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1장. 꼬리. -01 >
제갈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무인들이 말 그대로 갈려 나가고 있을 게 분명해서였다.
그게 기관진식 때문이든 아니면 사람들 때문이든 말이다.
“중재는 힘들겠지?”
“반발이 상당합니다. 아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나선다고 하면 하나로 뭉칠 가능성이 큽니다. 순순히 빼앗기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럼 혈풍이 전쟁으로 번질지도 모릅니다.”
“천년마교가 바라는 그림이겠군.”
“그 쪽 입장에서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지요.”
벽우진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아니, 마음 같아서는 저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운정 진인이 남긴 말이 화인처럼 자꾸 가슴에 남았다.
‘나도 참.’
시공간의 진에서 갓 나왔을 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벽우진은 제갈현의 부탁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아예 답신조차 보내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가 신경 쓸 것이라고는 사문의 재건과 천년마교에 복수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겸사겸사 곤륜파의 희생을 외면한 중원무림에 엿도 먹이면서.
“현재로서는 지켜보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은데.”
“으음.”
“말려도 소용없을 테니까. 말린다고 듣겠어? 저렇게 기를 쓰며 들어가는데.”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아서였다.
“해결할 방법이 없기는 하죠. 저 무덤이 가짜라면 모를까.”
“대부분은 진품이라더군. 아직 성명절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천무제가 자주 사용했던 무공들은 하나둘씩 나오는 중이니까.”
개왕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무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어떻게 보면 여기 있는 네 명 중 강호의 냉혹함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이가 바로 그였다.
힘없는 자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나 할까.
“일단은 추이를 지켜보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은 떠난 것 같으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끼어들면 말이 더 많아질 겁니다.”
“그렇겠지.”
사람의 이기심에 대해서는 이미 치가 떨리도록 느껴본 적이 있었기에 벽우진은 몸을 돌렸다.
만천무제의 무덤을 직접 봤으니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똑똑똑.
씻고 나오기 무섭게 서진후가 찾아왔다.
수건으로 머리카락도 다 말리지 못했는데 말이다.
“뭘 이렇게 일찍 찾아와?”
“보고 드릴 게 있어서요.”
“급한 일이야?”
“사형께서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뭔데?”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벽우진이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서진후가 냉큼 앞에 착석했다.
“석창후가 만천무제의 무덤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것도 상당한 인원을 데리고서요.”
“둘째 아냐?”
“맞습니다.”
“그 녀석은 무공에 딱히 관심이 없다며? 호신 수준으로만 대충 익혔다고 들은 것 같은데.”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이 나타난 석창후도 석창후지만 만천무제의 무덤에 들어갔다고 하자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무공에 원래부터 관심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벽우진이 알기로 석창후는 무공에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무슨 바람인지는 모르겠는데 귀주성에 상행을 왔다가 장보도의 소식을 듣고는 철저하게 준비한 후에 만천무제의 무덤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정후가 좋아하겠는데.”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빠졌다고 하지만 난다 긴다 하는 군소방파들도 떼로 들어갔는데 석가장이 그 아귀다툼에서 버틸 수 있을까? 더구나 혈족도 무공비급 앞에 눈이 돌아가는 마당에?”
서진후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욕심은 석창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호위무사들은 물론이고 인부들 역시 한 몫을 노릴 터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그러니까. 지금 돈이 눈에 들어오겠어? 만천무제의 무공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에 명문세가와 대문파까지 합세한다면 진짜 중원무림이 뒤집어지겠는데요.”
“그렇겠지.”
벽우진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걱정은 되지만 그렇다고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결국은 각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은 무인에게 있어 당연한 것이기도 했고.
“만약 사형의 우려대로 천년마교의 소행이라면 진짜 머리를 잘 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천년마교의 방식은 아니지.”
“사형께서 지난번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교주의 성향에 따라 천년마교의 방식 역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요.”
“맞아. 그래서 내가 직접 온 것이기도 하고. 근데 아직까지는 느껴지는 게 없네.”
“제가 천년마교라면 최대한 많은 이들을 끌어 모은 다음에 매몰시킬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죄다 들어간 후에 말이죠.”
서진후가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기에 한 소리였다.
적어도 곤륜파와 제갈세가, 개방은 만천무제의 무덤에 욕심이 없었으니까.
“우연의 일치로 만천무제의 무덤이 발견된 것일 수도 있고.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니까.”
“제갈가주도 반반이라고 했었죠.”
“근데 우리가 온 게 알려지면 지금보다 더한 인파가 몰려들 수도 있어.”
“그렇겠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 눈에 훤했다.
그렇기에 서진후는 몸을 떨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숫자인데 여기에서 더 늘어난다고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정작 우리가 온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인데.”
“겸사겸사 보러 오신 거잖아요.”
“흔한 기회는 아니니까. 근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수많은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점칠 되어 있던 이름 없는 산을 떠올리며 벽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있는 숙소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워낙에 활화산처럼 분출되고 있기에 느끼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욕심은 본능이지 않습니까. 다만 범인들조차 이리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네 말마따나 얻기만 한다면 인생역전이 가능하니까. 근데 문제는 그로 인해 정작 마교도들의 꼬리를 잡을 수 없다는 거지.”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멀고 먼 청해성에서 여기 귀주성까지 온 건 만천무제의 무덤 때문이 아니었다.
덧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는 해도 그뿐이었다.
어차피 선택은 개인이 하는 것이었고, 책임 역시 본인이 지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벽우진이 이곳까지 온 것은 혹시나 천년마교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오고 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뭘 찾거나 조사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알아보니 야심한 시각에도 끊임없이 사람들이 무덤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을씨년스럽잖아. 죄다 몰려가서.”
“낮에는 너무 많아서, 지금은 너무 없어서 조사하는데 애를 먹는 상황입니다.”
서진후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힘들 거라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서진후가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애초에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잖아. 마음 편히 먹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 본 것이니까.”
“사형도 따로 느껴지시는 건 없으시죠?”
“응. 워낙에 주변의 기운이 산만해서 뭘 느끼고 파악할 새가 없네. 하도 출렁거리니.”
“이번에도 허탕인가요.”
“아직은 모르지. 이제 왔는데. 그래도 한 이삼 일 정도는 있어 봐야 하지 않겠어?”
벽우진이 묘한 눈빛을 흘리며 대답했다.
만약 정말 만천무제가 천년마교의 음모라면 분명히 반응을 보일 터였다.
자신과 서진후야 은밀히 움직였다고 하지만 제갈현과 개왕의 행적에 대해서는 마음만 먹는다면 파악이 가능할 테니까.
‘연관이 없다면 별 수 없는 거고.’
애초에 일말의 가능성을 가지고 출발한 귀주행이었다.
그런 만큼 벽우진은 마음을 편히 먹었다.
이번이 아니어도 기회는 많으니까.
“시간이 많으면 나야 좋지.”
“예?”
“혼잣말이야. 그리고 너도 이제 그만 쉬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쉴 때 푹 쉬어둬야지 또 바쁘게 움직이지.”
“알겠습니다.”
벽우진의 축객령 아닌 축객령에 서진후가 머리를 꾸벅 숙인 후 방을 나섰다.
그러나 서진후가 나갔음에도 벽우진은 좀처럼 침상에 몸을 눕지 않았다.
어둠이 짙게 내린 장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3층에서 중년인이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앞으로 부복한 남자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안개가 일렁이더니 어느 순간 흑의복면인으로 화했던 것이다.
“알아보라고 한 것은?”
“구절서생은 본가에 없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개왕은 현재 육반수에 있습니다.”
“만났을 가능성이 크겠군. 곤륜파 쪽은?”
“죄송합니다. 아직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부복해 있던 흑의복면인이 머리를 바닥에 댔다.
변명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흑의복면인의 사죄에도 중년인은 별다른 타박을 하지 않았다.
“그만한 무인의 행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리 풀 죽을 것 없다. 애초에 파악될 인물이었으면 진즉에 처리했겠지. 특별한 사항은?”
“늘 똑같은 일과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도가문파 아니랄까봐 참 재미없게 사는군.”
중년인이 혀를 찼다.
패선은 좀 특이하다고 들었는데 막상 안을 까보면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현재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 곧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서두르도록. 만약 와 있다면 흔치 않은 기회이니까. 그나저나 개왕은 운이 좋군.”
“개왕의 위치는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습니다.”
“꼬리 안 잡히게 조심하고. 그래도 개방주인데 추적을 못 느낄까.”
“명심하겠습니다.”
흑의복면인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의 음성에는 지금까지와 달리 자신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마치 개방주 정도에게는 들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자만하지 마라. 개왕은 고작해야 중원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갈까 말까 하는 정도이니까. 그 윗줄은 좀 다를 거다.”
“···예.”
“생각도 하지 말고. 너흰 그저 시키는 것만 제대로 하면 된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
딱 그 정도만 기대한다는 중년인의 말에 흑의복면인은 말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에도 중년인은 몸을 돌려 창밖의 달을 올려다봤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움직임은?”
“없습니다.”
“비밀리에 인원을 파견했을 가능성은?”
“적어도 만천무제의 무덤 인근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인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흐음.”
한손에는 찻잔을 든 채로 중년인이 침음을 흘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나름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준비해 두었는데 아직도 반응이 없는 게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별히 신경 써서 이중으로 준비까지 해두었는데 말이다.
“하후세가와 산동악가는 비밀리에 조사대를 파견했습니다.”
“열손가락 안에 들까 말까 하는 무가들 따위.”
중년인이 코웃음 쳤다.
오대세가도 아닌 다른 가문들은 안중에도 없어서였다.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나가 봐.”
중년인의 축객령에 흑의복면인이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중년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향해 있었다.
“최소 무당권제나 제왕검 정도는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군.”
< 제 81장. 꼬리.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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