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3장. 구해주세요. -04 >
막 몸을 돌리던 청년의 두 눈이 한 순간 커졌다.
마치 그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는 듯이 너무나 절묘한 순간 벽우진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보다 그의 발목이 날아가는 게 더 빨랐다.
우당탕!
소리도 없이 베어진 발목에 청년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그런 그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퍼퍼퍼펑!
하나 그 충격도 얼마가지 않았다.
벽우진에게 달려들었던 친위대 전부가 허공에서 폭사당하는 광경에 청년은 입만 쩍 벌렸다.
투둑. 투두둑.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듯한 표정의 머리와 육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광경에 청년은 고통도 잊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째서 벽우진이 패선이라 불리는지, 천하제일인에 가장 근접한 무인인지를 뼈져리게 느낄 수 있어서였다.
심지어 벽우진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였다.
‘무, 무형지기로 죄다 쓸어버렸다고?’
차라리 손이라도 뻗었다면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최소한 투지 정도는 생겼을 터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그저 눈빛과 무형지기만으로 친위대를 도륙하는 모습에 청년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보아 하니 날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모양인데, 왜 그냥 가려고 해? 말은 좀 섞어봐야 하지 않겠어?”
“나, 날 죽이면 사부님께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두 발목이 날아가 처량하게 주저앉은 상태인데도 청년은 큰소리를 쳤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천년마교의 교주이자 당대 마제(魔帝)의 세 번째 제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생각이 있는 자라면 결코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터였다.
‘더구나 곤륜파의 장문인이라면 더더욱!’
청년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았다.
비록 세 명의 제자 중 막내이지만 중요한 건 교주의 후계자 중 한 명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벽우진이라도 고문은 하되 죽이지는 못할 게 분명했다.
‘발목이 잘리기는 했지만, 깔끔하게 절단 된 것이니 다시 붙이면 된다.’
청년의 두뇌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했다.
잘려진 두 다리에 이를 갈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도를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뭐 어쩌라고? 살려달라고?”
저벅저벅.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벽우진이 다가왔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으로 그를 주시하며 걸어왔던 것이다.
그 모습에 청년인 갑자기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벽우진의 모습에서 누군가가 겹쳐 보였던 것이다.
“날 죽이면 교주님께서···.”
“널 안 죽인다고 해서 가만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애초에 가만있을 거였으면 육반수에서 장난질을 치지도 않았겠지. 천산에서 그냥 콕 박혀 살았을 거야.”
생긴 것 답지 않은 논리정연한 말에 청년은 말문이 막혔다.
뒤늦게 벽우진 입장에서는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인질로서 효용가치가 높은 존재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달라.”
“사, 사부님!”
벽우진이 이죽거릴 때 방 안으로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뒤늦게 도착한 설아린과 현주혜였다.
특히 설아린은 방 안에 들어오기 무섭게 설향과 양선을 발견하고는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렸다.
오는 내내 살아있길 바라고 쉴 새 없이 기도했건만 결국 맞아주는 건 싸늘하게 변한 시신뿐이자 설아린은 오열하며 주저앉았다.
“모두 죽은 건가요?”
“아직 여기 한 놈 살아 있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은 설아린을 놔두고서 현주혜가 다가왔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녀 역시 검 좀 휘둘렀는지 들고 있는 애검에는 핏방울이 올올히 맺혀 있었다.
“우두머리인 모양이군요.”
“마교주의 제자로군. 내가 보기에는 덜떨어진 놈으로 보이는데.”
“뭐라고!”
“거 봐. 아직도 제정신 못 차리고 있잖아.”
청년의 다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말하는 사이 무형지기로 무릎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이번에는 지혈도 하지 않았기에 절단된 부분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끄으!”
일부러 깔끔하게 베어내지 않은 걸 알아차린 청년이 황급히 혈도를 짚었다.
더 이상의 출혈을 막기 위해 지혈한 것이었다.
“쓸모는 무슨. 네놈 하나 죽었다고 해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 같은데.”
“죽일까요?”
“아직은 안 돼. 이 놈의 주인은 따로 있거든.”
현주혜의 싸늘한 시선이 청년에게 닿았다.
그녀 역시 설향과 양선의 시신을 봤기에 눈빛이 고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적이라도 저렇게 토막 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끄흑! 끅! 사부님···.”
청년을 현주혜에게 맡긴 벽우진이 설향과 양선의 시신을 끌어안고서 오열하는 설아린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는 벽우진의 기척을 느낄 여력도 없는지 주저앉아 울기만 했다.
“소문주.”
“크흐흐흑!”
나지막한 벽우진의 부름에도 설아린은 들리지 않는지 설향의 머리만 끌어안았다.
잘린 부위에서 흘러나온 피가 옷을 적시고 있음에도 설아린은 그걸 느끼지 못하는지 울면서 부둥켜안기만 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죽은 이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소문주. 복수는 해야지.”
부르르르!
설아린이 순간 움찔거렸다.
복수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이었다.
“저 놈은 소문주가 마무리 짓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이어지는 말에 설아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살기와 귀기가 뒤섞인 무시무시한 안광을 뿌려댔던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으나 벽우진은 이해했다.
가족이자 부모와도 같았던 이가 두 명이나 죽었다.
한데 어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스르르륵.
얼마나 정신없이 달려왔는지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설아린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시선은 오직 청년에게만 향해 있었다.
“설마 날 죽이려고? 교주님의 셋째 제자인 나를?”
“못 죽일 건 뭐야?”
“크큭! 하오문 따위가 감당할 수 있겠어? 네년 따위가 말이야.”
“감당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네놈은 죽일 수 있어.”
서슬 퍼런 안광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설아린이 청년에게 다가갔다.
마치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말이다.
그 서늘한 눈빛에 청년이 순간 압도당한 듯 몸을 떨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설아린의 모습에서 반드시 자신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였다.
“이, 이 자리에서 내가 죽은 게 알려지면 전쟁이다! 본교가 가장 먼저 곤륜파와 하오문을 노릴 것이다!”
청년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아닌 척 하고 있어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웃기는군. 고작 잔머리 굴린 게 그게 다냐? 그리 말하면 목숨은 부지할 거라 생각했나 보지?”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를 죽이면···. 컥!”
푸욱!
청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설아린의 손톱이 청년의 단전을 찔러서였다.
무인에게 있어 제 2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단전을 설아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파괴했다.
“정말 죽여도 되죠?”
“물론. 둘도 그걸 바랄 거다.”
“이, 이년이 무슨 짓을! 지금 네년이 무슨 짓을 한 줄 아느냐!”
청년이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단전이 파괴되자 눈이 돌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성에 설아린은 오히려 빙긋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너무나 섬뜩했다.
“무슨 짓이긴. 원수에게 복수하는 중이지. 아, 구구절절하게 부탁한 대로 목숨은 최대한 부지시켜 줄 거야. 네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오래. 어때? 좋지?”
부르르르!
설아린이 히죽 웃었다.
그러나 두 눈만큼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하게 빛나며 청년의 몸 곳곳을 찔렀다.
마치 다음에 찌를 곳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미, 미친년! 이러고도 네년이 무사할 것 같으냐!”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그리고 잘 모르는 모양인데 정보조작과 흔적지우기는 본문의 특기야.”
“본교가 못 알아낼 것 같으냐!”
“또 깜빡한 모양인데 청해성은 중원이야. 네놈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설아린이 히죽 웃으며 검지를 찔렀다.
지강을 일으켜 청년의 몸 곳곳에 구멍을 냈던 것이다.
“흐어어어!”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려놓겠다는 엄포대로 설아린은 고문과 동시에 지혈도 확실하게 했다.
복수 겸 화풀이를 제대로 했던 것이다.
“장문인.”
“저게 하오문의 방식, 아니. 무림의 방식이야. 혈채는 피로 값을 수밖에 없어. 돌고 도는 게 원한이라지만 적어도 마음은 편하니까.”
현주혜가 우려 섞인 눈빛을 보내왔지만 벽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정파도 아닌 정사중간의 위치에 있는 문파가 하오문이었다.
게다가 그 문파의 수장이 참혹하게 죽었다.
저 정도는 오히려 약과였다.
“알겠습니다.”
“앞으로의 전쟁에서는 저것보다 더한 광경을 보게 될 거다. 그게 싫으면 돌아가. 전 중원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도 주산군도까지는 가지 않을 테니.”
“도망칠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저 역시 참전할 생각입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홀몸도 아닌데 문도들도 생각해야지. 나와 너는 입장이 달라.”
벽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막말로 곤륜파는 천년마교에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또한 문도들 전부 그 사실을 알고 있고.
하지만 보타문은 달랐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보고 결정해. 시간은 아직 있으니까.”
“알았어요.”
“문주는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걸 명심하고.”
벽우진의 시선이 다시 설아린에게로 향했다.
단전이 박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교주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독심을 품고 같이 죽자고 할 수도 있기에 벽우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곁에 섰다.
설향이 죽어서까지 신의를 지켰으니 그 역시 그에 따른 보답을 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끝낼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말고 가시구려.’
마지막으로 만났던 설향과 양선을 떠올리며 벽우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뇌리에 떠오른 두 사람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강호가 다시 한 번 발칵 뒤집혔다.
귀주성 육반수에서 벌어진 만천무제의 무덤 사건도 천년마교가 일으킨 것인데 청해성에서 다시 한 번 움직임이 발견되어서였다.
그것도 벽우진을 직접적으로 노린 일에 전 중원이 들썩였다.
더불어 제갈현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해서 강호의 뭇 문파와 무가들에 서신을 보냈다.
천년마교가 본격적으로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무림맹을 결성하자는 것이었다.
“쉽지는 않을 게야.”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온갖 이해관계가 엮여 있다 보니 시간이 제법 걸릴 겁니다.”
“그래도 일단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주도적으로 나섰으니 예정대로 되긴 될 거야. 만천무제의 무덤도 있으니.”
“죽은 사람이 엄청났죠.”
벽우진의 앞에 앉아 있던 서진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벽우진과 함께 갔었기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참상을 겪었는지 알았다.
“들어간 이들 중 무려 9할이 죽었으니까.”
“초입부가 아니었으면 전부 다 죽었을 겁니다.”
“어쩔 수 없지. 각자의 선택이었으니.”
고수며 하수며 할 거 없이 수천 명이 매장 당했다.
산 하나가 허물어진 만큼 피해 역시 엄청났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안타까워하긴 해도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본인들 스스로가 결정해서 들어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개인적으로 육반수에서 무공비급을 얻은 이들에 대해서 조사를 했는데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 제 83장. 구해주세요.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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