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2장. 오는 건 마음대로 와도 가는 건 아냐. -01 >
“어, 라···?”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소변을 볼 요량으로 뒷간으로 가던 아이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시야가 비틀어지는 것 같아서였다.
쿠웅.
하지만 그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목에서부터 잘린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서였다.
“역시 어린아이의 피는 너무나 향긋하다니까.”
“즐길 여유 없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제갈세가의 안가에 온 것인지 잊지 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냥 싹 다 죽이면 되는 거 아냐.”
“개왕을 네가 잡으려고?”
어디서나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흑의무복을 입고 있던 남자가 혀를 차며 동료를 쳐다봤다.
그러나 목에서 솟구치는 피분수에 코를 벌렁거리던 사내가 히죽 웃었다.
“못 잡을 건 뭐야?”
“그럼 네가 혼자 나서는 걸로.”
“치사하게 그럴 거냐. 같이 잡아야지.”
“정신 똑바로 차려. 같이 있는 구절서생은 결코 만만한 놈이 아니니까.”
“그래 봤자 칼에 찔리고 머리가 터지면 뒈지는 건 똑같아.”
사내가 키득거렸다.
아무리 칠성 중 기성(奇星)이라 불리는 제갈현이라고 해도 사람인 것은 똑같았다.
그리고 사람은 심장이 파괴되거나 머리가 박살나면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맞아. 사람인 이상 뒈지는 건 똑같지. 다만 좋게 죽느냐, 고통스럽게 뒈지느냐가 다를 뿐.”
“컥!”
창졸간에 사지육신에 구멍이 뚫린 사내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그리고는 신음하며 벌레처럼 바닥을 기었다.
고통으로 인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 누구냐!”
난데없이 들려오는 음성에 아직까지는 두 다리로 멀쩡히 서 있던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주변을 황급히 두리번거렸다.
검을 더욱 강하게 쥐고서 금방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살기를 내뿜으며 소리쳤던 것이다.
“그 말은 내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마교에서 왔느냐?”
스르륵.
어둠을 가르듯이 전각 사이에서 청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승달처럼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청년이 뒷짐을 진 채로 남자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너, 너는?”
“역시 천하무림 비무대회가 크긴 컸나 보네. 바로 날 알아보는 걸 보면.”
“어떻게 여기에?”
“그건 알 거 없고.”
서늘한 안광과 함께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그리고 그게 남자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사형!”
“역시 오길 잘한 거 같다. 안 왔으면 이 놈들 못 만났을 거 아냐?”
검을 든 채로 달려오는 서진후를 쳐다보며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너무나 섬뜩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이상하게 몸이 떨려온다고나 할까.
“숫자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상관없어. 대신 피해가 커지지 않게 해. 가급적이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 죽지 않게. 나도 신경 쓸 거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간부급 보이면 살려두고. 자결만 못하게 해.”
“예.”
서진후의 안광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천년마교에 복수심을 불태우는 건 벽우진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벽우진보다는 그의 복수심이 훨씬 크고 깊었다.
벽우진이 얘기로 들은 것과 달리 는 곤륜파가 불타고 무너지는 걸 직접 목도한 이였다.
“가자.”
차분했던 지금까지와는 너무나 다른 사제의 모습이었지만 벽우진은 이해했다.
자신과 달리 곤륜파의 흥망성쇠를 전부 다 본 사람이 바로 서진후였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서진후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준 후 가장 마기가 강렬한 곳으로 몸을 날렸다.
서걱! 푹!
벽우진이 떠나간 뒤로 곳곳에서 섬뜩한 파육음이 들려왔다.
그러나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대로 훈련을 받은 듯 검에 찔려도 누구 하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 것이다.
“조용해서 좋군.”
“어, 어떻게?”
“뭘 어떻게야? 네놈들이 약해빠진 걸.”
서진후는 어금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웃었다.
그 서늘하고 차가운 괴소(怪笑)에 하나같이 똑같은 흑의무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 몸을 떨었다.
입고 있는 옷은 도복인데 살기는 웬만한 살귀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농밀해서였다.
“죽어!”
“그건 네놈들이고.”
서진후의 검이 춤을 췄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살기를 줄기줄기 뿜으며 허공에 쉴 새 없이 피를 뿌렸다.
그런데 의외로 죽은 이는 없었다.
콰앙! 쾅!
날 듯이 허공을 가로지르던 벽우진이 장원의 한 공터에 내려섰다.
그런 그의 눈에 잔뜩 흥분해서 날뛰는 제갈현과 개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개왕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의족을 착용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살벌하게 날뛰고 있었는데 지팡이를 마치 타구봉처럼 쓰며 흑의무인들을 개 패듯이 때려잡고 있었다.
“저 놈이 우두머리인 모양이군.”
쓰러진 이들까지 합치면 무려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두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다.
협공하며 둘을 끈질기게 밀어붙였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의 시선은 차륜전을 펼치는 흑의무인들이 아닌 홀로 여유롭게 구경하는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스윽.
벽우진의 시선을 느낀 듯 싸움구경 하듯 느긋하게 격전을 쳐다보던 중년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한눈에 벽우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니, 너는?”
“날 아는 것 같은데, 도망치지 않는군.”
“어떻게 여길? 아니. 운이 좋군. 구절서생과 개왕으로 만족하기에는 아쉬웠는데 이런 대물이 걸릴 줄이야.”
“대물?”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번뜩이는 중년인의 모습에 벽우진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반응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서였다.
“대물이지. 패선이라면 소림무제, 무당권제, 제왕검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으니까.”
“그 정도라도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영광으로 알아야지. 이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후후후!”
벽우진이 웃음을 흘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혀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처럼 호기롭게 말하는 이가 요즘에는 드물어서였다.
“그러니 소문대로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면 좋겠군.”
“그토록 원하니 확실하게 알려주지. 물론 대가도 확실하게 받을 거야.”
벽우진의 신형이 사라졌다.
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벽우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어?”
한순간에 사라지는 기척에 중년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음에도 기척을 놓쳤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본능적으로 위험신호를 감지했던 것이다.
“어딜 가려고?”
벽우진과 마찬가지로 뒷짐을 지고 있던 중년인이 황급히 손을 풀었다.
하지만 벽우진이 먼저였다.
어느새 뒤로 돌아간 벽우진이 막 발을 떼려던 중년인의 어깨를 붙잡았던 것이다.
“흡!”
그와 동시에 중년인이 몸을 돌리며 쌍장을 뿌렸다.
창졸간에 장강을 내뿜으며 벽우진을 공격했던 것이다.
터어어엉!
마기로 이루어진 공격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기분 나쁜 새까만 강기가 벽우진을 강타했다.
아니, 강타한 것처럼 보였다.
“네놈들은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네놈들을 보고 싶어 했는지 말이야.”
“······!”
중년인의 동공이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확대되었다.
반사적으로 뿌린 것이기에 전력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8할 이상의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그런데 그 쌍장을 벽우진은 너무나 태연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에게도 네놈이 대물이었으면 좋겠군.”
“큭!”
중년인이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일단은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대로는 자세가 좋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힘을 실을 수 없었다.
또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다.
‘이 정도라고? 패선이?’
중년인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한 차례의 공방이었지만 중년인 역시 고수인 만큼 단번에 알아차렸다.
벽우진이 자신 못지않은 고수라는 사실이 말이다.
아니, 인정하기 싫었지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그럴 리 없다!’
자기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중년인이 고개를 크게 저었다.
고작해야 중원에서, 그것도 다 망해가던 곤륜파의 후인이 천년마교를 떠받치는 여섯 개의 기둥 중 하나인 진명마가(眞明魔家)의 이인자인 자신보다 강할 리가 없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본교 서열 30위 안에 들어가는 고수가 바로 이 몸이다!’
중년인은 다시 한 번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털어냈다.
방금 전에 움직임을 놓친 건 단순히 방심이라고 치부하면서 말이다.
너무 오랫동안 본산을 떠나 왔기에 감이 무뎌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빛이 아주 마음에 들어. 건방지고 오만한 게 딱 천년마교의 주요 인사처럼 보여. 웬만한 간부급 이상인 느낌이랄까.”
“이곳을 네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자기 할 말만 하는 것도 좋아.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 사로잡을 맛이 나지.”
“미친놈.”
중년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히 자신을 앞에 두고 사로잡느니 마니 하는 게 우스웠던 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딱 한 가지야. 자결하지만 말라고.”
“그럴 일 없다. 네놈이 내 손에 먼저 죽을 테니까!”
쿠르르릉!
중년인의 전신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무지막지한 위압감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사방을 짓눌렀던 것이다.
파아앗!
단지 공력을 끌어 올리는 것만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줄줄이 내뿜으며 중년인이 달려들었다.
쌍수에 강기를 일으킨 채로 벽우진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쑤아아앙!
이윽고 거대한 장인이 벽우진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힘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듯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단숨에 짓이겨주마!’
중년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아까 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벽우진의 선택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피할 거라 생각했던 벽우진은 정면으로 중년인의 공격에 맞섰다.
쩌어엉!
검지 하나를 펼쳐 중년인의 거대한 장인을 막아냈던 것이다.
손바닥도 아니고 검지 하나로 자신의 공격을 밀어내는 모습에 중년인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몸은 머리보다 판단이 빨랐다.
츠츠츠츠!
벽우진이 일장을 막아내기 무섭게 왼손이 뻗어나갔다.
어느새 쥐어진 주먹이 벽우진의 안면을 노리고 파고들었던 것이다.
후우웅!
일권과 함께 묵직한 풍압이 벽우진을 짓눌렀다.
아직 권강이 닿지 않았음에도 권풍이 벽우진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이번 것은 막지 못할 거다!’
중년인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본능적인 대응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 공격이 너무나 시기적절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벽우진은 건방지게도 아직도 뒷짐을 지고 있는 상태였기에 중년인은 자신했다.
이번 일격에 벽우진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것이라고 말이다.
‘운 좋게 한 번은 막아냈을지 모르지만, 두 번은 불가능하지.’
언제 긴장했냐는 듯이 중년인이 입가에 거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그는 보지 못했다.
벽우진의 한쪽 입꼬리가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을 말이다.
꽈아아앙!
이윽고 중년인의 권강이 벽우진을 강타했다.
시원스럽게 안면에 작렬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년인의 표정이 이상했다.
제대로 일격을 꽂았음에도 얼굴이 굳어 있었다.
슈아아앗!
그리고 그 순간 폭발 사이로 너무나 새하얀 손이 뻗어 나왔다.
방금 전의 폭발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듯이 활짝 펼쳐진 손이 중년인에게 쇄도했다.
“흐읍!”
그 모습에 중년인이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본능이 쉴 새 없이 경고를 하고 있었기에 고민하지 않고 뒷걸음질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벽우진의 손은 어렵지 않게 중년인의 멱살을 잡았다.
“안 되지, 안 돼. 어딜 도망가려고.”
< 제 82장. 오는 건 마음대로 와도 가는 건 아냐.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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