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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271화 (271/325)

< 제 84장. 풍운무림. -03 >

수행원으로 데려온 곽춘이 호들갑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자기 딴에는 진심을 담아 말했는데 석정후가 너무 곡해해서 듣는 것 같아서였다.

“섭섭합니다요, 공자님.”

“섭섭은 무슨.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내가 빈말을 하지는 않았나.”

“어후.”

“뭐야? 지금 내 앞에서 한숨 쉰 거야? 나 나이 어리다고 무시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아시잖습니까.”

곽춘이 울상을 지었다.

그러면서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백륜을 쳐다봤다.

하지만 백륜은 호위무사이지 석정후의 윗사람이 아니었다.

“아니긴. 내가 지금까지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그, 그때는요···.”

곽춘이 눈치를 살폈다.

아니라고 잡아떼기에는 증거와 증인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곽춘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올라가자. 점심은 집에서 먹어야지.”

“아, 넵!”

대화가 길어질 기미를 보이자 도일수가 끼어들어 정리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식사 시간을 놓칠 것 같아서였다.

“곤륜산은 진짜 멋진 것 같습니다.”

“모용 소협도 곤륜산은 처음이시죠?”

“예. 근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원오악을 전부 다 보지는 못했지만 곤륜산은 곤륜산만의 특별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벽 장문인 같은 분도 배출한 것이겠죠?”

“어, 사부님은 굳이 곤륜산의 정기가 아니더라도 특별하셨을 겁니다. 하하하.”

초롱초롱한 모용휘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도일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벽우진이라면 굳이 곤륜산이 아니었어도 특출났을 것 같아서였다.

“이번에는 저도 가르침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부상도 다 나았으니까요.”

“제가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모용휘가 도일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 그래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걸 도일수가 덜어주어서였다.

“하하. 말을 꺼내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사형에게만 쉬운 거예요. 저만 하더라도 눈치 많이 보는 걸요.”

“그건 네 스스로가 눈치를 보려고 해서 그래. 의외로 사부님은 격식 차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셔. 만약 사문이 건재했으면 장문인 자리에 절대 안 앉으셨을 걸. 장로 자리도 억지로 앉으셨을 거야.”

“그런가요?”

석정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짧은 시간 밖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격의 없이 지내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아서였다.

“구파일방의 다른 장문인들을 생각해 봐.”

“아.”

“차이가 있지?”

“정말 그러네요.”

딱딱한 분위기의 소림사와 무당파를 생각하자 곤륜파의 분위기가 상당히 유연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의는 차리지만 격식에는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저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는데.”

“에이. 그건 아니다.”

“공자님에게 제자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느꼈지요.”

“그때는 나도 깜짝 놀랐지. 그런 제안을 받을 줄은 몰랐으니까.”

비탈길을 오르며 석정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도박에 가까운 모험인 걸 알면서도 석정후는 벽우진을 찾아갔다.

그것 말고는 타개책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한데 그 선택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저도요. 순간 그럴 리 없겠지만 장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사칭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어요. 공자님을 꼬드겨서 돈을 탈취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사실. 나도 그랬어. 아마 사저를 보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게 컸죠.”

백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벽우진이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면 찾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서예지는 아니었다.

“뭐,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했지만.”

“맞아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잘 풀렸잖아요.”

“그야말로 황금 동아줄이었지. 에헴!”

석정후가 콧대를 세웠다.

그때의 선택 이후로 정말 승승장구하고 있어서였겠다.

계속해서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랄까.

“흉흉한 강호정세와 달리 곤륜파를 찾는 사람들이 많네요.”

“그만큼 사부님을 믿는다는 뜻 아니겠어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조금은 걱정 어린 눈으로 곤륜파의 산문을 오고가는 일반 양민들을 쳐다보던 모용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패선이라면 믿음이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어? 저 분 검후 아니에요?”

“맞는 거 같은데?”

“응?”

검후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히 모용휘의 눈빛이 가장 강렬했다.

그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외출 나갔다가 오신 모양이에요.”

“그런 것 같네. 근데 옆에 서 사저도 계신 것 같은데.”

도일수가 미간을 좁혔다.

거리도 거리지만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였다.

“두 분 사이가 별로라는 말이 있던데.”

“나도 들었어.”

“근데 헛소문인 모양이네요. 저렇게 나란히 걷고 계신 걸 보면.”

꿀꺽!

도일수와 대화하던 석정후가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너무나 크게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와서였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확인하던 석정후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뜻밖의 결과에 살짝 놀란 것이었다.

‘사저가 아니라 보타문주를?’

석정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젊어 보인다지만 검후의 나이는 불혹이 넘었다.

나이 차이만 거의 스무 살 가까이 났다.

그래서 석정후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모용 소협?”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요. 그런데 보타문주님께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저희 사저가 함께 있는데도 보타문주님만 쳐다보시는 걸 보면요.”

“아, 예. 아무래도 태성전 우승자이시지 않습니까. 자랑하는 것 같지만 저는 용봉전 우승자고요.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게 되네요. 하하핫!”

나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핑계도 궁색하기 그지없었고.

하지만 다들 좋게 넘어갔다.

개인의 취향은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사저!”

“응?”

모두가 알면서 모른 척 하고 넘어갈 때 도일수가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그러자 나긋나긋하게 걸어가던 서예지가 몸을 돌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사저.”

“도 사제?”

서예지의 동공이 서서히 확대되었다.

생각지도 도일수의 등장에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놀란 기색은 잠시뿐이었고 그녀는 이내 얼굴 가득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잘 지내셨죠?”

“정후는 어떡하고 온 거야?”

“짜잔! 저도 왔습니다!”

도일수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석정후가 장난치듯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서예지가 실소를 흘렸다.

“이렇게 와도 돼?”

“예. 본가에서 할 일은 다 했거든요. 사실대로 말하면 할 수 있는 일만 다 했다고나 할까요.”

“일단은 와 있어도 된다는 뜻이지?”

“네. 한 번은 꼭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곤륜산은 이제 저의 두 번째 고향이니까요. 어쩌면 진짜 고향이 될 수도 있고요.”

“말은.”

서예지가 약하게 꿀밤을 먹였다.

누가 장사꾼 아니랄까봐 말은 청산유수였다.

“헤헤헤!”

“올라가자. 사부님께 인사 드려야지.”

“넵!”

대답과 함께 석정후는 현주혜에게도 인사했다.

안면이 있기에 어색한 것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곽춘과 모용휘였다.

둘 다 검후라 불리는 현주혜와의 대면은 처음이었기에 상당히 굳은 모습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여, 영광입니다.”

“······?”

특히 모용휘는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현주혜에게 포권했다.

누가 봐도 사심이 가득 든 모습으로 말이다.

그런 모용휘의 모습에 현주혜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천하무림 비무대회 때 정말 감명 깊게 봤습니다. 모든 대결을요.”

“아, 응.”

열변을 토하듯 빠르게 말하는 모용휘의 모습에 현주혜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를 서예지가 구해주었다.

“일단 올라가죠. 여기서 이러는 것도 민폐니까요.”

“아, 죄송합니다!”

“모용 소협은 네 손님이야?”

“네. 곤륜산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해서요.”

석정후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빠르게 서예지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나 불편해하지는 않나 저어되어서였다.

“견문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

다행히 서예지는 모용휘의 합류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지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석정후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주제넘은 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너에게나 중요한 사람이지 우리에게는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새삼 제 사문이 대단하단 걸 느끼네요.”

“대단하지. 당대의 천하제일인이 웅크리고 있는 곳인데. 물론 민심 역시 탄탄하고.”

“그건 저도 느꼈어요. 변방이나 마찬가지인데 이상하게 다른 성들보다 더 안정적인 느낌이랄까요.”

석정후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중원보다는 세외에 더 가까운 곳인데 이상하게 치안이 더 안정적인 것 같아서였다.

“사부님이 계시니까. 어느 누가 설치겠어? 사부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하긴. 그렇죠. 산적이고 수적이고 그냥 다 때려잡으시니까요.”

명예와 권력, 힘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걸 이용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벽우진은 악의 무리들이 날뛰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때문에 청해성은 현재 그 어떤 곳보다 안전하고 조용한 지역이었다.

“살짝 과장된 것도 있지만 말이지.”

“그건 알려지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녀석. 들어가자.”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옥청궁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그래서 도일수는 옷매무새를 한 번 더 신경 쓰고는 옥청궁 안으로 들어갔다.

석정후와 단 둘이 남게 된 벽우진이 차를 마시며 혀를 찼다.

들어오자마자 대뜸 큰절부터 하던 모습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큰절이 뭐야, 큰절이.”

“헤헤!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것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인사는 큰절이죠.”

“다른 사람들 놀란 건 안 보이지?”

“슬쩍 둘러봤는데 크게 놀란 사람은 없던데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석정후의 모습에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언뜻 서진후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서진후 역시 어렸을 적에는 저렇게 당돌했었다.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았었다.

“언젠가 말로 크게 다칠 일이 있을 게다.”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근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석가장을 집어삼키겠다며 호기롭게 갈 땐 언제고. 더구나 둘째가 죽어서 기회이지 않나?”

거리가 상당했지만 석가장에 관한 보고는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도일수와 비청단을 통해서 말이다.

“작은 형의 죽음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긴 했죠.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만천무제의 무덤에 직접 들어갈 줄은 몰랐어요.”

“석가장 측에서는 아예 포기했다고 하던데.”

“살아 있을 확률이 극히 적은 게 사실이니까요. 다른 곳에서 다 나섰지만 발견한 건 시체뿐이기도 하고요.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살아 있다면 진즉 빠져 나왔겠죠. 어떤 방식으로든지요. 그런데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죽었다는 거죠. 장례식도 이미 치렀고요.”

“석가장에는 안 좋은 일이지만 너에게는 호재이기도 하지. 근데 그 중요한 시점에서 네가 왔단 말이지.”

벽우진이 묘한 눈빛으로 석정후를 쳐다봤다.

누가 봐도 그에게 좋은 상황인데 석가장을 떠나온 게 의아해서였다.

그렇다고 쫓겨난 얼굴은 또 아니었다.

< 제 84장. 풍운무림.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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