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60화 (260/325)

< 제 80장. 장보도(藏寶圖). -03 >

‘이것만 익히면 나도 절정고수가 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만천무제의 알려지지 않은 비학이라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를 지도!’

사내의 두 눈이 탐욕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전신에 상처가 가득했기에 출혈이 적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사내는 지치지 않았다.

탄극지를 익혀 절대고수가 되어 무림을 호령하는 상상만 해도 두 다리에 힘이 불끈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 전에 저 놈들부터 떨어뜨려놔야지.’

하루 전까지만 해도 형님형님 하던 사이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욕심에 눈이 먼 짐승들에 불과했다.

정말로 자신을 위한다면 순순히 양보하는 게 옳았다.

수많은 기관을 뚫고서 탄극지를 찾은 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상승무공 앞에는 가족도, 형제도 없다고 하더니만.’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그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형님이라 모시고 따르던 이들의 눈빛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을 말이다.

또한 서슴없이 자신의 몸에 칼을 찔러 넣기도 했다.

“멈추지 못하겠느냐!”

다시 한 번 등 뒤에서 노성이 들려왔지만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공력을 끌어 올리며 산속으로 도망쳤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다섯 명을 떨쳐낼 작정인 듯싶었다.

그리고 그런 광경은 육반수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쯧쯧. 머저리들. 고작해야 외곽 쪽에 있는 무공에 저 지랄들이라니.”

“저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모아 놓은 무공 중의 하품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만천무제의 눈에 든 무공이지 않습니까. 못해도 절정무공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작 절정무공 가지고.”

적당히 탄 피부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청년이 혀를 찼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이 그에게는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져서였다.

“원래 없는 것들이 저러는 법이지요. 절정무공서를 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몸이 달아올랐겠습니까.”

“하긴.”

염소수염 노인의 말에 청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이야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절정무공도 엄청나게 귀할 터였다.

“그러니 하품들은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주고 이 공자님께서는 상품과 최상품을 노리시지요. 그래야 이 공자님의 격에 맞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해체가 되었지?”

“소인이 은밀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제 3할 정도를 뚫었다고 합니다. 이게 늦은 소식이라고 하더라도 많이 잡아야 절반일 겁니다.”

“서둘러야겠군.”

이 공자라 불린 청년, 석창후가 미간을 좁혔다.

완벽하게 준비한다고 시간을 살짝 지체한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그를 보필하던 종복 요승은 콧구멍을 씰룩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 공자님. 어중간하게 준비해서 들어가는 것보다 확실하게 준비하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일단 들어가면 보급이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잡부들을 죄다 끌어 모았잖아.”

석창후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기관을 해제할 전문가들도 상당했지만 무인들과 인부들의 숫자도 많았다.

만천무제의 무덤을 제대로 털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그로 인해 지출이 상당했지만 석창후가 지금까지 모은 자금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금액이었다.

‘제대로 털어먹을 수만 있다면야.’

형이 책상에서 주로 일을 하는 관리감독형이라면 그는 현장파였다.

직접 발로 뛰는 성격이었는데 그러다가 장보도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운 좋게 귀주성에서 본가로 복귀하던 중에 장보도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에게 패선이 붙었다면 난 내가 직접 패선이 된다. 아니면 무가(武家)를 일으키는 것도 나쁘지 않지.’

평범한 무인의 무덤이었다면 이런 계획은 꿈도 꾸지 못하겠지만 주인이 다름 아닌 만천무제였다.

무공광이자 수집광으로도 유명한

그렇기에 석창후는 큰 그림을 그렸다.

‘꼭 석가장일 필요는 없으니까. 무력을 손에 쥔 다음에 금력을 손에 쥐면 될 일이지.’

지금까지 그의 목표는 석가장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중원상계를 쥐락펴락 하는 거물이 되는 게 얼마 전까지의 목표였었다.

하지만 새로운 선택지가 나타났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잖아?’

금력은 분명 강력한 힘이지만 한계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금력에 이어 무력마저 손에 넣는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부친인 석가장주보다 더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직접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 석가장주가 내게 머리를 조아리도록 말이야.’

석가장주가 된 형이 자신에게 오체투지 하는 걸 떠올리며 석창후가 키득거렸다.

상상만 해도 온몸에 희열이 솟구쳤던 것이다.

‘겸사겸사 셋째에게도 현실을 가르쳐주고 말이지.’

자신이 만천무제의 진전을 이어 천하제일인이 된다면 패선도, 구파일방도, 오대세가도 전부 발아래 놓일 터였다.

그걸 생각하자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가시지요, 이 공자님.”

“그래.”

혼자만의 상상이 길었던 것일까.

요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늦지는 않았지만 더 지체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이윽고 석창후와 요승을 위시로 수십 명의 인원이 비밀리에 뚫은 입구로 이동했다.

귀주성에 피바람이 불었다.

암암리에 전해지던 소문이 결국 태풍이 되어 중원을 휩쓸었고, 그 결과 수천, 수만 명의 무인들이 일확천금과 인생역전의 꿈을 안고 귀주성 육반수를 찾았다.

강호를 떠도는 낭인들은 물론이고 중소문파의 무인들, 심지어 대문파의 제자들 역시 은밀히 만천무제의 무덤을 찾았다.

그로 인해 육반수는 하루가 멀게 혈풍이 불었다.

“개미지옥이로군.”

“그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상황입니다.”

제갈현의 부탁으로 육반수에 도착한 벽우진이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육반수에 오면서 서진후에게 매일 보고를 받았지만 실제로 보니 보고서보다 더한 것 같았다.

분명 수백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도 사람들은 부나방처럼 만천무제의 무덤으로 들어갔다.

“다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 제가 저들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저 역시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강호에서 약자로 사는 건 너무나 서러우니까요.”

“선택은 각자의 몫이니까.”

하수에게 강호는 너무나 냉혹한 세계였다.

괜히 비정강호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거는 도박이 옳은 건 아니었다.

“운 좋게 무공비급을 가지고 나온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그런 이들만 노리는 추격꾼도 많습니다.”

“되레 죽는 놈들도 많겠군.”

“예. 하지만 기관과 함정에 당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확실한 물건이 있는 상대를 노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런데 도굴꾼들을 고용해서 따로 땅굴을 파 들어가는 이들도 많다는데 어떻게 안 무너지는 거야?”

벽우진의 시선이 산을 크게 훑었다.

대부분은 공개된 출입구로 들어가지만 몇몇은 따로 출입구를 만든다고 들었다.

만천무제의 무구들과 무공비급을 안전하게 빼돌리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 정도로 규모와 인력을 투입하는 이는 적었지만 중요한 그런 이들이 꽤 있다는 사실이다.

“무덤의 규모가 크기에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저기 저 산 전체는 물론이고 지하까지도 무덤이라고 합니다.”

“그걸 혼자서 어떻게 만들었을까?”

벽우진의 말에 제갈현은 말문이 막혔다.

안 그래도 그 역시 그 부분이 의문스러워서였다.

“저도 그 부분이 의심스러워서 조사하는 중인데 현재까지 알아낸 바에 의하면 만천무제는 기관진식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무명이 알려졌을 즈음부터 자신의 무덤을 계획했다는 말도 있고요.”

“그건 맞아. 장난기도 많은 성격이었다고 하더군.”

“방주님.”

벽우진과 서진후, 제갈현의 곁으로 개왕이 다가왔다.

의족이 있음에도 지팡이를 지고서 올라온 개왕은 벽우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주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상황이 심각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사천성에서, 운남성에서, 광서성과 호남성에서도 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명문세가 역시 움직였고요. 이제는 확실히 만천무제의 무덤인 게 밝혀졌으니까요.”

“더 많아질 것이다?”

“예.”

개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가능성은 적었다.

“엄청나게 죽어나가겠군.”

“어쩌면 그걸 노린 걸지도 모릅니다.”

“만천무제가?”

“예. 방금 전에도 잠깐 말씀드렸었는데 만천무제는 살아생전에 장난꾸러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수집욕 많은 괴짜라고 불렸답니다.”

“음.”

벽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만 표정이었다.

“보물에는 죄가 없다, 인가요.”

“맞아. 개미지옥이 되었지만 저건 만천무제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야. 자신의 물건을 지키기 위해 기관과 함정을 설치한 거니까. 오히려 무인들이 도굴꾼이나 다름없지.”

벽우진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제갈현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만천무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확실히 개왕의 말이 맞았다.

조용히 잠들어 있던 만천무제를 깨운 건 무인들이었다.

“도굴꾼이라. 딱 들어맞는 표현이군.”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러 들어간 만큼 죽어도 할 말은 없지요.”

“죽어간 숫자를 보면 만천무제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에게는 잘잘못을 따질 수가 없지.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니.”

“맞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기관이야 언젠가는 해체가 된다지만 그 이후가 문제입니다.”

제갈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인원도 인원이지만 제아무리 대단한 기관도 관리를 제대로 해주지 못하면 세월에 마모되기 마련이었다.

즉 언젠가는 모든 기관과 함정들이 파괴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후였다.

“자기네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겠지. 서로가 좀 더 갖겠다고 말이야. 아니면 독식하거나.”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한 피바람이 불지도 모릅니다.”

상승무공에 대한 무인들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수건 고수건 상승무학에 집착하는 건 똑같았다.

고수는 더 나은 경지를 위해서, 하수는 고수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러한 조짐은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알아서 정리될 때까지 지켜보고 싶지만 왠지 모르게 느낌이 안 좋아서 말이지. 께름칙하다고나 할까.”

“천년마교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저는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천년마교라면 욕심을 낼 필요가 없지. 본교의 무공에 자부심이 대단한 족속들이니. 애초에 만천무제의 무공이 마공이 아니기도 하고.”

개왕 역시 벽우진, 제갈현과 같은 생각이었다.

시기적으로 너무나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면 필사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전부 다 사본을 만들 필요는 없지만 성명절기나 말년에 남긴 깨달음은 충분히 빼돌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장보도의 출처에 대해서는 알아봤어?”

“시작은 도둑과 도굴꾼 두 명이었습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천년마교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녀석들이었고요. 그리고 현재 둘 다 사망했습니다.”

“단순한 비약이었으면 좋겠지만.”

벽우진의 시선이 여전히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렬로 향했다.

서로가 서로를 살펴보는 눈빛들이 심상치 않았다.

계기만 있다면 당장 칼부림을 할 듯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이미 곳곳에서는 충돌이 벌어졌는지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일단 주변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진짜 천년마교의 음모라면 어디선가 분명히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미 불은 붙었고, 굳이 주시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소식이야 인근 마을에서도 충분히 들을 수 있으니.”

< 제 80장. 장보도(藏寶圖). -03 > 끝

ⓒ 윤신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