 비아냥거림에도 장문인은 반응하지 않았다.

만만치 않은 다섯 명이 날뛰는 것보다는 여기에 붙잡아두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게다가 시간을 끌면 장로들이 도와주러 올 거라고 생각했다.

‘전대 장로님들도 계시니.’

역사와 전통을 가진 구대문파가 강한 건 단순히 무공 때문이 아니었다.

무공도 뛰어날뿐더러 고수 역시 구름처럼 많았다.

그렇기에 장문인은 아직 반전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북해빙궁, 오독문의 침공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청성파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으므로.

툭. 투둑.

그러나 그 생각은 반 각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산산조각 났다.

중년인들의 부하들로 보이는 마인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마치 물건 다루듯이 무언가를 바닥에 내던졌다.

정확히 그를 향해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본 장문인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었다.

“어, 어떻게?”

땅바닥을 굴러오는 열댓 개는 바로 사람의 머리였다.

목이 잘린 수급이 그를 향해 굴러왔던 것이다.

“말했잖아.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말라고.”

“그런 말은 안 했던 거 같은데.”

“아, 그랬나? 나는 했던 거 같아서.”

수하들이 나타났음에도 시시덕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장문인은 그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사형제들은 물론이고 전대 장로들마저 죽은 모습에 그는 아까의 각오가 사라진 듯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선물이 또 있는 모양이야.”

투두둑.

새로이 나타난 마인들의 손에서 꾀죄죄한 몰골의 머리가 던져졌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떡 진 머리와 몇 십 년은 씻지 않은 듯한 모습은 어디 소속인지 대충 봐도 알 수 있었다.

“역시라고 해야 하나.”

“청해성의 일로 대비는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반응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데?”

“빠르기만 하면 뭐해. 소용이 없는데.”

개방도의 잘린 머리를 보며 중년인들이 조소를 흘렸다.

단순히 빠르기만 해서는 전황을 바꿀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모조리, 모조리 다 죽여 버리겠다!”

그때 포효성이 터져 나왔다.

사형제들의 죽음에 부들부들 떨던 장문인이 결국 폭발한 것이다.

그런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지닌 바 기량보다 더한 기도를 뿌려대는 모습에 중년인들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선천진기를 폭발시킨 모양이로군.”

“죽어서라도 복수하겠다는 건가?”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그런다고 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크아아아!”

청성파의 장문인이 짐승과도 같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과도한 진기 운용으로 머리는 산발로 변했고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변했다.

또한 살기 역시 도인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농밀했는데 그런 장문인을 마주하고도 중년인들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파바바밧!

왜냐하면 그들을 대신해서 싸울 이들이 있어서였다.

하나같이 병장기에 피를 잔뜩 묻힌 마인들이 사방팔방에서 솟구치며 장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실력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장문인이 죽음을 각오하고서 선천진기까지 폭발시켰음에도 크게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죽어! 죽어!”

밀리기는 해도 치명타는 어찌어찌 피해내는 마인들의 모습에 장문인이 더욱 격분했다.

시간이 한정적이기에 어서 빨리 다섯 명의 중년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서였다.

오히려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차륜전을 펼치는 마인들의 모습에 장문인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꺼지란 말이다!”

장문인이 일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죽이기보다는 밀어내서 공간을 만들 요량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예상했다는 듯이 마인들은 똘똘 뭉쳐서 호신강기를 일으켜 장문인의 참격을 막아냈다.

“쿨럭!”

물론 막대한 진기가 서린 일격이었기에 몇몇이 피를 토하기는 했으나 죽은 이는 몇 없었다.

장문인이 원한대로 뛰어넘을 공간 역시 만들어지지 않았고 말이다.

“젠장!”

오히려 큰 동작으로 인해 생긴 빈틈을 노리고서 공격하는 마인들의 모습에 장문인이 이를 악물었다.

무시하기에는 공격들이 너무나 절묘하고 날카로웠기에 장문인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일파의 장문인 치고는 수준이 너무 떨어지는데.”

“본래 실력이 지금 정도여야 하는 거 아닌가?”

“왜들 그래? 나름 선전하고 있구만. 육대마가 중 다섯 곳이 모였는데 저 정도면 나름 선방하는 거지.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데. 다만 많이 데리고 가느냐, 조금 데리고 가느냐의 차이일 뿐.”

귀림마가(鬼林魔家)의 주인이 팔짱을 낀 채로 악전고투하는 청성파의 장문인을 쳐다봤다.

분전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너무 나빴다.

혼자서 다섯 가문의 정예를 감당하기에는 실력이 너무나 부족해서였다.

“지금쯤이면 진명마가도 슬슬 도착했을 것 같은데.”

“첫째 아들이 죽어서 눈이 돌아갔으니 진즉 도착했을 것 같은데.”

다른 중년인들보다 머리 두 개는 족히 더 큰 야수마가주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사적인 복수를 위해 진명마가가 따로 움직였지만 여기 있는 가주들 중 누구도 그 부분에 대해서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명분이야 차고 넘치기도 했고, 진명마가가 합류하지 않아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진명마가와 곤륜파라. 누가 이길까?”

< 제 85장. 진명마가(眞明魔家).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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