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4장. 풍운무림. -02 >
“맞아요. 뛰어난 검법서가 있지만 그에 맞는 내공심법이 없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요. 물론 상승무리가 담겨 있는 무공서이기에 활용가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참고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으니까요.”
정보력으로는 개방과 함께 중원 제일을 다투는 곳이 바로 하오문이었다.
그런 하오문에 상승무공서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지금까지 축적해온 세월이 얼마인데.
다만 검법이든 권법이든 그 정수를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짝이 되는 내공심법이 필수였다.
그런데 그게 하오문에는 부족했다.
짝이 맞는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알아볼 만한 안목이 있는 이도 드물었고.
“그래서 주는 거야. 지금 하오문에 가장 필요한 게 이거라고 생각해서. 또한 남자여자 모두가 극성으로 익힐 수 있도록 손을 봤으니 무리 없이 연공할 수 있을 거야.”
“장문인···.”
세심한 배려에 설아린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다짜고짜 도와달라고 매달렸을 때 아무것도 재지 않고 달려가 준 것만 해도 설아린은 사실 너무나 감동했었다.
평소에는 뭐든지 다해줄 것만 같던 이가 정작 중요할 때는 망설이고 말을 돌리는 경우를 그녀는 수없이 봤었다.
하지만 벽우진은 달랐다.
‘그런데 이런 선물까지···.’
곤륜파라는 명문대파의 장문인임에도 벽우진은 설향의 장례식까지 친히 왔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조용히 왔다 갔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오문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기도 하고.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뿐이니까.”
“돌려받는 게 너무 과한 것 같아요.”
“과하지 않아, 내 기준에는. 그리고 어차피 그 무공들 가지고 있어 봐야 무공서고 구석에 처박혀 있을 뿐이다. 그럴 바에는 필요한 사람이 익히는 게 낫지. 내 것도 아닌데.”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설아린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다시 한 번 절을 했다.
이렇게라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번 역시 그녀는 얼마 안가 몸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말했잖아. 먼저 손을 놓지 않는 한 나 역시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흑!”
지금까지 의젓하게 앉아 있던 설아린이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울면서도 그녀는 웃었다.
벽우진의 한 마디가 너무나 든든해서.
또한 어째서 설향이 그토록 벽우진과 곤륜파에 신경 썼는지도 깨달았다.
‘사부님은 아셨던 거야. 장문인이 이런 분이시라는 걸. 그래서 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죽음을 선택하신 거지.’
설향과 양선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리며 설아린은 중얼거렸다.
이제야 완벽하게 그 표정들이 이해되어서였다.
“일단은 내부부터 수습해. 전대 문주의 죽음으로 알게 모르게 시끄러울 것 같은데.”
“무룡대가 있어서 괜찮아요. 적어도 무력에서는 밀리지 않으니까요.”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고.”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설아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의 눈은 단호했다.
“이 정도쯤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아니, 해내야 해요.”
“그렇다면야.”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벽우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굴과 기세를 보아하니 잘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하는 게 가장 좋기도 했고.
또르륵.
벽우진은 차호를 들어 반쯤 비어 있는 설아린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나름 응원한다는 의미였다.
그걸 설아린도 알아차렸는지 옅게 웃으며 두 손으로 공손히 차를 받았다.
육반수에서 돌아온 제갈현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보냈다.
암약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천년마교가 드디어 손톱을 드러냈기에 중원무림, 정확하게는 정파 역시 준비를 해야 했다.
머지않을 정마대전(正魔大戰)을 대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의견수렴이 안 되어서야···.”
집무실에 앉아있던 제갈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마대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또한 무림맹을 결성해야 한다는 데에도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자기만 피해 입기는 싫다는 거겠지. 그게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물은 흐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제갈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 역시 제갈세가라는 가문을 이끄는 사람이기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입씨름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대는 최강, 최악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년마교였다.
그것도 단일 세력으로는 적수를 찾아볼 수가 없는.
게다가 천년마교가 무서운 점은 교주가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 명에게 집중된 권력. 거기에 막강한 전력까지. 천년마교를 막으려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건만.”
제갈현의 한숨이 깊어졌다.
말하는 걸 보면 진짜 못나다 못해 한심해서였다.
지금은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을지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막아낼 방도를 찾고 대비해야 할 때인데 누구 하나 그걸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지레 겁부터 먹었다는 것이지.”
제갈현이 두 눈을 감았다.
사실 육반수의 참변을 봤을 때 그는 내심 기대했었다.
악독하기 짝이 없는 천년마교의 음모에 중원무림이 울분을 터트리며 들고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정 반대였다.
‘아직까지도 눈치 보기 바쁘니.’
육반수의 참변 이후 흉흉한 소문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운 좋게 만천무제의 무공비급 진품을 입수한 이들이 연공 중에 주화입마에 빠졌다느니, 반신불구가 되었다느니 하는 소문들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청해성에서도 활동한 흔적이 드러났지.”
자세한 사정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천년마교에서 제법 거물급 인사가 청해성에서 무슨 일을 도모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일에 벽우진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사실 청해성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
규모는 작았지만 대신 곤륜파에는 벽우진이 있었다.
또한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대단한 고수들이 여럿 웅크리고 있는 게 곤륜파였다.
그렇기에 제갈현은 청해성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길목인 사천성 역시 과거의 성세를 회복한 사천당가와 전통의 강호, 청성파와 아미파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딱히 걱정할 게 없었다.
“문제는 전쟁이지.”
길목에 무시못할 전력을 갖춘 네 곳이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저지선이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다면 그건 큰 의미가 없었다.
그 사실을 육반수의 일로 증명하기도 했고.
때문에 제갈현은 하루라도 빨리 무림맹을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결과는 지지부진 했다.
“하아. 조직이라는 게 말로 한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닌데 말이지.”
정마대전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모두가 알았다.
그런데 그 놈의 권력다툼과 이권 때문에 좀처럼 의견이 조율되지 않았다.
“이런 식이라면 쓸데없이 시간만 흐를 뿐이야. 그렇다면 누구 하나가 나서서 강하게 주도를 해야 하는데···.”
제갈현이 중얼거렸다.
똑똑한 그는 자신의 위치를 아주 잘 알았다.
무림맹을 결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어디까지나 보조자였지 주인공은 아니었다.
‘그럴 마음도 없고.’
제갈현은 옅게 웃으며 무림맹주로 추대할 사람을 생각했다.
그러자 세 명의 후보군으로 압축됐다.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는 그가 생각하기에 딱 세 명 밖에 없는 것 같아서였다.
“다만 문제는 누구도 무림맹주라는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가.”
하필이면 세 명 다 도문(道門)의 수장들이었다.
물론 후보군을 좀 더 넓히면 다섯 명까지 가능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나머지 두 명은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대의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무위로나 배분으로나 앞서 고려했던 세 명에 비교해서 확연히 떨어지기도 했고.
“흐음.”
제갈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다섯 명까지 늘릴 필요 없이 세 명의 후보군에서 무림맹주를 추대하는 게 여러 모로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문제는 과연 무림맹주라는 자리를 받아들일 것이냐는 건데···.”
제갈현이 말끝을 흐렸다.
다른 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지하고 싶어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세 사람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오히려 귀찮은 자리를 떠맡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역정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
가장 먼저 떠올랐던 한 명을 떠올리며 제갈현이 피식 웃었다.
말을 꺼내기 무섭게 노성부터 토해낼 게 자명해서였다.
남들은 앉고 싶어 난리인 자리였지만 그는 오히려 콧방귀를 낄 게 분명했다.
“분명 귀찮다며 새끼손가락으로 귀만 파겠지.”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연상되는 모습에 제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뭐래도 현 강호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 바로 그였지만 정작 그는 세상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명예도 딱히 바라지 않았고 말이다.
“그래도 일단은 가봐야겠지. 설득의 여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안 되도 차선책도 있고.”
제갈현은 두 번째와 세 번째 후보를 떠올렸다.
첫 번째 후보보다는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두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쉬운 상대는 또 아니었지만.
그래도 책임감이라는 부분에서는 첫 번째 후보보다 두 사람이 월등히 앞서 있었다.
“일단은 욕먹을 각오로 가야겠지.”
제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마음먹은 순간 움직일 생각이었다.
거리가 제법 멀기는 하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또 못 다녀올 거리는 아니었다.
“겸사겸사 그쪽 분위기도 살필 겸. 아무래도 가장 가능성 높은 지역이 바로 그곳이니까.”
집무실을 나서기 무섭게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수행원이 은밀히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정세가 정세이다 보니 제갈현도 혼자 움직이는 걸 고집하지 않았다.
혼자서도 제 한 몸 건사할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상대가 천년마교라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사마세가도 멸문한 상황에서 그마저 제거된다면 중원무림은 가뜩이나 힘겨운 싸움을 더욱 힘들게 치러야 했다.
‘두렵지는 않지만 가장 귀찮은 존재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일 테니까.’
어깨를 으쓱거리며 중얼거린 제갈현이 단숨에 장원을 나섰다.
망설이지 않고 서북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탁 트인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산들이 줄줄이 이어진 모습에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눈을 빛냈다.
여기까지 오면서 수많은 산들을 봐왔지만 곤륜산은 다른 산들과 다른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보는 순간 범상치 않은 영험함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장관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곤륜산의 모습에 다섯 명은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가 바로 저의 두 번째 고향인 곤륜산이로군요.”
“처음 온 주제에 두 번째 고향은 무슨.”
“사부님의 제자가 된 순간부터 제 두 번째 고향이 되었습니다. 근데 처음인데도 이상하게 포근한 느낌이 들어요. 제가 곤륜파의 무공을 익혀서 그런 것이겠죠?”
“그런 점도 없잖아 있겠지?”
도일수가 옅게 웃으며 석정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법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서 그런지 둘 다 서로를 상당히 편하게 대했다.
“저도 곤륜산은 처음인데, 멋지네요. 중원오악을 다 가봤는데 곤륜산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습니다.”
“빈말인 게 너무 티가 나는데?”
“아이고, 공자님. 제 눈과 목소리에 담긴 진심이 보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응.”
< 제 84장. 풍운무림.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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