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67화 (267/325)

< 제 83장. 구해주세요. -03 >

설향의 대답에 청년이 파안대소했다.

설마 하니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얼마 가지 않았다.

이내 싸늘한 얼굴로 설향을 쏘아봤다.

“의외야. 이해타산적인 성격이라고 해서 말이 잘 통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할 줄이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네년의 선택으로 저년의 미래 역시 결정되었다.”

“알고 있습니다.”

서걱.

양선의 손가락이 날아갔다.

사내가 거침없이 양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양선은 약지가 날아갔음에도 입술을 깨물었다.

“쉽게 죽일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

청년이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설향은 두 눈을 감았다.

“어허! 눈을 감으면 쓰나.”

스슥!

설향의 등 뒤로 귀신처럼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이용해 강제로 설향의 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양선이 고문당하는 걸 똑똑히 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서걱. 슥.

그러는 사이에도 사내의 손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손가락은 물론이고 발가락과 발목, 무릎, 손목, 팔꿈치 어깨 등등 느릿하게 양선의 육신을 썰었다.

과다출혈로 죽지 않게 꼼꼼히 혈도를 짚으면서 말이다.

“끄으윽!”

으드득!

자신이 비명을 지르면 지를수록 설향이 힘겨워한다는 걸 알기에 양선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이를 악무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설향 역시 어금니를 앙다물고서 푸줏간의 고기처럼 썰어지는 양선을 똑똑히 바라봤다.

두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역시 계집들이라 그런가. 독기가 제법인데. 이 정도면 웬만한 놈들도 곡소리를 내기 마련인데.”

순식간에 방 안이 피로 흥건해졌지만 청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뭇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분골착근이 극악할 정도의 고문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육신을 절단 내는 것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고통을 양선은 미약한 신음만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아니면 본인은 멀쩡해서 그런 건가.”

설향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청년이 비릿하게 웃으며 턱짓했다.

그러자 또 다른 장정이 나타나 설향의 손목을 잘랐다.

나타난 것과 동시에 소검으로 단숨에 손목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끅!”

그러나 설향 역시 움찔거리며 미약한 신음만 흘릴 뿐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한결 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만 멀쩡히 있는 게 너무나 미안했었는데 이제는 좀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혼자 보내지는 않으마.’

모두가 다 마찬가지지만 양선은 더욱 그녀에게 있어 딸과도 같은 아이였다.

처음에는 말썽도 많이 피웠지만 누구보다 그녀를 따르고 챙겨주던 아이가 바로 양선이었다.

그런 양선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게 설향은 너무나 마음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청년에게 협조한다고 한들 크게 달라지는 없을 터였다.

‘오히려 이용당할 대로 당하고 양쪽에서 공격당하겠지.’

쓸모가 다하면 토사구팽 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중원무림은 배신자라 손가락질 하며 복수할 터였고.

때문에 양선은 최선의 선택을 했다.

‘하지만 여기서 죽는다면 그래도 신의는 지킬 수 있다. 어쩌면 복수를 해주실 지도 모르고.’

까칠하고 퉁명스러운 벽우진이었지만 적어도 매정하거니 비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알려진 성격으로 인해 다정한 면모가 가려졌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래서 설향은 아주 조금 기대했다.

어쩌면 벽우진이 조금이라도 하오문을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마저도 계산적인가.’

그르르르.

설향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사지가 잘리고 내장이 드러날 정도로 상반신이 난자된 양선이 결국 피거품을 물며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양선은 마지막까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웃으려고 했다.

‘양선아···.’

서서히 잦아드는 양선의 떨림을 부릅뜬 눈으로 보며 설향이 피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느꼈을 고통을 자신이 조금이라도 대신 짊어지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년도 죽여.”

“존명.”

싸늘히 식어가는 양선의 시신에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청년이 건성으로 말했다.

둘의 죽음 따위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윽고 설향의 머리 역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쯧! 쉽게 풀리나 했더니.”

청년이 얼굴을 찡그렸다.

자기 사람을 극진히 챙긴다기에 그는 하오문을 이용할 계략을 짰다.

벽우진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한 다음에 자리를 비울 때 제자나 사형제들을 인질로 사로잡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도 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패선의 목을 따면 두 사형들을 제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것 같은데.”

청년이 계속해서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현재 천하제일인에 제일 근접해 있는 이가 패선이니 만큼 그를 사로잡거나 처치하면 입지가 수직상승할 게 분명해서였다.

“아니지. 아직 포기하기는 일러.”

턱을 쓰다듬던 청년이 눈을 빛냈다.

최선의 방법은 틀어졌지만 그렇다고 계획이 아예 엎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돌아가야 했지만 방법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야.”

“예, 주군.”

“저 늙은이한테 제자가 있다고 했지? 하나뿐이라던가?”

“설아린이라고, 소문주라고 합니다.”

“그럼 그 년이 이제 문주겠네?”

청년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음흉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리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위치는?”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저 늙은이를 미끼로 걸어. 한 이틀 정도 행적이 파악되지 않으면 알아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거야. 그때 슬쩍 정보를 흘려. 바로 물 수도 있지만 의심할 수도 있으니 순차적으로.”

“알겠습니다.”

콰앙!

난데없이 들려오는 폭발음에 청년과 사내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런데 폭발음은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연이어서 들려왔는데 중요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폭발음이 가까워진다는 것이었다.

“침입자인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소문주라는 계집이 찾아온 것이었으면 좋겠군. 번거롭지 않게 말이야.”

양선을 데리고 왔던 사내가 출입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나 그가 문을 여는 것보다 폭파되는 게 먼저였다.

쾅!

코앞에서 일어난 폭발에 사내가 황급히 두 팔을 교차했다.

그러면서도 사내는 날카로운 눈으로 출입문이 있던 자리를 주시했다.

혹시나 모를 공격에 대비했던 것이다.

저벅저벅.

그러나 우려했던 기습은 없었다.

거창했던 폭발과 달리 느릿한 발자국 소리만 들려왔던 것이다.

“···한 발 늦었나.”

먼지구름 사이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시야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음에도 마치 실내의 전경이 훤히 보인다는 듯이 말하는 젊은 남자의 말에 사내가 미간을 좁혔다.

한줄기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털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누구냐.”

“네깟 놈은 알 거 없어.”

파아앗!

먼지구름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남자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그와 동시에 사내가 달려들었다.

수십 년 동안 단련된 본능이 눈앞에 있는 이 자는 위험인물이라고 경고를 보내와서였다.

“어?”

그런데 정확히 머리를 노리고 찌른 단검이 어느 순간 궤적을 이탈했다.

분명 머리를 노리고 찔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빈허공을 가르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나에게 너무 실망만 주는데. 내가 들은 마교도들은, 마인들은 이렇게 허약하지 않은데.”

푸욱!

남자의 음성과 함께 사내의 등에서 피가 솟구쳤다.

무언가에 꿰뚫린 듯 손가락 크기의 구멍이 뚫리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털썩!

이윽고 비명도 없이 절명한 사내가 바닥에 엎어졌다.

얼굴 가득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말이다.

저벅저벅.

허망하게 죽은 사내의 옆으로 하나의 발이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리, 허리, 가슴을 지나 얼굴이 보였다.

“···너는?”

“내가 확실히 유명해지긴 한 모양이야. 천년마교 놈들도 내 얼굴을 알아보는 걸 보면. 용모파기라도 돌려보는 모양이지?”

“어떻게 네가?”

상석에 앉아 있던 청년의 표정에 놀람이 떠올랐다.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나타나서였다.

그러나 그 기색은 얼마가지 않아 사라졌다.

이내 그의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떠올랐다.

‘왜 하필 지금?’

청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호기롭게 패선을 잡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일대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수준을 잘 알았다.

교주의 세 번째 제자이기는 하나 어쩌면 육대마가주와 비슷한 실력자일지도 모르는 벽우진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올 거면 조금만 더 일찍 오지!’

청년이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설향이나 양선이 살아 있었다면 인질극이라도 펼쳤을 터였다.

아무리 벽우진이 개망나니로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명문정파의 큰 어른이었다.

명분을 따질 수밖에 없는 위치인 만큼 두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제법 쏠쏠하게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죽은 후였기에 청년은 이를 악물었다.

스윽.

하지만 벽우진은 청년의 머리가 복잡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실내를 훑었다.

이미 기운으로 알고 있었지만 육안으로 다시 한 번 확인했던 것이다.

“흐음.”

목과 손이 잘린 설향에 이어 말 그대로 토막 난, 처참하게 죽은 양선의 시신을 보고는 침음을 흘렸다.

시신만 봐도 양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벽우진의 시선을 마지막까지 끈 것은 양선의 표정이었다.

‘후련함, 그리고 다행스러움인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눈은 웃고 있었다.

식어버린 눈물이 눈매에 맺혀 있었음에도 감겨지지 않은 눈은 웃은 채로 설향에 향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벽우진은 그녀가 죽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신의를 지켰군.”

벽우진은 두 눈을 감았다.

어째서 두 사람이 이 자리에서 죽음을 선택했는지 그는 단번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이 벽우진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다.

마지막까지 둘은 자신과 곤륜파에 신의를 지켰다.

모두가 믿을 수 없는 이들이라고 부르짖던 하오문의 문주와 분타주가 말이다.

“크흐읍!”

격동하는 가슴만큼이나 벽우진의 기도가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는 반박귀진의 고수처럼 아무런 기운도 풍기지 않았는데 한순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벽우진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사방을 무자비하게 짓누르는 위압감에 청년이 반사적으로 공력을 끌어 올렸다.

와장창!

동시에 창문이 깨지며 방 안으로 십여 명이 들어왔다.

청년을 지키기 위해 호위무사들이 다급히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호위무사들의 등장에도 청년의 표정은 어두웠다.

고작 이 정도 숫자로는 벽우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후일을 도모한다.’

고르고 고른 친위대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게 너무나 아까웠지만 그래도 자신의 목숨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 청년은 슬쩍 몸을 일으켰다.

친위대가 공격하는 사이 몸을 내뺄 작정이었다.

‘복수는 해주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벽우진을 향해 달려드는 친위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청년이 약속했다.

지금은 비록 구차하게 도망치지만 언젠가는 넋을 기려 주겠다고 말이다.

“이 짓을 벌여 놓고 어딜 가려고?”

“어?”

< 제 83장. 구해주세요.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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