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0장. 장보도(藏寶圖). -02 >
“어, 들어와.”
이미 기척을 느끼고 있었기에 벽우진은 곧바로 대답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단정한 차림의 서진후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공부 중이셨습니까?”
“응. 근데 어렵네. 내가 이쪽 머리는 없나 봐.”
“계속 읽고 궁리하다 보면 이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연습도 많이 하면 성취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미 무공으로는 일가를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 녀석은 아닌가봐. 나를 좀 더 골탕 먹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벽우진이 들고 있던 비급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가 펼치고 있던 부분은 중간도 아닌 앞부분이었다.
“원래 그쪽 분야가 좀 어렵지 않습니까. 쉬웠으면 제갈세가가 지금의 성세를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긴 한데. 좀 답답하네.”
“시간은 많지 않습니까. 대호법님이라면 모를까 사형은 아직 남아 있는 세월이 창창한데요.”
“놀리는 거냐?”
“그럴 리가요.”
서진후가 웃으며 고개를 으쓱거렸다.
놀리기보다는 부러워서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문안인사도 드릴 겸 보고할 게 있어서요.”
“이제는 나이도 적지 않은데 문안인사는 무슨. 우리 편하게 가자, 편하게. 밥 먹을 때도 보는데.”
벽우진이 이제 그만 좀 하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창가에 있던 쟁반이 저절로 떠올라 책상으로 날아왔다.
허공섭물로 벽우진이 이동시킨 것이었다.
“그래도 문안인사는 드려야지요. 예전에 못한 것만큼 말이죠.”
“적당히 해. 너도 바쁠 텐데.”
“이제는 애들이 적응이 돼서 크게 바쁜 건 없습니다. 역할분담이 잘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래?”
벽우진이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새삼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는 걸 느꼈다.
“이건 진짜 부러운 것 같습니다.”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쉬워. 공력을 세밀하게 움직이는 거니까.”
“해봤는데 좀처럼 늘지가 않더라고요.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모든 걸 나이 탓으로 돌리지 마. 아직 한창이 녀석이.”
벽우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진짜 나이 많은 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사형은 육체적 나이는 이십대이지 않습니까.”
“너도 비천단으로 거의 전성기 때로 돌아갔잖아. 그러면서 약한 소리는.”
“그래도 사형에 비할 바는 아니죠.”
뜨끈한 차를 들이켜며 서진후가 빙그레 웃었다.
아무리 그가 회춘했어도 벽우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럼 너도 환골탈태하지 그랬어.”
“안타깝게도 제 역량이 부족해서.”
“시답잖은 소리는 이쯤하고.”
“일수는 석가장에 잘 도착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소식을 전해오는데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간 보는 중이겠지. 이제는 마음대로 해도 되는 셋째가 아니라 패선을 뒤에 둔 경쟁자니까.”
석가장의 소식에도 벽우진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어련히 도일수가 알아서 잘 할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이제는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수준이 아니기도 했고.
“머지않아 움직일 겁니다. 급한 쪽이 먼저 말이죠.”
“잡아먹히지 않겠다고 자신했으니 믿어 봐야지. 난 그것보다 정후가 수련을 제대로 하고 있는 지가 궁금한데.”
“안 그래도 따로 챙겨 왔습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제법 두꺼운 종이뭉치를 쳐다보며 벽우진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한두 장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아서였다.
“혼자 가니 외로웠던 모양인지 내용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쓸모없는 내용이 있는 건 또 아닙니다.”
“어디 보자.”
예상했던 것보다 양은 많았지만 그래도 제자가 정성스레 써서 보낸 것이기에 벽우진은 투덜거리면서도 하나하나 전부 다 읽었다.
이제는 나름 속독이 되기에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석정후의 등장이 나름 큰 파문이 된 것 같습니다.”
“틈새시장이라.”
“머리가 똑똑한 아이 같습니다.”
“영리함과 교활함의 사이에 있다고나 할까.”
“당돌하면서도 계산이 빠른 것 같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들은 얘기는 많았다.
하물며 현재 제자 중 한 명이 은밀히 석정후를 지원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작 석정후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도일수만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열셋에 형들 잡아먹겠다고 나섰겠지.”
“아직은 지지기반이 부족하지만, 그렇기에 빠르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중립적인 위치에 있던 이들 위주로 흡수해서 세를 키우는 중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때려눕힌 다음에 흡수하는 건데.”
“그러기에는 피차 나서기가 쉽지 않은 상태죠. 서로 지켜보는 중이랄까요.”
하북성과는 거리가 상당함에도 서진후는 석가장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제자가 말해주는 것도 있지만 비청단을 이용해 듣는 것도 많아서였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서 승산이 아예 없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동료로 석가장은 나쁘지 않지.’
안 그래도 상계의 텃세 아닌 텃세로 다른 성에서 자리를 잡기가 힘겨웠던 청하상단이었다.
그런데 석가장이 나서준다면 그 문제는 단박에 해결되었다.
물론 아직 석정후의 영향력이 크지는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석가장의 셋째였다.
거기다 벽우진이라는 존재를 뒷배에 두었기에 앞으로는 상황이 많이 달라질 터였다.
“잘 하겠지. 정후도 보통은 아니니.”
“두 형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둘째의 수완이 상당해서 쉽지 않은 대결이 될 것 같습니다.”
“한두 해에 해결되지는 않을 거야.”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보고할 게 있는데, 이게 좀 이상합니다.”
서진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귀주성 육반수(六盘水)에서 이상한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상한 소문?”
“예. 200년 전 천하제일인이었던 만천무제(萬千武帝)의 무덤이 육반수에 나타났다는 소문입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고 추정이긴 합니다만 만천무제의 고향이 귀주성인 걸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있습니다.”
“난리 났겠는데? 가짜라도 일단 가는 사람들이 있을 거 아냐.”
벽우진이 미간을 좁혔다.
평범한 무인도 아니고 한 시대를 평정했던 무인의 무덤이었다.
가짜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일단 가보자하는 이들이 많을 건 자명했다.
“맞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만약 진짜라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는 기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현재 귀주성으로 어마어마한 인원이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삼류무사, 이류무사는 물론이고 군소방파의 수장들도 조사대를 투입하고 있다 합니다.”
“흐음.”
“만약 진짜 만천무제의 무덤이라면 말 그대로 보물이니까요. 알려지기로 만천무제는 별호 그대로 온갖 무공들을 익힌 천재라고 합니다. 또한 병기에도 욕심이 많아 죽기 직전까지도 수많은 병장기들을 수집했다고 하니 무인들의 눈이 돌아갈 수밖에요.”
벽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어서였다.
이상할 정도로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듯한 느낌이랄까.
“사형?”
“귀주성이라고?”
“예. 정확하게는 귀주성 육반수라고 그리 유명한 지역은 아닙니다. 특별히 대단한 문파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서진후가 머릿속에 있던 정보를 줄줄이 꺼내듯이 입을 열었다.
수상하기는 하지만 원래 무림이라는 곳에는 온갖 소문들이 난무했다.
백 년 전 천하십대고수, 삼백년 전 천하제이인 등등, 별의 별 무인들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문들이 난무하기에 서진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부분이 거짓이거나 가짜이기에 이번 역시 그럴 거라 예상했던 것이다.
“아니라고 해도 문제지만 만약 진짜라면 일이 엄청 커지겠는데.”
“아무래도 그렇겠죠. 진신절기뿐만 아니라 최상승의 무학들이 수백 개나 될 테니까요. 게다가 평생 동안 모은 병장기들까지 있다면. 근데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알게 된 정보야?”
“이레 전쯤에 귀주성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장보도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청단이 파악했을 정도면 이미 그 전부터 암암리에 소문이 났다는 뜻이겠지요. 그 장보도가 만천무제의 장보도라는 게 밝혀진 것은 삼 일 전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그 전에 알려졌을 겁니다.”
“하오문의 반응은 어때?”
상승무공이 절실한 건 하오문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천하의 모든 정보에 밝은 곳이 하오문이었고.
“신뢰도는 낮지만 그럼에도 움직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열 개 중에 아홉 개는 가짜지만 그래도 하나는 진짜인 경우가 있으니까요.”
“흠.”
“왜 그러십니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서진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표정이 심상치가 않아서였다.
“왠지 모르게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묘하다고요?”
“응. 왜 하필 이 시기일까. 천하무림 비무대회가 끝나기 직전에.”
비청단이 안 것은 이레 전이지만 그 전부터 육반수를 중심으로 암암리에 소문이 퍼졌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의심이 들었다.
시기가 너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 역시 의심이 되기는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준비했다면? 힘을 비축한 건 중원만이 아니야. 더구나 천년마교 입장에서는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없지.”
“···그렇죠.”
서진후의 얼굴도 굳어졌다.
북해빙궁과 오독문, 거기에 대막에서의 일까지.
천하무림 비무대회로 중원무림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지만, 그렇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었을 터였다.
“일부러 청해성이나 사천성이 아닌 귀주성을 노린 것일 수도 있어.”
“확실히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조사해보겠습니다.”
“귀주성에 인력을 집중해 봐. 개방에 협조 요청하고.”
“개방에서도 알고는 있을 겁니다. 이미 어느 정도 조사가 된 상태일 테고요.”
“그건 몰라. 후개 찾는다고 개왕이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이런 쪽으로는 개방보다 하오문이 효과적이었다.
뒤가 켕기는 녀석들일수록 은밀하게 움직일 테니까.
그렇기에 개방보다는 하오문이 나았지만 중요한 건 신뢰도였다.
때문에 벽우진은 하오문이 아닌 개방을 택했다.
“일단 비청단을 이용해서 정보를 모아보겠습니다. 청하상단과 비호표국도 있으니 시일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느낌이 썩 좋지 않아. 그러니 서둘러.”
“예.”
서진후가 남아 있던 차를 한 번에 들이켜고는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툭툭.
잠시 후 서진후가 나가고 벽우진이 홀로 집무실에 남아 손가락을 두드렸다.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너무 조용했지. 불안할 정도로 말이야.”
중원무림이 늘 천년마교를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천년마교 역시 중원무림의 움직임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 움직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확인해서 나쁠 것은 없지.”
귀주성에 대한 내용을 머리에서 지우며 벽우진은 내려놓았던 비급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육반수 인근에서 난데없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피투성이의 사내 하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멈추는 게 어때?!”
“비급을 넘기기만 한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약속하겠다!”
“흥!”
뒤따르는 다섯 명의 남자들이 타협하자는 듯이 소리쳤다.
하지만 도망치는 사내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저렇게 말하지만 막상 자신을 잡으면 다짜고짜 팔다리부터 자를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누굴 호구로 아나!’
지금은 쫓기는 자와 쫓는 자로 나뉘었지만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그들은 의형제 사이였다.
그러나 만천무제의 무덤에서 탄극지(彈隙指)를 얻은 순간 모든 게 변했다.
친혈육처럼 사이가 좋았던 이들이 지금은 욕심에 눈이 멀어 서로가 서로에게 검을 들이댔던 것이다.
< 제 80장. 장보도(藏寶圖).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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