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62화 (262/325)

< 제 81장. 꼬리. -02 >

중년인이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세 사람과 비교하면 구절서생과 개왕은 무게감이 많이 떨어져서였다.

적어도 자신과 어울리려면 세 사람 내지 패선 정도는 되어야 했다.

“제갈현이야 미래의 귀찮음을 생각하면 미리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개왕은 아니지.”

상부에서야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개왕은 절대 그 정도의 급이 아니었다.

거지들은 숫자만 많을 뿐 본교에 위협이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저 귀찮은 존재들일 뿐.

“타초경사라. 어차피 죄다 묻어버리면 똑같은 거 아닌가?”

본교에서 온 지시를 떠올리며 중년인이 턱을 쓰다듬었다.

만천무제의 무덤을 날려버리나 제갈현과 개왕을 죽이나 어찌됐든 본교의 움직임이 드러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는 상부의 지시가 살짝 이해되지 않았다.

“어차피 드러날 거면 화끈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본교의 지령에 따라야 하는 게 그이지만 그렇다고 의사결정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보니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는 그의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넷 중 하나만 왔어도 내가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건데.”

본교에서는 적어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절반은 움직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중원무림의 지휘체계가 무너져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년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중원무림의 전력 절반이 사라지면 정복이야 편해지겠지만 동시에 무인으로서의 재미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쉬운 싸움은 재미가 없는 법이지. 오히려 진이 빠진다고나 할까.”

투쟁하고 쟁취하는 게 바로 본교의 삶이었다.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있어 약해빠진 적은 상대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꿈틀거리는 벌레들을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자기네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구경도 나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중년인은 자신이 직접 움직이고 싶었다.

피 튀기고 살기 넘치는 전장에서 말이다.

“지겹군.”

서서히 바닥을 향해가는 인내심을 느끼며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서는 마화(魔火)가 번뜩이고 있었다.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은 야심한 시각에 제갈현은 홀로 방안에 앉아 있었다.

하나뿐인 등불이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애처롭게 흔들렸으나 제갈현의 두 눈은 굳건했다.

흔들림 없이 거대한 한지에 그려진 조감도를 내려다봤던 것이다.

“만천무제의 무덤.”

제갈현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본능 역시 아닌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고.

“이게 정말 음모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늘어나는 인파에 제갈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만약 음모라면 정말 머리를 기가 막히게 쓴 것 같아서였다.

“발견한 무공비급들이 진품이라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계획된 것이었다면? 아홉 개의 진짜 중에 하나의 가짜를 숨겨 놓았다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준비한 음모라면 무공 역시 의심해 보아야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품처럼 보이나 마지막에 꼬아 놓을 수 있어서였다.

진짜 고수가 손을 본다면 그럴 듯하게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도 특수한 약품을 사용한다면 가능했다.

“견본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하겠지.”

만천무제가 사용한 무공도 아니고 일개 수집용으로 모아 놓은 무공비급 하나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특별한 것 없는 일류무공이 말이다.

그런 상태에서 견본으로 쓸 무공비급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상황에 대해 설명해 봤자 누구도 듣지 않을 게 분명했고 말이다.

“본가가 나서면 말이 더 많아지겠지.”

눈과 귀를 닫고 오로지 욕심 하나에만 매달리는 게 현 상황이었다.

그런 만큼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진짜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약 천년마교의 음모라면 반드시 막아야 하는데···.”

제갈현은 벽우진이 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그곳이 의심되기에 망설이지 않고 온 것이었고.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로구나.”

제갈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너무나 답답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몰래 만천무제의 무덤에 들어가 조사라도 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지금만 하더라도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어서였다.

“후우.”

“클클! 고민이 많은 모양이야.”

“방주님.”

“자네도 한 잔 할 텐가?”

창문에 걸터앉은 개왕이 손에 들고 있던 호리병을 흔들었다.

하지만 제갈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차면 됩니다.”

“가끔 자네를 보면 무슨 재미로 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름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심심하지도 않은 편이고요.”

“심심함을 느끼는 것도 인생의 묘미인데 말이지.”

개왕이 엉덩이를 털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책상 가득 펼쳐져 있는 조감도를 슬쩍 쳐다봤다.

“머리가 복잡하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가 힘드네요.”

“슬슬 위험할 거야.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저렇게 사방팔방에 땅굴을 파면 무너지게 되어 있어.”

“말해도 들을까요?”

“귓등으로도 안 듣겠지.”

개왕이 피식 웃으며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독한 화주 냄새가 순식간에 차향을 집어삼켰다.

“왜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을까요.”

“의심하는 놈들은 있을 거야. 다만 놓치기가 싫었겠지. 의심하다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까. 더구나 무공비급뿐만 아니라 보물까지 있는데 어느 누가 눈이 안 돌아가겠어? 크게 필요 없는 이도 일단은 달려들고 볼 걸? 괜히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겠어?”

“으음.”

“이 문제는 우리 손을 떠났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냐. 벽 장문인이 나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오히려 역풍을 맞으면 맞았지.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건 그에 아냐.”

개왕이 두 눈을 번뜩였다.

독한 술을 마시는 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개왕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다른 것이라면?”

“왜 만천무제의 무덤을 공개했을까.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이걸 생각해야지.”

“호오.”

“지금 제갈가주는 너무 무인들에게만 집중하고 있어.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만.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냐. 큰 그림을 그리고 봐야 하는 제갈가주이니 당연히 중원무림의 전력이 약화되는 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지. 그런데 과연 그것만 노릴까? 단순무식했던 녀석들이 머리를 쓰기 시작했는데.”

제갈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머리가 따르게 회전했다.

“확실히 제가 놓치고 있었네요.”

“흘흘! 연륜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물론 나도 죽어가는 이들이 안쓰럽기는 해. 하지만 그 또한 그들의 선택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만천무제의 무덤에 들어가는 이들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를까? 전혀. 알고서 들어가는 거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러니 죽는 것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마.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니까.”

“방주님께서는 천년마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다른 곳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그건 제갈가주도 마찬가지지 않나?”

중원은 지금까지 수많은 외세의 침공을 받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달리 말하면 몇 곳은 다시 전쟁을 일으킬 여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장 유력하기는 하지요.”

“그러니 생각을 달리 해보자고. 함정은 저쪽만 파라는 법은 없잖아?”

“어?”

제갈현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역시 똑똑하다니까. 바로 알아들었네.”

“혹시?”

“아, 걱정은 하지 마. 드러난 건 나뿐이니까. 나야 원래부터 뻔질나게 돌아다녔잖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제갈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상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천년마교였다.

게다가 현재 개방에는 후개가 없는 상태였고.

때문에 제갈현이 염려가 짙게 서린 눈으로 개왕을 쳐다봤다.

“아닐 수도 있잖아? 내가 괜히 설치는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만약 진짜라면 위험합니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야. 마음먹고 알아내려고 하면 제갈가주가 본가에 없는 것도 알아냈을 텐데.”

“그렇긴 하지요.”

이곳이 제갈세가의 안가 중 한 곳이라고 하지만 마음먹고 알아내고자 한다면 못 알아낼 것도 없었다.

유동인구가 갑자기 많아졌다고 하지만 밤에는 그 많던 사람들이 대부분 사라졌기에 탐색하면 위치를 찾아내는 건 금방일 터였다.

“그리고 월척을 건지려면 그만큼 위험부담도 커지는 법이야. 위험한 장소일수록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으니까.”

“위험이 클수록 얻는 것 역시 커지기 마련이니까요. 반대의 경우도 적지는 않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고. 여기까지 왔는데 만천무제의 무덤만 구경하고 가는 건 좀 그렇잖아? 멀리 귀주성까지 왔는데.”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방도들을 생각하셔야지요.”

“안 그래도 후개 때문에 골치가 아파. 마음에 드는 녀석이 좀처럼 보이지 않네. 인재 중의 인재를 고르고 싶은데···.”

개왕이 미간을 좁혔다.

죽은 제자를 생각하면 천천히 구하고 싶지만 현재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언제 천년마교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개방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후개를 찍는다고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차분히 찾다 보면 좋은 아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벽 장문인은 2년 만에 구룡급으로 키워내지 않았나.”

“그건 특별한 경우이지 않습니까.”

제갈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어째서 후개가 정해지지 않았는지 한순간에 이해되었던 것이다.

“내 생각은 조금 달라. 준비만 제대로 된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원하겠습니다.”

“물론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제갈가주도 알다시피 우리는 그리 여유롭지가 않잖아.”

“그렇지···.”

제갈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런데 그건 개왕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익살스럽게 말하던 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개왕 역시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기!”

개왕이 부르짖듯 소리쳤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안가에서 잡일을 하던 이들의 생기(生氣)는 빠르게 사그라졌다.

갑작스러운 암습에 속절없이 죽어갔던 것이다.

“이놈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들의 기척에 제갈현이 노성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곧장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계단으로 내려갈 시간도 아까워서였다.

“감히!”

제갈현에 이어 개왕 역시 몸을 날렸다.

무인도 아닌 평범한 양민을 아무렇지 않게 도륙하는 마인들의 행태에 그 역시 흥분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개왕의 전신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평소에는 웃음 많은 옆집 거지지만 그는 엄연히 오왕 중 한 자리를 차지했던 고수였다.

< 제 81장. 꼬리.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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