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4장. 풍운무림. -01 >
“농간을 부려놨지?”
“예. 중반부까지는 제대로 된 무공구결이지만 후반부에 장난질을 해놓은 모양입니다. 안심하게 만든 후 결정적인 순간에 주화입마에 빠지게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현재 피해자만 백 명 가까이 된답니다.”
“흠.”
벽우진이 침음을 흘렸다.
매몰당한 인원에 비하면 별 거 아닌 숫자일 수도 있지만 백 명도 결코 적은 건 아니었다.
또한 그 백 명은 나름 안전지역까지 무공비급을 가져갈 정도의 실력자라는 걸 뜻하기도 하기에 피해는 단순히 숫자로만 판단할 수 없었다.
“제가 보기에는 자업자득이지만요. 다 자신이 익힌 무공에 믿음이 없기에 만천무제의 무덤을 들락거린 것 아니겠습니까.”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 거기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고.”
“제갈가주가 걱정이 많은 모양입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제일 바쁜 사람 아냐. 아마 하루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질 걸.”
“어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서진후가 몸을 떨었다.
대머리는 나이를 막론하고 싫어서였다.
고수가 될 수 있다고 해도 대머리가 되는 건 피하고 싶은 게 속마음이었다.
“너도 조심해.”
“···안 그래도 검은 콩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런지 예전보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는 것 같아서요.”
“혼자 다 끌어안지 말고 좀 나눠. 그러려고 일곱 명이나 뽑은 거 아냐?”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못 미더워서요.”
“네가 있어야지만 비청단이 굴러간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야. 너 없어도 어찌어찌 굴러는 간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로 벽우진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가 보기에는 책임감이 너무 과한 것 같아서였다.
물론 규모를 더 키워야 하는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역량 이상을 할 필요는 없었다.
“너무 잔인한 말씀인데요.”
“사실이기도 하지. 그리고 나 없어도 곤륜파는 굴러가잖아?”
“사형이 계시기에 별 탈 없이 굴러가는 것입니다.”
서진후가 진지한 얼굴로 정정했다.
현재 곤륜파의 위상은 벽우진이 존재하기에 가능했다.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이 있기에 다시 구대문파에 복귀한 것이고 말이다.
만약 벽우진이 없다면 곤륜파는 몰락했을 때로 돌아갈 터였다.
“내가 없어도 이제는 괜찮지. 대호법님도 계시고 너랑 청민도 있는데.”
“그래도 사형이 계셔주셔야 합니다.”
곤륜파의 적통을 이은 건 벽우진이었다.
또한 곤륜파의 모든 무공을 익히고 알고 있는 것 또한 벽우진이었고.
그런 만큼 현재 곤륜파에 있어서 벽우진은 대체할 수 없는 무인이었다.
“알았으니까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지 마. 무슨 농담을 못하겠네.”
“저도 한 이틀 정도는 쉬겠습니다. 이참에 제자들 역량도 파악할 겸.”
“좋은 생각이야. 그럼 난 삼 일 정도···.”
“사형은 안 되시죠. 할 일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당장 결재할 것만 해도 산더미입니다.”
“대체 왜 일이 줄어들지 않는 거야!”
벽우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매일 같이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봐야 할 서류는 줄지를 않아서였다.
오히려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늘어나는 광경에 벽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흥분했다.
“아무래도 현재 강호가 시끄럽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하는 거 아냐?”
“장문인으로서 꼭 해야 하는 업무입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일거리가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하아.”
차라리 무료하던 시절이 나았다고 생각하며 벽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래도 육체적으로는 건강하시지 않습니까.”
“대신 내 정신건강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머리카락이 빠질 지경이라고.”
“숱이 엄청 많으신데요.”
“악착같이 잡고 있는 거야. 내 금 같은 공력을 이용해서.”
서진후가 순간 눈을 빛냈다.
마치 그런 방법이 있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정말 가능합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흐으음.”
벽우진의 대답에도 서진후는 혼자만의 상념에 빠졌다.
완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공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게 더 많았기에 충분히 연구해 볼만 했다.
똑똑똑.
“사부님. 예지입니다.”
“어, 들어 와.”
의자의 손잡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로 벽우진이 대답했다.
이윽고 깔끔하게 도복을 차려 입은 서예지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오문주가 도착했습니다.”
“어디 있는데?”
“지금 막 산문을 지났다고 합니다.”
“여기로 바로 데려와.”
“예.”
번거로울 수도 있는 일이지만 서예지는 군말 없이 대답했다.
설아린과 아는 사이이기도 했지만 설향과 양선의 죽음에 대해서 그녀도 들어서였다.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서예지는 조용히 지시에 따랐다.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이틀 동안 푹 쉬고 와. 아니면 본가에 다녀오던지.”
“가도 편히 못 쉽니다. 강호가 난리이지 않습니까.”
“집보다 여기가 더 좋다는 거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어째 집에 가는 걸 귀찮아하는 것 같아서였다.
“사형들도 있고, 예지도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제가 해야 할 일도 있고요. 본가에 가면 이상하게 뒷방 늙은이가 된 것 같아서 말이지요.”
“너 편한대로 해. 곤륜산은 넓으니.”
“알겠습니다.”
서진후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집무실을 나섰다.
또르륵.
서예지의 안내에 따라 집무실에 도착한 설아린은 정중히 인사한 후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벽우진은 오랜만에 손수 차를 따라주었다.
평소에는 허공섭물로 모든 걸 다했지만 오늘은 특별히 손을 사용했다.
“문주가 되었으니 그에 맞게 존중해 줘야겠지?”
“아니에요. 하시던 대로 해주세요. 그게 더 편해요.”
“그래?”
“네.”
설아린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새삼 벽우진이 다른 수장들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별 거 아닌 거지만 그게 상대방에게는 상당히 크게 다가왔다.
‘문주님도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거겠지.’
설향에게는 분명히 선택지가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끝내 설향은 죽음을 택했다.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벽우진의 이런 면모 때문일 거라고 설아린은 생각했다.
“장례식은 잘 치렀나?”
“예.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당연히 가야하는 게 맞는 것을.”
“그리고 늦었지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난데없이 찾아왔음에도 한달음에 달려가 주신 점 평생 잊지 않을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설아린이 절을 하듯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나 그녀는 두 손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몸을 일으켜야 했다.
벽우진이 무형지기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그 일에 대해서는 고마워할 것 없어. 당연히 그랬어야 하는 일이니까. 오히려 내가 고맙지. 그 상황에서 의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물론 고맙다는 말을 전할 사람은 이제 없지만.”
마지막 말에 설아린이 몸을 들썩였다.
죽은 설향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눈물을 참아냈다.
여기까지 와서 또 울 수는 없어서였다.
“장문인께서 와주셔서 사부님도 기쁘셨을 거예요.”
“그랬다면 좋겠군.”
고개를 주억거린 벽우진이 찻잔을 들었다.
무거워진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해서였다.
설아린 역시 그것을 느낀 듯 촉촉해진 눈으로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청해성을 중심으로 이상 징후들을 조사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어요.”
“잠시 숨을 돌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 일단 교주의 세 번째 제자가 죽었으니까.”
“저는 그래서 더더욱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조용해요.”
“때가 되지 않았는데 그 놈이 먼저 설친 것일 수도 있고.”
벽우진은 설아린의 손에 죽은 청년을 떠올렸다.
생긴 것대로 논다는 말처럼 마지막까지 교활했던 녀석은 끝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노력했다.
물론 그 끝은 결국 죽음이었지만.
“분명한 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반응이라는 점이에요.”
“다른 곳으로 침공할 수도 있어. 지금까지 청해성을 통해서 중원을 공격했다고 이번에도 꼭 그러라는 법은 없지.”
“맞아요.”
소문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설아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예전과 달리 설아린에게는 위엄과 무게가 있었다.
그렇다고 거만한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가장 가깝고 편한 길이 청해성일 뿐이지 다른 길이 없는 것은 아냐.”
“그래서 청해성을 중심으로 다른 곳까지 점차 넓히고 있어요. 아직 사부님의 복수는 끝난 게 아니니까요.”
마교주의 셋째 제자를 죽였지만 설아린은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은 셋째 제자는 시작일 뿐이었다.
그리고 설향과 양선이 죽은 이상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복수에 너무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건 장문인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서 하는 말이야. 또한 전대문주 역시 그걸 바라지 않을 테고.”
“···전면에 나설 생각은 없어요. 그 정도 전력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대신 저희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수할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벽우진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복수에 눈이 돌아가지는 않은 것 같아서였다.
아직 어린 만큼 그 부분이 염려되었는데 다행히 머리는 차가운 상태인 듯싶었다.
스윽.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벽우진이 이내 책상 한쪽에 있던 책 세 권을 설아린에게 밀었다.
그러자 설아린이 얼굴 가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물이야. 나름의 보답이라고나 할까.”
“···보답이요?”
“응. 봐봐.”
벽우진이 눈짓했다.
그러나 설아린은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대신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까요?”
“당연히. 자격은 충분해. 받아야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할 것 같고.”
“그럼.”
어깨를 으쓱거리는 벽우진의 모습에 설아린이 조심스럽게 가장 위에 있는 책을 펼쳤다.
제목 하나 없는, 만든 지 얼마 안 된 티가 나는 책의 첫 장을 설아린은 천천히 넘겼다.
그리고는 이내 눈을 부릅떴다.
“나머지도 봐. 이왕 놀랄 거면 다 보고 놀라. 하나만 보고 놀라지 말고.”
설아린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거부하지 않겠다는 듯이 두 번째 책과 세 번째 책도 펼쳤다.
“저, 정말 받아도 될까요?”
“말했잖아. 나름의 보답이라고. 정공도 마공도 아니니 하오문이 익히기에는 충분할 거야. 대막 쪽에서 얻은 무공을 손 본 거라 그쪽에서 알아볼 수도 있는데 워낙에 많이 뜯어 고쳐서 알아봐도 긴가민가 하는 수준일 거야.”
“···너무 과분한 선물 같아요.”
지금까지 차분했던 설아린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무공서 세 권을 내려놓았다.
물론 속마음은 당장이라도 이 세 권의 무공서를 품에 넣고 싶었다.
간략하게 살펴봤지만 이 세 권은 하오문이 그토록 원하던 상승무학들이었다.
그것도 따로따로가 아닌 하나로 연결된 완벽한 무공서 말이다.
꿀꺽!
그녀는 물론이고 설향 역시 너무나 바라던 상승무학이었지만 그렇기에 부담이 되었다.
어중간한 것도 아니고 웬만한 대문파의 비전무학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기에 설아린은 선뜻 무공서를 받을 수 없었다.
“수준이 상당하긴 하지?”
“상당한 수준이 아니라, 엄청난데요.”
“그렇기에 더더욱 하오문에게 필요한 무공들이지. 나름 수집한 상승무공은 많겠지만 다 결점이 있을 거야. 안 그래?”
< 제 84장. 풍운무림.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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