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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272화 (272/325)

< 제 84장. 풍운무림. -04 >

“분명 호재이기는 한데, 저보다는 큰 형에게 더 호재이더라고요.”

“이 공자를 지지했던 이들이 일 공자에게로 넘어간 모양이군.”

“예. 이미 판이 기울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제가 있는데.”

석정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리 큰 형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역시 석가장주의 아들이었다.

엄연히 후계자 중 한 명인 것이다.

하지만 석가장 중역들이나 간부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아직 보여준 게 없으니까. 현실은 냉정히 봐야지.”

“전 이제 막 시작했는데요.”

“그래서 도망친 거야?”

“아뇨! 생각을 조금 달리 했을 뿐이에요.”

석정후가 크게 소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여전히 열정이 뜨겁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 그 눈빛처럼 말이다.

“생각을 달리 했다라.”

“아예 실속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이미 기반이 잡혀 있는 큰 형 쪽에게 가세해봤자 얻을 게 별로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모험을 하려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고요. 또 큰 형의 방식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고요.”

“내 말이. 그들을 포섭해야 할 네가 여기에 와 있는 게 난 이해가 안 간다고. 정신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이미 다 끝냈어요.”

벽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것이다.

“응?”

“다 끝냈어요.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던걸요.”

“네 성격상 포기했을 리는 없고. 모용세가의 아이와 연관이 있는 건가?”

“비슷해요.”

석정후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도망자나 배신자라고는 보기 힘든 얼굴로 말이다.

“궁금하구나.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석가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석가장을 가지고 싶지만 굳이 연연할 필요는 없다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손에 넣을 수 없다면 그때는 차라리 과감하게 포기하고 새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요.”

“호오.”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무슨 말인지 그는 단번에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역시 물건은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저에게는 본보기가 이렇게 앞에 있지 않습니까. 다 무너진 곤륜파를 홀로 일으켜 세우신 사부님이요. 사부님도 하셨는데 제자인 제가 못할 것은 없지요.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석가장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더 크게 키워서 큰 형의 석가장을 집어삼켜도 되고요.”

“야망은 진짜 크다니까.”

“자고로 사내대장부는 가슴에 한 개 정도의 야망은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비록 꿈을 향해 달려가다 고꾸라져도 말이지요.”

“그래서 모용휘를 데리고 왔군.”

“아무래도 비슷한 처지이니까요. 그래서인지 말이 잘 통하더라고요. 근데 취향이 좀 독특한 거 같아요.”

석정후가 미간을 좁혔다.

완벽한 동반자라고 생각했는데 아까 전의 모습을 보고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약간의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취향?”

“예. 보타문주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고요. 동경심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께름칙하다고나 할까요.”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오히려 남색에 빠져 있는 것보다는 낫지.”

“그건 그러네요.”

석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남색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였다.

동시에 벽우진이 새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는 거 아니다. 섣부른 판단이 큰 화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해.”

“각골명심하겠습니다!”

“넉살은. 근데 자신은 있는 거겠지? 포부만 그렇게 말해놓고 십 년 후에 쫄딱 망해서 찾아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럴 리가요. 단순히 포부만 밝히려고 사부님을 찾아뵌 것이 아닙니다. 진짜는 지금부터입니다.”

눈을 빛내며 석정후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눈짓하며 차를 마셨다.

“제가 비록 본가에서 나온 상태지만 그렇다고 위태위태한 상황은 아닙니다. 나름 확고하게 지지기반을 잡아 놓았거든요. 물론 큰 형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만 그래도 작은 형이 있을 때보다는 상당히 탄탄해진 상태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었으면 네가 아예 안 나왔겠지?”

“맞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사부님을 찾아온 것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기회?”

“예!”

석정후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대답했다.

하지만 설명이 부족한 듯 벽우진은 미간을 좁혔다.

“무슨 기회?”

“저의 능력과 가치를 높일 기회요. 자고로 위기의 뒷면에는 기회가 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정마전쟁?”

“예. 전쟁은 단순히 싸움만 하는 게 아니니까요. 전쟁에 많은 자금이 필요하단 말은 반대로 누군가는 돈을 번다는 뜻이지요.”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야 석정후가 왜 석가장을 나왔는지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벽우진은 사뭇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행동력이 대단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큰 건에 아무렇지 않게 달려들 줄은 몰랐다.

“네가 그만한 역량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확답은 못 드립니다만 자신은 있습니다. 이미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고요.”

“실패할 수도 있는데?”

“원래 큰 이득에는 큰 위험이 따르는 법이죠.”

“그러다가 패가망신한다. 그리고 상대가 잘못 되었어. 내가 아니라 제갈가주나 무림맹주를 찾아가야지.”

다부진 얼굴로 말하는 석정후를 향해 벽우진은 혀를 찼다.

당찬 포부는 좋지만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말에 석정후는 오히려 웃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물론 사부님이 무림맹주는 아니시죠. 그러나 제일 가까운 사람인 것은 맞습니다. 무림맹주가 안 되시더라도 아마 그 못지않게 영향력을 가지신 분이 사부님이실 겁니다.”

“나를 띄워줘도 너에게 남는 거 없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도, 필요한 것도 많습니다. 그런 만큼 총군사가 될 제갈가주도 고민이 많을 겁니다. 단순히 돈만 있다고 해서 전쟁을 치를 수는 없으니까요. 무릇 모든 일이 그렇듯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또한 신뢰관계가 확실해야 하죠.”

“그런 점에서 네가 제격이다?”

“예.”

석정후가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실력을 증명해야 했지만 그는 자신 있었다.

그에 따른 준비도 착착 하고 있었고.

“네 사부로서가 아니라 제 3자로서 보자면 못 미더운 게 사실이다. 넌 나이도 어릴뿐더러 아직 네 능력을 증명해 보인 적이 없지. 그저 출사표만 내밀었을 뿐. 그건 너 스스로도 알고 있을 거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못 할 거라고 단정 지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아직 제대로 시작을 못했을 뿐이지 실패한 게 아니니까요.”

“네 말도 맞다. 하지만 그건 네 생각이지 다른 이들의 생각은 아니라는 점이지. 우선 그것부터 나는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사부이지만 난 곤륜파의 장문인이다. 단순히 제자이기 때문에 도와주는 건 힘들어.”

벽우진이 선을 딱 그었다.

아무리 석정후가 제자라지만 이 일은 덩어리가 너무 컸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신중하게 생각했다.

덩어리가 큰 만큼 뒷말이 나올 수도 있어서였다.

“사부님께 조르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제가 염치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럴 만한 준비를 했고, 역량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준비를 했다라.”

“세인들의 시선과 평가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보다는 큰 형을 더 신용한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수년 동안 실적을 쌓아왔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장사꾼은 기본적으로 이문을 남겨야 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무림맹 입장에서 나쁘지 않은 패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품질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저렴한 쪽으로 마음에 가는 게 사람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에게는 사부님과 곤륜파라는 믿을 수 있는 배경도 있고요.”

“그건 석민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벽우진이 묘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배경으로 따지자면 석민후 역시 나쁘다고 보기 힘들어서였다.

그런데 석정후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큰 형의 처가가 공손세가입니다. 예전에는 그것만으로도 무림에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충분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죠. 곤륜파와 비교하면 공손세가는 많이 떨어지지요. 남궁세가나 사천당가라면 모를까요.”

“너무 으스대는 것 같은데?”

“배경도 능력이라고 제 앞에서 으스대던 사람이 큰 형이었습니다. 제가 사부님의 제자가 되자 그런 말은 쏙 들어갔지만요.”

“녀석.”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듯이 말하는 석정후의 모습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자신의 제자 아니랄까봐 하는 행동도 비슷해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제갈가주를 만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석가장의 핏줄 아니랄까봐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거든요.”

“아직 못 만났을 거다.”

“뭔가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석정후가 눈을 빛냈다.

확신하듯 말하는 걸 보니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해서였다.

“여기로 오고 있거든. 만나고 싶어도 당장은 만나기 힘들 거야.”

“아!”

석정후의 얼굴이 재미있게 변했다.

통쾌하다는 듯이 히죽 웃었던 것이다.

“그러니 설득은 직접 해봐. 난 자리만 만들어 줄 테니.”

“감사합니다, 사부님!”

“고마우면 수련에 좀 더 집중해. 그래도 명색이 내가 사부인데 못난 모습을 보여선 안 되지 않겠어?”

“더 노력하겠습니다!”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모습으로 석정후가 대답했다.

장사꾼으로서 일가를 이루는 것도 좋지만 건강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게다가 체력이 좋아서 나쁠 것은 없기에 그는 요즘 들어 수련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수련에 재미를 들렸다고나 할까.

“천년마교에서 날 노린 건 알고 있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건 좋지만 조심해야 한다. 결국 네 목숨을 지켜주는 건 네 실력이야.”

“그래서 더 열심히 수련하고 있습니다. 굳이 천년마교가 아니더라도 저를 노리는 사람은 많아서요.”

“끝까지 이겨내야 하느리라.”

“물론이죠. 사부님의 제자인데요.”

석정후가 벽우진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사부에 그 제자라는 듯이 말이다.

“싫어.”

먼 길을 달려온 제갈현을 마주한 벽우진이 단칼에 거절했다.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제갈현의 표정은 담담했다.

“역시 그런가요.”

“제갈가주라면 충분히 예상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절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뚜껑은 까봐야 한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이왕이면 확실하게 대답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럼 서신을 보내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와?”

벽우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무림맹의 일로 정신없이 바쁘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겸사겸사 장문인도 뵐 겸 해서요. 마교주의 셋째 제자가 장문인을 노리지 않았습니까.”

“노리기는 무슨. 잔꾀 부리다가 나한테 걸린 거지.”

“조금 의외이기는 했습니다. 장문인께서 직접 움직이실 줄은 몰랐거든요.”

“그 정도 사이는 돼.”

정파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곳이 하오문이었지만 벽우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전혀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제갈현 역시 불편해하지 않았다.

곤륜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였다.

< 제 84장. 풍운무림.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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