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56화 (256/325)

< 제 79장. 집으로. -02 >

연진청은 새삼 감탄했다.

멀리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벽우진에게는 선기(仙氣)가 있었다.

도가비전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힌 이들만 가질 수 있다는 선기가.

언제부턴가 그 맥이 끊어졌다고 하는 선기를 짙게 가지고 있는 벽우진을 연진청은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니고, 신기해서. 선기를 지닌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해서.”

“호오.”

벽우진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선기를 알아보는 이가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단순히 상단전을 연다고 해서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 내가 잘못 알고 있나?”

“맞습니다. 선기는 아무나 쌓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도 운 좋게 가지게 된 것이고요.”

“그 정도면 운이 아니라 실력인 거 같은데.”

연진청이 피식 웃었다.

겸손해도 너무 겸손한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둘의 대화에 현주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 그것보다 선기를 알아보신 게 더 놀라운데요.”

“망가진 몸으로 어떻게 알았냐는 것이지?”

“예.”

처음 연진청이 들어왔을 때 벽우진은 살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녀의 육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어서였다.

마치 주화입마를 입은 것 마냥 단전은 부서지고 전신의 혈맥이 뒤틀려 있는 상태에 벽우진은 내심 침음을 흘렸었다.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모두를 가져가고 대신 한 가지를 남겨주더라고. 덕분에 아직까지 밥값을 하며 살고 있지. 후후.”

“한 가지라.”

“궁금한가?”

“괜찮습니다. 대충 예상이 가기도 하고요.”

“재미없긴.”

연진청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투덜거림에도 벽우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치료는 안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 나이 먹고 치료는 무슨. 적당히 살다가 가야지. 다 늙은 나한테 쓰느니 차라리 젊은 애들한테 쓰는 게 낫지.”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요.”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연진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완치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에게 쓰는 건 낭비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당사자가 싫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며 쟁반을 든 서예지가 안으로 들어왔다.

예의 곤륜산에서 재배한 차를 가져왔던 것이다.

“음?”

서예지의 걸음과 함께 향긋하게 다가오는 향기에 연진청이 눈을 반짝였다.

예전 검에 미쳐 살아 보타문의 검귀라 불렸을 때에도 차만은 포기하지 못했던 게 바로 그녀였다.

그렇다보니 난생처음 맡아보는 향기에 관심을 보였다.

“곤륜산에서 재배한 특제 차입니다. 본 파의 특산품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제가 직접 가공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고.”

“차를 좋아하나 봐?”

“싫어하진 않죠. 게다가 앞으로 본 파의 주 수입원이 될 것이기도 하니 좋아한다는 쪽에 가까울 겁니다.”

“흐음.”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연진청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다 망해가던 곤륜파를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 벽우진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수입원은 반드시 필요했다.

문파를 재건하는데 있어 돈은 많으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제갈가주도 만족했으니 누님 입맛에도 맞으실 겁니다.”

“누, 누님?”

연진청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러나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싫으시면 태상문주님이라 부르지요.”

“아, 아냐. 편하게 해, 편하게. 나도 편하게 말하는데 뭘. 단지 처음 듣는 단어라서 놀란 거야.”

“하긴. 그렇기는 하겠네요.”

“여자들만 있는 곳이니까.”

연진청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별거 아닌 호칭인데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해졌던 것이다.

‘사부님도 참.’

그리고 그 모습을 현주혜는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생소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면서 말이다.

“그럼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고생했어.”

“아니에요.”

서예지가 싱긋 웃어 보이며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허리를 숙였을 때 서예지의 얼굴에는 짙은 아쉬움과 부러움, 질투가 떠올라 있었다.

사부인 벽우진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네.’

서예지는 벽우진을 존경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녀를 구해주기도 했지만 사람으로서 벽우진은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자신은 냉정한 척, 무심한 척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벽우진이 대의에 어긋난 행동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옆에 서고 싶었는데.’

조부인 서진후가 왜 그런 의심을 했는지 그녀도 알았다.

한때는 잠시나마 착각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딱 하나.

벽우진의 옆에 나란히 서는 것이었다.

제자로서, 검객으로서, 무인으로서 당당히 말이다.

당신의 가르침을 받은 제가 이렇게 컸다고 말할 수 있게.

‘그러려면 일단 검후를 넘어야하겠지.’

방을 나서는 서예지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지금까지는 막연하게 절대고수가 되는 것을 생각했다.

단순히 수련해서 강해지는 것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현주혜를 보게 되었다.

‘곤륜파에서 나온 검후. 나쁘지 않잖아?’

검후라는 별호는 지금껏 보타문에서만 가져갔었다.

하지만 꼭 검후라는 별호가 보타문만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타문주보다 강한 여인이 있다면 그 여인이 곧 검후이지 않을까.

‘내가 가져올 거야.’

서예지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확고한 목표가 잡힌 것이었다.

“저 아이가 제대로 무공을 익힌 게 2년 정도라고 들었는데.”

“정확하게는 2년 반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 정도란 말이지.”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두 손으로 들고서 연진청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는 언뜻 긴장감이 서렸다.

“아직 갈 길이 멀지요.”

“그건 나도 알지. 근데 내가 두려운 건 미래야. 지금이야 우리 주혜가 있지만···.”

“후대는 장담할 수 없겠죠.”

그 사부에 그 제자 아니랄까봐 찻잔을 드는 자세도 똑같았다.

심지어 마시는 것도 똑같이 마셨다.

“긴장감도 있고 좋지 않습니까. 검후라는 별호가 보타문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고.”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 빼앗기기 싫어서 말이지.”

“그럼 노력하면 되는 일이지요. 빼앗기기 싫다면 지키면 될 일이니.”

“너무 자신만만해 하는 거 아냐? 이거 기분이 나빠지려는데?”

말과는 달리 연진청의 입은 웃고 있었다.

경쟁은 무인에게 있어 절대 뗄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부정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선의의 경쟁이라면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되었다.

“사부이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제자의 가능성을 믿어야 하는. 그리고 그렇게 만들 자신도 있고.”

“그렇게 말하니까 더 무서운데.”

연진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벽우진의 호언장담이었다.

그렇다보니 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지지 않을 거예요. 사부로서도.”

“승부욕은 발전에 있어 큰 도움이 되지.”

각오가 서려 있는 현주혜의 목소리에도 벽우진은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그만큼 서예지를 믿어서였다.

또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나저나 놀랐어. 이렇게 쉽게 만남을 허락할 줄은 몰랐거든. 내 듣기로 문턱이 어마어마하게 높다고 들어서 말이지.”

“영광으로 아시면 됩니다. 그 어마어마한 문턱을 단번에 넘었으니까. 딴 데 가서 자랑해도 되요.”

“진짜 한 마디도 지지 않네.”

연진청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딱히 당황하지는 않았다.

벽우진의 유별난 성격이야 이미 수도 없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신 겁니까?”

“궁금해서. 개인적으로 말이야.”

“저 말입니까?”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맺혀 있었지만 두 눈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담담한 얼굴로 차를 들이켰다.

“응. 한 번쯤은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비무대회에서는 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보이지도 않던데요.”

“후후. 아무래도 내가 좀 왜소하다보니까. 그리고 주혜와 검봉이 있는데 나와 같은 꼬부랑 노인네가 눈에 들어오겠어?”

“틀린 말은 아니네요.”

“사람이 말이야. 빈말이라도 좀 듣기 좋은 말을 해주면 안 돼?”

연진청이 투덜거렸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성격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도가 지나칠 정도로 솔직했다.

사람이 가끔은 빈말도 좀 해주고 비위도 맞춰줄 수 있는 건데 말이다.

“제가 좀 직설적인 성격이라.”

“나이도 적지 않은데 좀 유순해져야지.”

“흐음. 나이 얘기로 가면 제 살 파먹기 밖에 안 될 텐데요.”

“난 상관없어.”

“저도 상관없습니다.”

조용히 지켜보던 현주혜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 어린아이들이 싸우는 것 같아서였다.

나이도 많은 양반들이 말이다.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만나본 적 없지?”

“저 도인인데요.”

“다 알고 왔어. 혼인도 가능하다며?”

“제가 알기로는 없었습니다. 이미 다 고인이 되셨지만.”

자존심을 살살 건드리는 말에도 벽우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곤륜파의 재건 말고는 딱히 관심이 없었기에 기분이 나쁠 것도 없었다.

“이럴 때보면 참 신선 같은데. 초탈해 보이고.”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없는 거죠.”

“그래서 야망도 없는 거야?”

연진청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다.

가장 묻고 싶던 말을 은근슬쩍 툭 내뱉었던 것이다.

그런데 벽우진은 의외로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사문을 재건하는 걸로 족합니다.”

“욕심나지 않아? 지금의 너라면 곤륜파를 천하제일문으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텐데.”

“과욕입니다. 이제 막 기둥을 세웠는데 천하제일문은 무슨. 그리고 천하제일문은 스스로가 공표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진짜 욕심 없나 보네.”

연진청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위상에, 실력을 갖췄는데 욕심을 갖지 않는 게 그녀는 놀라웠다.

대개 무인이라면, 무공을 익히면 남자는 천하제일인을 꿈꿨다.

그 다음이 자신의 사문을 최고로 끌어올리는 것이고.

그런데 벽우진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저보다는 제 제자들의 몫이죠. 제 역할은 곤륜파를 재건하는 겁니다. 주춧돌을 만들고 기둥을 세워서 대들보를 키워내는 것. 그게 제 역할입니다.”

“주변의 생각은 다를 텐데.”

“지금 감찰 나왔습니까? 무엇이 그리 궁금합니까?”

벽우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적당히 농담으로 받아줄 만한 수준은 넘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 모습에 연진청이 단호하게 손사래를 쳤다.

“오해하지 마. 그런 의미는 절대 아니니까. 그저 궁금해서. 사실 모두가 한 번쯤은 궁금해 할법한 것들이잖아.”

“여기까지만 하죠.”

“너도 하나 물어봐. 너에게 불편한 질문을 했으니 나도 하나 답해줄게.”

“참나.”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정말 몰라서였다.

그런데 연진청은 의외로 진지했다.

“너도 궁금한 거 있을 거 아냐? 그래서 이 자리를 허락한 거고.”

“몸은 왜 그렇게 된 겁니까?”

“흐응. 진짜 망설이지 않고 물어보네.”

“궁금한 거 물어보라면서요. 좀 이해가 안 가기도 하고.”

“그거 말고는 궁금한 게 없다는 뜻이지?”

벽우진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히 궁금한 게 없기도 했지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험을 해서 그래. 난 여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거든. 여중제일인, 검후에 만족할 수 없었어. 그 너머에 오르고 싶었어. 여자로서 천하제일인에 되고 싶었거든.”

< 제 79장. 집으로. -02 > 끝

ⓒ 윤신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