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0장. 장보도(藏寶圖). -01 >
연진청이 활짝 핀 얼굴로 대답했다.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말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보기에는 그래.”
“즐거워하시는 걸 보니 다행이네요. 진짜 걱정했는데.”
“왜? 내가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죽을 날이 머지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좀 돌아다닌다고 쓰러질 정도로 몸이 약하진 않아.”
연진청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손가락을 휘휘 흔들며 말했다.
걱정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제 입장에서는 사부님이 건강하게, 더 오래오래 함께 해주셨으면 하니까요.”
“걱정 마. 시집가는 것까지는 보고 갈게. 자식은 좀 힘들겠다.”
“또 그 말씀하신다.”
“그보다 어때? 네가 본 곤륜산은?”
낙양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좋아진 얼굴로 연진청이 물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몇 년은 젊어진 듯한 얼굴로 말이다.
“좋아요.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좋고. 너무 북적북적 거리지 않는 것도 좋아요.”
“차차 늘어날 거야. 벽 동생이 있는 동안은.”
“당사자가 없다고 너무 편하게 부르는 거 아니에요?”
“뭐 어때. 자기도 괜찮다는데. 우리끼리 있을 때만 그러는 건데.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나도 꼬박꼬박 장문인이라고 한다고.”
연진청이 투덜거렸다.
사소한 걸로 너무 꼬투리를 잡는 것 같아서였다.
원래 깐깐한 성격이라는 건 알았지만 요즘 더 하는 것 같았다.
“다 사부님한테 배운 거예요.”
“이제는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그런 거 아닌 거 아시잖아요.”
“아니긴. 난 이제 네가 지그시 쳐다보는 것도 무서워. 무슨 말을 꺼낼지 겁난다고나 할까.”
현주혜가 대답 대신 실소를 흘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근데 재미있지 않니? 오라버니들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진짜 용담호혈이에요.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괜히 북해빙궁이 박살난 게 아닌 거 같아. 벽 동생이랑 오라버니들 실력이면. 근데 북해빙궁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쳐들어 왔을까?”
“제대로 몰라서 그랬겠죠. 알았으면 왔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겠다.”
북해빙궁이 남진했을 때 곤륜파는 막 다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호법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의 실력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몰락했던 곤륜파가 다시 일어서는 정도로만 알려졌었다.
“모르면 용감하다잖아요.”
“맞아. 그리고 그 용감한 아이들이 여기에도 있고 말이지. 후후후. 내 눈에는 귀엽기 그지없지만.”
“세 명이요?”
“응. 어떻게든 널 따라잡겠다고 아등바등 대고 있잖아. 아직 한참 멀었는데.”
현주혜가 피식 웃었다.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귀엽긴 하더라고요. 당돌하기도 하고.”
“다 사부를 생각해서 그런 거지. 그리고 목표는 분명할수록 좋기도 하고.”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 따라잡히지 않을 거예요. 그럴 자신도 있고요.”
“예지는 경계해야겠던데? 애가 아주 독해. 생긴 거답지 않게. 아니. 너랑 비슷하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네.”
현주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러나 한두 번 이러는 것이 아니기에 연진청은 그저 웃어 넘겼다.
“그래도 막상 오니까 재미있지? 개안도 되고. 지금의 너에게 이곳만큼 도움이 되는 곳은 없을 거야. 천하의 소림사나 무당파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쫙쫙! 알겠지? 다른 것도 확확!”
연진청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마지막은 모르겠네요.”
“뭘 몰라. 다 알면서. 나야 어쩔 수 없이 아직까지 수궁사를 가지고 있지만 넌 안 그랬으면 좋겠어. 아끼면 똥 된다는 말, 알고 있지?”
“사부님.”
현주혜의 얼굴이 붉어졌다.
수궁사도 수궁사지만 난데없는 똥 얘기에 당황한 것이었다.
“꼭 벽 동생일 필요는 없어. 근데 내가 보기에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게 벽 동생 같아. 웬만한 남자가 네 눈에 차겠니?”
연진청이 혀를 찼다.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었다.
그렇기에 사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근데 딱히 싫은 기색을 안 띤단 말이지. 그건 곧 기준은 넘었다는 소리고.’
연진청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지금까지와는 반응이 사뭇 다르다는 걸 그녀는 단박에 알아챈 것이다.
“장문인께서 생각이 없는 거 같은데요.”
“너도 알잖아. 곤륜파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는 걸.”
“아시는 분이 왜 자꾸 그러세요. 이제 그만하세요.”
“근데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하더라고. 식당에서 일하는 동생이. 결혼해서 자식까지 있는 동생이니 우리보다 많이 알지 않겠어? 우리는 알지 못하는 세계를 알고 있는데.”
“사부님.”
현주혜가 지쳤다는 듯이 연진청을 불렀다.
그러나 한 번 봇물이 터진 연진청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던 것이다.
‘하아.’
수다와 잔소리가 합쳐져 있는 말들에 현주혜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녀라고 어찌 연진청의 마음을 모를까.
하지만 연인관계는 혼자만 좋아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편하긴 하지만, 글쎄.’
벽우진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나이답지 않은 외모 또한 자신에게 잘 어울리기도 했고.
그러나 남자로 느껴지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편하고 재미있기는 하지만.’
무인으로서, 그리고 검객으로서 벽우진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녀가 닮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또한 대화 역시 잘 통했다.
둘 다 무공에 미쳐 있었던 시절이 있기에 단둘이 있어도 어색하거나 불편한 건 전혀 없었다.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현주혜가 연진청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연진청의 마음을 알겠지만 그녀의 바람이 이뤄질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희박해서였다.
‘그래도 좀 신기하기는 하네. 아무리 도인이라지만 남자가 아닌 것은 아닌데.’
색계를 범하면 안 되는 땡중도 많이 봤지만 그 못지않게 자주 본 게 바로 말코도사였다.
그런데 벽우진은 이상하게 도인 같지 않으면서도 도인 같았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네. 잘 듣고 있어요.”
“흘려듣는 거 같은데.”
“산책하러 가실래요? 목장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목장?”
연진청이 눈을 반짝였다.
목장에 대한 얘기는 못 들은 듯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 모습에 현주혜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소랑 말, 양, 돼지, 닭 등 상당히 많이 키우는 모양이더라고요.”
“길은 알아?”
“혁문이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소혜랑 둘이서 가장 많이 신경 쓰는 것 같은데.”
연진청이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축을 못 본 것은 아니었지만 곤륜파에서 직접 관리한다는 말에 호기심이 동한 것이었다.
이윽고 둘은 나란히 처소를 나섰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서류들을 모두 확인한 벽우진이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로 몸을 까딱거렸다.
네 다리의 의자 중 뒷부분의 두 개에만 체중을 싣고서 흔들의자에 앉은 것처럼 몸을 흔들었던 것이다.
“아, 머리 아프네. 역시 무공머리하고 기문진법 머리하고는 다른 건가?”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벽우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 거렸다.
며칠 동안 공부했는데도 영 진척이 없어서였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네.”
다리를 이용해서 의자를 흔들던 벽우진이 미간을 좁히며 손에 든 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분명 무슨 글인지 읽을 수는 있는데 이상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누런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이로다.”
읽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 설명에 벽우진의 미간 골이 점점 더 깊어졌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이해되지 않는 게 이해될 리는 없었다.
“나만 당할 수는 없는데. 나도 시조님처럼 꼭 만들어야 하는데.”
벽우진이 기문진법 책을 보고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본인이 당했던 것처럼 시공간의 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내용은 머릿속에 다 각인되어 있지만 그래도 떠올리는 것보다는 보는 게 편하기에 책을 읽고 있는데 진척은 별로 없었다.
“흠흠! 만약의 사태도 대비할 겸 말이지.”
혼자만 있는 집무실이었지만 벽우진은 마치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스스로 말하고도 살짝 민망했던 것이다.
“일단 만들어만 둔다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후인은 키울 수 있을 테니까. 그 후인이 곤륜파를 다시 일으켜 세울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이번에야 운 좋게 자신이 들어갔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만약 곤륜파의 제자들이 싹 다 죽었다면 곤륜파와도 상관이 없는 이가 시공간의 진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것 또한 운명이니까.
대비는 할 수 있지만 미래를 확정지을 수는 없었다.
“근데 진전이 전혀 없으니.”
제갈현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기본적인 것이야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심도 깊은 부분은 아무래도 비전과 관련이 있기에 제갈현으로서 자세히 알려주기가 힘들었다.
제갈세가와 곤륜파와의 체계가 살짝 다르기도 했고 말이다.
“선기를 이용하는 건 알겠는데 문제는 이걸 어떻게 구현하느냐지. 누가 한 번 보여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기문진을 펼칠 재료는 모두 갖춰져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걸 어떻게 펼치느냐였다.
기본적인 지식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을 하려다보니 앞이 막막했다.
삼재검을 갓 뗀 아이에게 소청검을 완벽하게 펼쳐 보이라고 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머리로는 아는데 몸으로는 펼칠 수가 없는, 그런 답답함을 오랜만에 느끼며 벽우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쓸 수만 있다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머리 아픈 건 질색인 벽우진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만 당할 수는 없어서였다.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무공은 참 쉬운데···.”
벽우진의 시선이 책상의 한쪽으로 향했다.
이번에 새로 고안해서 만든, 어떻게 보면 그의 정수가 모조리 담겨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무공비급을 보며 벽우진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장담컨대 곤륜파의 비전절학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무공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익히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래도 알아보는 녀석들이 있겠지. 천재가 한둘도 아니고.”
입문이 말도 안 되게 높지만 그렇기에 벽우진은 변별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수준이 수준인 만큼 아무나 익혀서 이름에 먹칠을 하느니 아예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게 만드는 게 나았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해도 욕심에 눈 먼 녀석은 손을 대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내가 숨겨 놓은 비밀을 알아차리는 녀석이 있을라나 모르겠네.”
무공비급들을 쳐다보던 벽우진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사문을 위해서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줄 생각은 없었다.
평생의 정수가 오롯이 담겨 있는 만큼 벽우진은 약간의 장난을 쳐 놓았다.
그냥 남기는 건 재미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물론 쉽게 찾을 수 있게 할 생각도 없지만.”
벽우진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맺혔다.
자신이 시공간의 진에 갇힌 것처럼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운이 작용했다.
그래서 이것 역시도 벽우진은 운에 맡길 생각이었다.
“굳이 이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기도 하고.”
대단한 수준인 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광세절학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무공의 깊이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익히는 사람이었기에 벽우진은 허공섭물로 무공비급을 들어 책장에 꽂았다.
똑똑똑.
“사형. 저 청범입니다.”
< 제 80장. 장보도(藏寶圖).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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