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66화 (266/325)

< 제 83장. 구해주세요. -02 >

“분타주 자리를 거저먹은 건 아닌 모양이야. 몇 마디 안했는데도 알아차린 걸 보면.”

낯선 음성에 양선의 고개가 번개같이 돌아갔다.

본능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만든 이가 목소리의 주인이라는 걸 느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수많은 강호명숙을 알고 있는 그녀인데 말이다.

‘누구지?’

귀공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잘 생긴 외모였지만 양선의 눈에는 그 외모가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뱀과 같은 눈이 가장 먼저 뇌리에 박혔다.

뱀을 닮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뱀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눈빛도 보통이 아니고. 하오문의 분타주는 아무나 앉는 게 아닌 모양이야.”

“능력이 없는 이는 앉을 수 없지요.”

“그런가. 근데 하오문에는 인재가 없지 않나?”

거만하게 앉아 있는 청년의 말에 설향은 그저 웃어 보였다.

양선이 붙잡힌 순간부터 주도권은 저 쪽이 쥐고 있기에 최대한 자극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머릿속만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청년이 누구인지는 설향 역시 궁금했던 것이다.

“말을 아끼는군. 하긴. 하오문주 씩이나 되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너무 못나면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 없어 보이잖아.”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좋게 말했는데 좀처럼 나오지를 않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강압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지.”

“이제라도 나왔으니 저 아이는 풀어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설향은 청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며 넌지시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게다가 어떤 고초를 당했는지도 아직은 알 수 없었고.

“글쎄.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아서 말이지. 자리만 만들어진 것뿐이지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으니까.”

“앞으로도 선이가 필요하신 모양이군요.”

“맞아. 문주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말이지. 대화가 잘 되면 무사히 문주에게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어그러진다면.”

스윽.

양선을 데리고 왔던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뒤에 섰다.

그런데 사내의 손에는 어느새 서늘한 빛을 발하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하오문주 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렇게 말했는데 이해를 못하지는 않을 거 아냐?”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좋아. 이제야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준비가 된 것 같군.”

청년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인질이 있어서 그런지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것 같아서였다.

“말씀하시지요.”

“내가 문주를 보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협조를 좀 해주었으면 해서 말이지.”

청년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설향은 웃을 수가 없었다.

말은 협조라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협박으로 들려서였다.

“협조 말씀이십니까.”

“응. 하오문주에게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내가 알고 있는 하오문의 역량을 생각하면 말이지. 크게 위험하지도 않고.”

이상하게 청년의 말이 설향에게는 반대로 들렸다.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극히 위험한 일을 자신에게, 그리고 하오문에게 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 정도 실력자들을 데리고서 우리에게 부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지.’

설향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녀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껏 쌓아온 안목과 연륜으로 그녀는 파악했다.

이곳이 용담호혈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마 지금쯤이라면 우리의 정체도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몸이라.”

“모른다?”

“짐작만 할 뿐입니다.”

“말해 봐.”

청년이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는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설향을 주시했다.

마치 아랫사람을 보듯 말이다.

“천산에서 오신 분들이지 않습니까.”

“후후! 밑바닥에서 굴러서 그런가. 단어선택이 현명한데.”

청년이 히죽 웃었다.

중원인들이 자신들을 천년마교, 혹은 마교도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설향은 자신들이 그런 표현을 싫어 한다는 것을 아는지 다른 단어를 선택했다.

“처신을 특별히 잘해야 하는 자리인지라.”

“그런데도 우리의 연락을 그렇게 피했단 말이지.”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까요.”

“하긴.”

청년이 금방 수긍했다.

아무래도 정체를 숨기면서 움직여야 했기에 설향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짜증이 났을 뿐.

“하온데 협조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아주 간단해. 패선 알지? 곤륜파의 장문인.”

“···예.”

“알아본 바에 의하면 패선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며?”

청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설향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청년의 표정에도 설향은 담담한 신색을 유지했다.

당황한 기색 없이 시종일관 옅은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우연찮게 몇 번 만나본 게 전부입니다.”

“중요한 건 대면이 가능한 사이라는 거지. 다른 곳과는 만난 적이 없잖아?”

“저는 만나고 싶어 했으나 상대 쪽에서 원치 않았었죠.”

“자꾸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닌데.”

부르르르!

얌전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양선이 몸을 떨었다.

뒤에 있던 사내가 왼손으로 그녀의 마혈을 짚었던 것이다.

별다른 지시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이제야 바로 알아듣는군. 역시 좋게 말하면 알아듣지를 않는다니까. 좋게 말해주니까 나와 대등한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거야?”

청년의 안광이 강렬해졌다.

마안(魔眼)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마치 바늘처럼 육신을 찌르는 듯한 느낌에 설향은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전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흥.”

저자세로 나오는 설향의 모습에 청년이 코웃음을 쳤다.

여전히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던 것이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문주가 해줄 일은 하나야. 패선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해서 나에게 알려줘야겠어. 내가 문주에게 바라는 건 딱 그거 하나야.”

“저보고 첩자가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고작 행적을 보고하는 것 가지고 첩자라니. 조그만 협조지, 이 정도면.”

“······.”

설향의 얼굴이 굳어졌다.

역시나 짐작했던 대로 협조를 빙자한 협박임을 알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청년은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은 없어. 대가는 충분히 치를 거야. 그것도 문주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대가를 말이지. 그리고 막말로 이건 기회라고. 나에게 잘 보이면 하오문의 미래 역시 바뀔 수 있어. 더 이상 밑바닥만 전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소교주가 되는 순간 하오문의 앞날 역시 꽃길이 펼쳐질 거야. 내가 또 아랫사람의 노고를 잊는 사람이 아니거든.”

청년이 다리를 꼰 채로 거들먹거렸다.

이미 설향이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만약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야? 설마 거절할 생각을 한 거야? 이 자리까지 왔는데?”

실실 웃었던 청년의 표정이 삽시간에 달라졌다.

더없이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전신에서는 서늘한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궁금해서 여쭙는 것입니다.”

“나는 이리저리 재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지. 하지만 궁금하다니 말은 해줘야겠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문주가 내 부탁을 거절한다면 아주 슬픈 일이 생길 거야. 본인도 마찬가지지만···.”

청년의 시선이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사내의 검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양선의 왼쪽 귀를 갈랐다.

한 번에 자르지 않고 정확히 반만 베어냈다.

“끄윽!”

마혈을 점혈당한 상태였기에 피하지도 못하고 귀가 베인 양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고통에도 양선은 비명을 참았다.

자신이 비명을 지르면 설향이 힘들어 할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럴 수는 없어!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는데!’

양선은 설향을 보는 순간 알았다.

자신을 인질로 삼아 설향을 꾀어냈다는 것을 말이다.

‘차라리 내가 죽었다면···.’

양선도 귀가 있었기에 청년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그녀는 너무나 죄송했다.

만약 자신이 자결했다면 설향이 여기까지 오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양선아.”

“······.”

“괜찮다. 눈을 뜨거라.”

“무, 문주님.”

항상 들어왔던 인자한 음성에 양선이 자기도 모르게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그러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설향의 모습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참으로 보기 좋아. 근데 이왕이면 둘이 같이 오래오래 함께 사는 게 좋지 않을까?”

절절한 두 사람의 눈빛에 청년이 히죽 웃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섬뜩하기 짝이 없는 협박이었다.

“죄,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것 없다. 불가항력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흐흑!”

귀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얼굴을 타고 내려가 옷을 적셨다.

하지만 양선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서글프게 울기만 했다.

“난 말이지. 더 이상의 피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얼마든지 좋게 좋게 이야기를 끝낼 수 있잖아? 고민할 것도 없는데 나는 왜 문주가 고민을 하는지 모르겠어.”

천연덕스러운 청년의 음성을 들으며 설향이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고민은 하지 않았다.

청년의 협박을 들은 순간부터 결정을 내려서였다.

물론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목숨은 지킬 수 있겠지. 하지만 내 목숨을 대가로 문파는 미래를 잃겠지.’

당장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청년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게 맞았다.

하오문의 능력이라면 몰래 정보를 제공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으니까.

조작하는 것 역시 하오문이 잘하는 것 중 하나였고.

하지만 상대가 벽우진이었다.

모두가 무시하고 경시할 때 오직 벽우진만이 편견 없이 그녀를 한 명의 사람이자 문주로 대해주었다.

또한 자신은 주고받는 관계라고 했지만 설향은 알았다.

알게 모르게 벽우진이 하오문을 신경 써 주었음을 말이다.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문파라고 신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

설향이 두 눈을 떴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고민하게 만든 것은 양선이었다.

자신이야 이미 살만큼 살았고 이곳에 올 때 이미 각오를 하고 왔었다.

그러나 양선은 달랐다.

“문주님.”

눈물을 흘리던 양선이 무언가를 느낀 듯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설향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너에게는 정말···,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저 때문에···.”

“지금 무슨 말들을 지껄이는 거지?”

청년의 싸늘한 음성이 방 안을 갈랐다.

두 여인의 대화가 심상치가 않아서였다.

“늦었지만 대답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협조해 달라는 부탁은 들어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말하는 것이냐?”

“예.”

“혼자만 죽는 게 아닐 텐데?”

청년이 매서운 눈빛으로 설향을 노려봤다.

하지만 설향은 그런 청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비천한 천녀라고 해서 신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요. 또한 저 역시 중원인입니다.”

“크큭! 크하하하!”

< 제 83장. 구해주세요.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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