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9장. 집으로. -03 >
벽우진의 동공이 살짝 확대됐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것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무림이 탄생한 이래로 여인이 천하제일인의 권좌에 앉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수많은 천하제일인이 있었지만 정작 여자는 없었지.”
“그러네요.”
“그래서 내가 최초로 앉아보고 싶었어. 여자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지. 물론 결과는 네가 본 그대로고.”
“실험을 했다는 뜻이 그것이었군요.”
“맞아. 다른 사람한테 할 수는 없잖아?”
자신의 몸을 실험한 대가로 평범한 삶을 살기 힘들 정도로 육신이 망가졌음에도 연진청의 얼굴은 밝았다.
분명히 고통과 충격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후회는 안 하시는군요.”
“당연히. 내가 선택한 길이었고, 얻을 수 있는 걸 충분히 얻었으니까. 그 결과물이 내 옆에 있고 말이지. 물론 아직은 진행형이지만 말이야. 갈 길이 멀다는 걸 너로 인해 다시 한 번 깨달았으니까.”
“저는 예외로 둬야죠.”
“그건 안 돼.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거든.”
무공을 잃었어도 당찬 성격만은 여전한지 연진청이 검지를 휘휘 저었다.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 불가능할 텐데.”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그게 인간 아니겠어?”
“그렇다면야.”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데 벽우진도 별 수 없었다.
그는 진실을 말해준 것뿐인데도 말이다.
적어도 그가 세상에 있는 한 여자가 천하제일인이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근데 너도 은근히 명치 잘 때린다.”
“제 특기 중에 하나입니다. 솔직한 게 성격이라.”
“너무 솔직해도 안 좋은 거 알지?”
“눈치 볼 나이는 지났죠. 제 위로 몇 명이나 있다고.”
연진청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나이로도, 배분으로도 둘보다 높은 사람은 현 강호에서 찾기 힘들었다.
“그래도 부럽다. 넌 젊어 보이잖아.”
“영약 찾아 드세요. 환골탈태하면 되죠.”
“지금 해도 너 정도는 안 돼. 해봤자 똑같이 할망구지.”
“아니라고 말을 못하겠네요.”
사정없이 명치를 때리는 벽우진의 발언에 연진청이 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벽우진과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자연스레 무공의 무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의외로 둘의 공통점이 많아서였다.
특히 육체를 다루는 방식이 상당히 흡사했다.
“허어.”
그건 벽우진 역시 마찬가지인 듯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에 놀람과 감탄이 떠올랐다.
동시에 벽우진은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공간에서 수련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부상을 입어도 즉시 치료가 되었으니까.’
시공간의 진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육체적인 성장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니까.
그런데 신비로운 점은 부상을 입어도 금세 치유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벽우진은 그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연진청과 대화하면서 알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대화에 빠져드는 건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조용히 경청하던 현주혜 역시 자기도 모르는 새에 두 사람의 대화에 깊게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연진청의 진전을 이었다보니 그녀 역시 대화가 잘 이해되었던 것이다.
곤륜파의 명성을 다시 한 번 천하에 떨쳐 울린 벽우진이 제자들과 함께 곤륜산으로 돌아왔다.
떠난 사이 한결 자라 있는 나무들이 벽우진의 기분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불타기 전처럼 우거진 모습은 아직 아니지만 그럼에도 쭉쭉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오셨습니까.”
하지만 집에 돌아왔음에도 벽우진은 쉴 틈이 없었다.
그가 떠나 있는 동안 차곡차곡 쌓여 있던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 호법님.”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하하. 제가 축하받을 일인가요. 아이들이 잘해서 그런 건데.”
“가르친 건 장문인이시지 않습니까.”
“일단 앉으시죠.”
벽우진은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차를 우려냈다.
“새 제자를 들이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청범에게 들은 모양이군요.”
“예. 그리고 그 제자가 석가장의 셋째라는 것도요. 혹시 노리신 겁니까?”
벽우진이 따라주는 차를 두 손으로 받으며 비현이 물었다.
아닌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시기가 절묘해서였다.
“노리진 않았습니다. 먼저 찾아온 쪽은 정후이니까요. 당돌하게도 거래를 하자고 했는데 자질이 나쁘지 않아 속가제자로 삼았습니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군요.”
“저에게는 그런 셈이죠. 본인은 황금 동아줄을 잡았다고 생각하겠지만요.”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어쨌든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차의 재배도, 나무들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속가제자들 역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고요. 이번 천하무림 비무대회가 상당한 자극을 준 모양입니다.”
“좋은 일이네요.”
“물론 실력이 되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말이지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벽우진이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상청단과 비천단에 이어 새로운 영단을 연구 중인 사실은 장문인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예. 비천단보다 약간 떨어지는 영단을 연구하신다고.”
“정확하게는 속가제자들에게 줄 생각으로 연구 중입니다. 소림사의 소환단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소환단만 해도 엄청난 건데요.”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비현을 향해 벽우진이 황급히 말했다.
사실 상청단, 비천단만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영단이었다.
소림사의 대환단, 무당파의 태청단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으니까.
사심을 조금 담는다면 벽우진은 그 두 개보다 상청단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내심 쉬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비천단과 상청단을 만들어 냈으니 그 아래 급이라 할 수 있는 영단은 금방 성공할 줄 알았거든요.”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어려운 게 이상하게 쉽게 풀릴 때가 있고, 쉬운 일이 이상하게 꼬여서 더럽게 안 풀릴 때도 있고요. 그리고 영단이라는 게 마음대로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비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스스로에게 조급증을 느끼고 있는 듯한 모습에 벽우진은 반쯤 비어 있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
“지금까지 잘 해오셨지 않습니까. 오히려 비천단 같은 경우는 운이 좋기도 했고, 그동안 연구해온 것 덕분에 완성되지 않았습니까. 상청단도 어떻게 보면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새로운 영단은 반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 게 당연합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차분히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문인.”
“감사는 제가 해야지요. 비천단과 상청단을 만들어주신 분이 비 호법님이신데요. 비 호법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곤륜파도 없었을 겁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조바심이 조금은 가신 모양인지 비현이 옅게 웃었다.
그러나 벽우진은 진심이었다.
제자들이 빠른 시간에 강해진 것은 각자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비천단을 빼놓을 수 없었다.
비천단으로 인해 벽우진과 곤륜파가 얻은 것도 적지 않았고 말이다.
“아닙니다. 비천단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청민과 청범이 건강하겠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저뿐만 아니라 청민과 청범도 비 호법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아, 필교도 빼먹었네요.”
“허허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이제는 천천히 가도 됩니다. 그 정도 단계까지는 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가르치는 속가제자들도 이삼 년만 가르칠 것도 아니고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확실히 마음이 편해지네요.”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벽우진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사실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의외로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아직 제 몫을 하려면 9년은 더 있어야 하겠지만요.”
“꼭 10년을 채워야 합니까?”
벽우진이 농담하듯이 물었다.
너무 10년이라는 시간에 연연하는 것 같아서였다.
“의술이라는 게 일이 년 만에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닌지라. 특히 기초를 탄탄히 다지는 게 중요합니다.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니까요.”
“하긴.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이니.”
“그래도 빨리 배우고 있습니다. 일단 외상 같은 경우는 매일 살펴볼 수 있으니까요. 내상도 마찬가지고.”
“···애들이 대련을 심하게 합니까?”
벽우진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진검을 허락한 게 혹시나 독이 된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아무래도 또래가 많다 보니까요. 투지가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큰 부상은 없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다들 장문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련한 성과를 보여주고 싶어 하더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궁금해지는군요. 얼마나 성장했을지.”
“청범 장로가 많이 신경 썼습니다.”
벽우진이 청민과 함께 낙양으로 갔기에 임시적으로 곤륜파를 맡은 건 서진후였다.
비청단으로 바쁜 그가 장문인 대리로 곤륜파의 대소사를 맡은 것이다.
거기에 속가제자들까지 관리해야 했으니 많이 힘들었을 게 분명했다.
“나이도 적지 않은 녀석이.”
“그래도 비천단 덕분에 회춘하지 않았습니까. 웬만한 장정보다 더 건강할 겁니다. 허허허.”
“그러다가 훅 갈 수도 있으니까요. 과로에는 답이 없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제가 제자들과 함께 하루에 한 번씩은 만나고 있습니다. 다른 형님들이야 워낙에 바빠서 얼굴 보기가 힘들지만요.”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창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기에 당연히 바쁠 터였다.
다들 늦게 제자를 들였으니까.
‘욕심도 날 테고 말이지.’
제자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본 게 호법들이었다.
비현이야 애초에 연단가이지 무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달랐기에 아마 기를 쓰고 가르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비천단을 허락하기도 했고 말이다.
‘똑같은 상황인데 결과가 다르다면 원인은 하나뿐이니까.’
물론 비천단을 허락했음에도 벽우진은 자신이 있었다.
제자들이 절대 따라잡히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
그리고 따라잡힌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이들이 어떻게 노력했는지 너무나 잘 아니까.
‘심심하지는 않겠어. 흐흐.’
지나친 경쟁은 문제가 되지만 적당한 경쟁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또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벽우진은 남몰래 히죽 웃었다.
보타문이 있는 주산군도와는 전혀 다른 절경에 현주혜는 가슴이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보타산도 산이지만 규모로만 따지자면 곤륜산과 비교할 수 없었다.
산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규모였기에 처음 곤륜산에 올랐을 때 현주혜는 정말 깜짝 놀랐다.
“공기도 완전 달라.”
“괜히 영험한 산이 아닌 것 같아요.”
“중원도맥의 하나를 잇고 있는 영산이니까. 뭐, 나도 곤륜산에 온 건 처음이지만. 근데 오길 잘했지?”
“네. 저보다는 사부님께서 더 좋아하시는 것 같지만요.”
“후후후!”
연진청이 활짝 웃었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였다.
처음에는 제자를 위해서 선택한 결정이었는데 막상 와보니 자신이 더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한 20년은 젊어진 것 같은데. 내가 오빠라는 말을 언제 해봤는지 기억이 안 나. 너를 제자로 들이면서 주산군도에서 벗어나질 않았으니까.”
“호법님들도 오빠나 오라버니라는 말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들 살살 녹잖니. 우후후후!”
< 제 79장. 집으로.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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