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65화 (265/325)

< 제 83장. 구해주세요. -01 >

난장판이 된 안가를 모두 정리하니 어느새 동이 터왔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모든 흔적을 지우다보니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날밤을 샌 네 사람은 조금도 피로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안광을 뿌리고 있었다.

“둘 다 고생하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잠은 못 잤어도 말끔하게 씻고 옷도 갈아입은 제갈현과 개왕을 향해 벽우진이 직접 차를 우려내어 따라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이 차를 들이켰다.

“역시 장문인께서 우려주시는 차가 제일 맛있는 것 같습니다. 공력으로 달여서 그런가 똑같은 재료인데 저와는 맛이 다릅니다.”

“갑자기 웬 칭찬이야. 다도는 제갈가주의 경지가 훨씬 높은 것으로 아는데.”

“허허. 기술의 차이가 다르다는 걸 저 자신이 잘 아니까요. 저는 평가하는 쪽에 치우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신소리는.”

마지막으로 서진후에게도 차를 따라준 벽우진이 마지막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은근한 눈빛으로 개왕을 쳐다봤다.

“우선 사과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과?”

“예.”

방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리 좋지 않았던 개왕이 얼굴 가득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했던 것과 달리 알아낸 것이 전혀 없어서였다.

“역시 그런가.”

“광신도라 그런지 아주 독종입니다. 그 어떤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럴 거라 예상하기는 했어.”

포로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사뭇 달랐기에 벽우진인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죄송합니다.”

“개왕이 사과할 게 있나. 그 놈이 유별난 건데. 그리고 애초에 광신도 놈들은 미치광이잖아. 말이 통할 리가 있나. 근데 입은 그 놈 하나뿐이 아니잖아?”

“고문이 통하기는 하는데, 아는 게 없습니다.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는 정보의 한계가 뚜렷합니다.”

“주변 인물을 파보는 건?”

“방주님께서 포로들을 상대하는 동안 개방도들의 도움을 받아서 육반수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런데 책임자가 행방불명되는 순간 따로 조치를 취하기로 되어 있는지 모든 것들이 불타 있었습니다.”

제갈현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름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이미 그때는 모든 것이 불타버린 후였다.

작은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불을 질렀던 것이다.

물론 서두른 덕분에 몇몇 이들을 더 사로잡기는 했지만 역시나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쓸데없이 치밀해졌네. 그냥 예전처럼 힘만 믿고 달려들지.”

“···그래서 더욱 걱정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교주는 역대 교주들과는 성향이 많이 다른 것 같아서요.”

“비슷할 수도 있고. 군사 역할을 하는 이가 생겼을 수도 있잖아. 가능성은 전부 다 열어 놓자고. 아직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진짜 큰 문제인 것 같은데요.”

개왕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천년마교에 제갈현 정도의 역량을 가진 책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단일세력으로는 최강이라 불리는 곳이 천년마교인데 거기에 뛰어난 책사까지 함께 한다?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가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중원무림은 이래저래 전력의 손실이 상당한 상태인데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최악을 상정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맞습니다.”

“일단 꼬리를 잡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자고. 그토록 찾았음에도 찾지 못했던 꼬리이잖아. 아, 만천무제의 무덤에 대해서는 물어봤어?”

“그건 순순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장난질이 맞다고요.”

“그럼 그 부분부터 해결하자고. 더 이상의 피해는 없게 만들어야지.”

벽우진이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개왕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사로잡은 중년인이 했던 말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였다.

“···천년마교의 음모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놈이 그래?”

“예. 그리고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눈이 돌아간 상태라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겁니다.”

“무공비급에 장난질을 해놓았을 가능성이 있는데?”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이미 목숨을 걸고 만천무제의 무덤에 들어간 이들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확실한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놈이 말했는데 만천무제의 무덤인 것은 확실하답니다. 자기들도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랍니다.”

벽우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진실과 거짓이 교활할 정도로 교묘하게 뒤섞인 것 같아서였다.

“후우. 일단은 천년마교가 중원에 암약하고 있었다는 사실부터 밝히자고. 그게 우선이니까. 지금은 할 수 있는 것부터 생각하자.”

쿠르르릉!

갑자기 건물이 뒤흔들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들썩이는 상황에 벽우진은 물론이고 제갈현과 개왕, 그리고 서진후가 눈을 부릅뜨며 중심을 잡핬다.

그리고는 황급히 창밖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였다.

“저기는···.”

갑작스러운 지진에 다급히 창밖을 살피던 제갈현이 침음을 흘렸다.

먼지구름이 솟구치는 곳은 그가 너무나 잘 아는 곳이어서였다.

방금 전까지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설마?”

벽우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진과 함께 먼지구름이 솟구치자 하나의 추측이 뇌리를 강타해서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세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아닐 겁니다. 이렇게 빨리 터트렸을 리 없습니다.”

“일부분만 무너졌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가보자.”

서진후와 개왕의 말에도 벽우진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하늘 높이 솟구치는 먼지구름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아서였다.

언뜻 보기에도 산 하나는 전부 다 감쌀 정도였기에 네 사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동했다.

사방이 꽉 막힌 작은 석실에 양선이 홀로 앉아 있었다.

빛이라고는 작은 횃불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초췌한 안색의 그녀를 제대로 비춰주지 못했다.

“후우.”

깊은 한숨과 함께 양선이 두 눈을 감았다.

자다가 일어나 보니 이곳에 와 있었다.

팔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탈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어떤 수법을 사용한 것인지 점혈을 완벽하게 해놓았기에 해혈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소리를 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분명 원하는 것이 있었기에 자신을 납치했을 터였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감자 두 개를 넣어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심문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양선은 시간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차라리 고문이라도 했으면 마음은 편했을 텐데 그것도 없었다.

“도대체 왜 날 납치한 거지? 무슨 이유로? 그리고 왜 가만히 놔두는 거지?”

창문이 없었기에 시간 감각은 진즉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나마 문 아래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감자 두 개가 아니었다면 날짜조차 세지 못했을 터였다.

‘오늘로 5일째인가.’

특별한 점혈을 했는지 공력만 사용하지 못할 뿐 움직이는 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두터운 철문을 쪼개거나 날려버리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멀쩡했다.

다만 문제는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려는 속셈인가.’

심문과 고문에 대해서는 그녀 역시 일가견이 있었다.

경험이 많기도 했고.

그러나 이런 방식은 처음이었다.

‘시간이 그렇게나 많나?’

사람은 함께 사는 존재였다.

소외될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이도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외로움이라는 괴물은 의외로 무서운 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율을 생각하면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것도 아니면 무언가를 기다리는 건가.’

벌써 열 개가 넘는 감자를 내려다보며 양선이 눈매를 좁혔다.

처음에는 독이 있을까 싶어 먹지 않았지만 나름의 확인 끝에 감자에는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았다는 걸 알고는 필요한 만큼만 먹었다.

언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올지 몰랐기에 최소한 체력만큼은 유지했던 것이다.

‘근데 어디지? 이 정도로 은밀하게 날 납치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은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역순으로 차근차근 생각하며 자신을 납치할 만한 가능성이 있는 곳들을 곱씹었다.

그러나 어느 곳 하나 확신이 들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나를 아는 사람이 연관되어 있어.’

양선이 고개를 저었다.

시작점이 잘못된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이렇게 비밀리에 자신을 납치하려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말은 그녀의 측근 중 한 명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내가 그렇게 못난 상관이었나.”

하오문의 결속력이 그리 강하지는 않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상대적이었다.

소수는 가족 못지않은 끈끈함을 가지고 있었다.

양선은 자신의 측근들과는 적어도 그 끈끈함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그런데 결과는 지금의 모습이었다.

“아니면 정을 너무 많이 주었나···.”

두 눈을 감으며 양선이 중얼거렸다.

대모이자 문주인 설향의 한 마디가 문득 떠올라서였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의심하라는 그 말이 말이다.

저벅저벅.

그때 멀리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무공을 익힌 듯 규칙적인 발자국소리였다.

한데 그 소리에 양선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직 식사할 시간이 되지 않아서였다.

끼이익.

양선이 의아해할 때 열쇠가 자물쇠에 파고드는 거친 마찰음이 들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허튼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하더라도 상관은 없는데, 대신 그 대가는 스스로 치러야 할 거다.”

“···말은 하는군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해도 되거든. 상부에서 허락이 떨어졌지. 물론 그 외의 것도. 상처만 크게 없으면 된다고 하더군.”

보는 순간 냉혈한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냉막한 인상의 사내가 두 눈을 번들거리며 양선을 쳐다봤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의외로 두 눈에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원한다면 줄 수 있는데.”

“말이 잘 통해서 좋은데, 아쉽군. 안타깝게도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말이야.”

눈동자 깊은 곳에서 번들거리는 붉은 기운이 무엇인지 양선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슬쩍 상의를 만지작거리며 은근한 표정을 지었는데 사내는 넘어올 듯하면서도 넘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일 각 정도도 없을까요?”

“응. 없어.”

“반 각도?”

어두운 석실 안에서 뽀얀 어깨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어깨와 쇄골에 이어 새하얀 젖가슴이 살짝 드러났다.

그러나 남자라면 환장할 수밖에 없는 유혹에도 사내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나와라. 널 기다리는 분이 계시니.”

“······.”

음욕을 한순간에 가라앉히는 모습에 양선의 얼굴이 굳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조직인 것 같아서였다.

‘대체 어디지? 본문과 적대적인 곳은 현재 딱히 없는데···.’

무안함을 느낄 새도 없이 옷매무새를 바로하며 양선이 사내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복도를 지나 방 안에 도착한 양선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다행히 건강해 보이는구나.”

“무···. 흡!”

널찍한 방에 수행원 하나 없이 홀로 앉아 있는 설향을 본 양선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부르려다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굳이 자신이 설향의 신분을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괜찮다. 내가 하오문주인 것을 다 알고 있으니.”

“···서, 설마?”

양선의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설향을 보자 한순간에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동시에 그녀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 제 83장. 구해주세요.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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