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9장. 집으로. -01 >
‘누구보다 앞장섰지만, 그 대가는 멸문지화에 외면이었으니.’
벽우진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곤륜파라는 선례가 있으니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 식솔이 있으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결정에 가문이, 문파가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데 어찌 고민을 안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나는 진짜 할 말이 많은데.’
벽우진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막말로 가장 삐딱선을 타야 하는 이는 그였다.
강호가 불바다가 되거나 말거나 말이다.
“제가 혹시 잘못한 게 있습니까?”
벽우진의 표정이 불퉁해지자 제갈현이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나 싶어서였다.
동시에 그는 벽우진을 만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를 곱씹었다.
“제갈가주 때문이 아냐. 좀 기분 나쁜 생각이 들어서.”
“저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별 거 아냐. 갑자기 사부님과 사숙님, 사백님들이 떠올라서.”
“아···.”
제갈현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은 꼰대적인 생각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전대의 곤륜파 도인들은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서 천년마교를 막아섰다.
심지어 속세의 무인들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벽우진의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재는 모습이 충분히 못마땅할 터였다.
‘우리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지.’
지금이야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좋게 넘어갔지만 그렇다고 과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어떻게 보면 천년마교와 싸우는 건 중원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가문을 위해서였다.
천년마교가 중원의 명문세가이자 귀찮은 장애물이 될 제갈세가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기에 맞서 싸운다는 게 정확했다.
“일단 당장 닥친 일부터 처리하자고. 오지도 않은 미래에 걱정하지 말고. 대비는 하되 미리부터 걱정하진 말자.”
“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걸로. 싫다는데 억지로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문제이니까.”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제갈현이 다부진 얼굴로 대답했다.
일단은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볼 생각이었다.
“그럼 천년마교 쪽은 현재 개방이 맡고 있는 건가?”
“예. 개방주가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후개를 얼른 찾아야 할 텐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더욱 동분서주하는 것 같습니다.”
“다들 바쁘구먼.”
벽우진이 차를 홀짝였다.
나름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서였다.
“장문인을 뵙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내가 낯을 많이 가려서 말이지.”
“허허허.”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으나 제갈현으로서는 따질 수가 없었다.
벽우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으니까.
천하무림 비무대회에 참여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감지덕지였다.
“제갈가주는 가장 오랫동안 낙양에 남아있겠군.”
“그럴 것 같습니다.”
“고생이 참 많아.”
“아닙니다. 실질적인 전투에서 큰 힘이 되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해야지요.”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말을 하고. 다 들어준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볼게.”
특유의 화법에 제갈현이 미소를 지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상당히 신경 써줄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이 차를 좀 얻어갈 수 있겠습니까?”
“말만 해. 차는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벽우진은 말만 하지 않았다.
바로 일어나 차를 담은 통을 몇 개나 가져와 제갈현의 앞에 놓았다.
잊어버리지 않게 미리 챙겨주었던 것이다.
그 상태로 벽우진은 제갈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별채의 앞마당에서 검을 쥐고 기본기를 수련하던 석정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담벼락 위로 새까만 무언가가 좌우로 계속 움직이고 있어서였다.
마치 들어오기를 고민하고 있는 듯한 사람의 머리에 석정후는 내려치기를 멈추고서 슬쩍 담벼락으로 다가갔다.
“왜 그러십니까?”
“누가 온 거 같아서.”
“찾아오는 사람이야 늘 있지 않습니까.”
백륜이 질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림잡아도 지금까지 벽우진을 찾아온 사람이 수백 명은 넘었다.
하지만 그 중 벽우진을 직접 대면한 사람은 석정후가 유일했다.
그 외는 단 한 명도 벽우진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되게 고민하는 사람 같지 않아?”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즉에 들어왔겠지요. 그럴 수가 없으니 기다리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왠지 모르게 익숙해 보여서.”
“머리통만 보고서요?”
백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담벼락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저렇게 머리카락만 살짝 보이는 것이었고.
“내 촉이 말하고 있어. 저 사람은 좀 특별하다고.”
“그 촉이 틀린 경우를 아직껏 못 보기는 했습니다만, 여기의 주인은 장문인이신데요.”
“그래서 내가 고민하는 거 아냐.”
자기 혼자만 머무는 별채였다면 진즉에 가서 확인해 봤을 터였다.
하지만 주인이 따로 있기에 그가 나서기에 좀 그랬다.
“혹시 쉬려고 잔꾀를 부리시는 건 아니시죠?”
“내가 언제 수련할 때 잔꾀 부린 적 있어?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허투루 수련한 적 없어. 오히려 죽어라 매진했지.”
“흐음.”
백륜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석정후는 수련할 때 단 한 번도 건성으로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믿기 힘들 정도의 집중력과 근성을 보여줬었다.
석가장에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말이다.
“한 번 슥 보고 올게.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잖아?”
“상대방 쪽에서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데요.”
“에이. 내가 누군지 알면 그러지 않을 걸? 나 사부님 제자야.”
석정후가 씨익 웃었다.
영리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신분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이번 천하무림 비무대회에서 많이 느끼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기에 석정후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담벼락에 두 팔을 올리고서 몸을 띄웠다.
“어?”
“왜 그러십니까?”
그간의 수련으로 근육이 제법 붙었는지 어렵지 않게 담벼락 위로 상반신을 올린 석정후가 무엇을 본 것인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백륜이 만약의 일에 대비하며 석정후를 쳐다봤다.
“아, 안녕하세요?”
하지만 백륜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석정후는 담벼락 너머에 있는 이에게 인사했다.
그것도 너무나 반갑게 말이다.
백륜은 그게 의아했다.
“안녕?”
“혹시 저희 사부님 찾아오신 거예요?”
“으응. 근데 장문인께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해서.”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백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소하면서도 묘하게 익숙해서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라고나 할까.
“제가 한 번 여쭈어볼까요?”
“그래 줄 수 있을까?”
석정후의 말에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이들이 모조리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석정후는 그들에게는 일절 시선을 주지 않았다.
“사부님께 여쭤보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대신에 저와 잠깐이라도 대화할 수 있을까요?”
“너랑?”
“예. 모용 공자에게도 나쁜 시간은 아닐 거라고 장담해요.”
백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의 대화로 상대가 누구인지 그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상반신만 쏙 올렸던 석정후가 번개같이 아래로 착지했다.
그리고는 백륜은 쳐다보지도 않고서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곧장 벽우진을 찾아갔던 것이다.
‘모용휘라.’
순식간에 사라진 석정후를 떠올리며 백륜이 턱을 쓰다듬었다.
어째서 저리 반겨하는지 그는 짐작이 가서였다.
장사꾼은 아니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석가장에서 몇 년 동안 생활했기에 백륜은 지금 석정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이문이 남는 장사는 사람 장사이니까. 결국 돈도 사람이 만들고, 쓰는 것이고.’
몰락한 모용세가의 후계자인 모용휘라면 석정후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또한 모용휘 역시 석정후와 손을 잡아서 나쁠 것 없었고.
지금은 미비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런데 오늘 오후에 약속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백륜의 시선이 모용휘로 짐작되어지는 머리통을 쳐다봤다.
석정후의 말 때문인지 좌우로 왔다 갔다 하던 머리가 지금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손님이 왔다는 전갈에 서예지가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서 직접 한 번 보고 싶었기에 서예지는 망설이지 않고 자청했다.
“1층에 계십니다.”
“알았어.”
오늘도 어김없이 헤벌쭉 웃는 소육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대답한 서예지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윽고 청범객잔의 1층에 도착한 서예지는 일노일녀를 볼 수 있었다.
특히 모든 이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고 있는 그녀를 말이다.
“허어. 처자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던 연진청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자가 마중을 나올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게 서예지일 줄은 몰라서였다.
“제가 맞이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이거 객잔 안의 손님들이 숨을 쉬지 못하겠는 걸.”
연진청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두 여인이 마주보고 선 순간 1층 안의 모든 남자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지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과찬이세요.”
“과찬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여기 남정네들이 자네를 쳐다보는 걸.”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농담 섞인 말을 던지는 연진청을 향해 서예지가 정중히 입을 열었다.
굳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면서 서예지는 현주혜를 슬쩍 쳐다봤다.
‘여중제일인에 제일 근접한 고수···.’
서예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검후라는 별호도 별호지만 태성전에서 우승한 이후 사람들은 현주혜를 보며 여중제일인이라고 불렀다.
뭇 남자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했으니 충분히 그리 불릴 자격이 있다면서 말이다.
“왜 그러지?”
“아닙니다. 따라오시죠.”
서예지의 눈빛에 현주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창졸간이었지만 눈빛이 상당히 도발적이어서였다.
하지만 그러한 기색은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후후후!”
몸을 돌리며 안내하는 서예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연진청이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현주혜는 조용히 서예지의 뒤를 따라 걷기만 했다.
“어?”
“왜 그러느냐?”
“용봉전의 우승자를 본 것 같아서요.”
“여기 있을 수도 있지. 장문인의 허락만 있다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인데.”
“그렇긴 하죠.”
현주혜는 이내 관심을 껐다.
중요한 건 벽우진과의 만남이었지 모용휘가 아니었으니까.
“들어가시죠.”
이윽고 세 사람은 벽우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뵙겠소이다, 장문인.”
“오셨습니까.”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연진청을 보며 벽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분은 비슷하지만 나이가 자신보다 많다는 것을 알기에 예의를 차린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뒤이어 현주혜도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해왔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심드렁했던 전과 달리 지금은 호승심으로 불타올랐던 것이다.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부탁해.”
“아니에요, 사부님.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걸요.”
서예지가 살포시 웃으며 방을 나섰다.
간단하게 다과상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참 예쁜 것 같소. 얼굴도, 실력도.”
“말씀 편히 하시지요.”
“흐음. 그래도 되겠소?”
연진청이 한쪽 눈을 치켜 올렸다.
마치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거침없는 성격이긴 하나 예의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험험. 그럼 편히 하지.”
연진청이 곧바로 말을 놓았다.
먼저 말을 놓으라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슬쩍 벽우진을 살폈다.
‘확실히 다르구나.’
< 제 79장. 집으로.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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