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8장. 검후(劍后). -04 >
낙양의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지만 현주혜의 처소만은 달랐다.
비교적 외곽에 위치한 객잔의 별채를 빌렸기에 크게 시끄럽지는 않았던 것이다.
“후우우.”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현주혜가 깊은 날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눈꺼풀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오늘 오후에 있었던 벽우진과의 비무를 복기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녀는 벽우진의 검을 처음으로 받아냈을 때를 몇 번이고 떠올랐다.
‘결국 초심인 건가.’
보타문의 검법은 빠르고 화려했다.
아무래도 여인들만 익히는 무공이었기에 힘보다는 속도를 중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달랐다.
환검에 현혹되기보다는 그냥 정면으로 깨부쉈다.
‘어떻게 보면 참 단순한 건데 말이지. 막으면서 상대의 공격을 깨부순다.’
지극히 정론적인 공방이었지만 거기에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실리면 얘기가 달라졌다.
굳이 변화를 추구하지도, 빈틈을 노릴 필요도 없었다.
그냥 찍어 누르면 끝났다.
‘물론 그 경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험을 쌓아야 하겠지만.’
현주혜는 보타문 최고의 고수였다.
또한 무림에서도 적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대단하다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과도 딱히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달랐다.
‘격이 다른 괴물, 정도일라나.’
소림무제와 무당권제, 제왕검은 솔직히 그녀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비벼볼 여지는 있다고 생각했다.
운이 조금 따른다면 승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고.
그러나 벽우진은 달랐다.
‘일검에 승부가 났을 수도 있어.’
벽우진이 마음만 먹었다면 단 일검에 승부가 났을 터였다.
직감과도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만약 벽우진이 진심으로 검을 휘둘렀다면 단 한 방에 자신은 끝났을 거라고.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겠지.’
벽우진 정도의 고수쯤 되면 검의 유무는 크게 중요치 않을 터였다.
그래서 강호에 등장한 초반에 주먹만 사용했던 것일 테고.
‘근데 그런 경험을 대체 어떻게 쌓은 거지?’
벽우진과 붙으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자기보다 강하거나 비슷한 상대를 찾는 건 고수가 될수록 어려운 법인데 벽우진은 이상하게 그러한 경험이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58년 동안 혼자 갇혀 있었다고 들었는데. 혹시 은거한 분이 계셨나? 그 분에게 사사한 거라면 말이 되기는 하는데.”
똑똑똑.
날숨과 함께 명상을 끝낸 현주혜가 고개를 돌렸다.
마치 이때쯤 끝낼 줄 예상했다는 듯이 절묘한 순간에 찾아오는 기척에 그녀는 실소를 흘리며 문을 열었다.
“배는 안 고프니?”
“한 끼 굶는다고 죽나요.”
“그래도 많이 움직여서 출출할 텐데.”
“입맛이 없어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연진청에게 자리를 권하며 현주혜가 고개를 저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허기가 지지 않아서였다.
“분해서 그런 건 아니고?”
“태어나서 처음 진 것도 아닌데요.”
현주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이야 보타문주이면서 검후라는 별호를 이어받았지만 그 전에는 수도 없이 패배했었다.
그렇기에 패배는 익숙했다.
“근 10년 동안 진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역시 정정하시네요. 마음이 놓여요.”
“이것이.”
자연스럽게 나이를 거론하는 제자의 모습에 연진청이 눈매를 치켜 올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주혜의 미소는 짙어졌다.
“늘 제가 걱정하는 거 아시죠?”
“알면 좀 잘해. 사부 말도 잘 듣고.”
“지금보다 더 어떻게 잘 들어요?”
“말도 좀 고분고분하고. 그래서 남자를 만나겠어?”
현주혜가 눈을 흘겼다.
어째 요즘 들어 자꾸 남자를 거론하는 것 같아서였다.
정작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
“요즘 왜 그러세요?”
“네 미모가 아까워서 그런가. 내가 네 얼굴이었으면 진짜 이 남자, 저 남자 다 만나고 다녔을 게야.”
“사부님도 미인이셨잖아요.”
“어중간한 미녀였지. 너처럼 압도적이진 않았어.”
연진청이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젊은 시절 자신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남자에는 관심 없어요.”
“지금까지는 검이 좋았으니까. 근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말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가기도 해.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그것도 사람 나름이죠.”
현주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감정이 매마른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바로 눈앞에 있는 연진청이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그것도 맞는 말씀이고요.”
“붙어보니 어땠어?”
“완전 발렸죠, 뭐. 애초에 상대가 안 되던 걸요.”
몇 번이고 복기해 봐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불이 붙기도 했다.
어떻게든 이겨내겠다는 호승심이 활활 불타올랐던 것이다.
“내가 말했잖아. 아직 은거하기는 이르다고. 더구나 네 얼굴에, 네 몸매에.”
“저보다 어리고 예쁜 애들도 많던데요.”
“대신 그 아이들은 성숙미랑 농염미가 없잖니. 나이가 너무 어리지.”
“저랑도 어울리지 않는데요.”
현주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를 잘 아는 여자라면 모르겠지만 그녀는 남자의 손도 잡아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넌 있어. 아직 껍질을 깨지 못해서 네 자신이 모를 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가 내 나이만큼 살면 알게 될 거야. 그런데 주혜야. 한 번 만으로는 부족하지 않니?”
“뭐가요?”
“비무.”
현주혜의 눈빛이 달라졌다.
단 두 글자였지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저야 하고 싶지만, 장문인께서 허락할까요?”
“그러니까 더더욱 대화를 나눠봐야 하지 않겠느냐.”
“혹시?”
현주혜의 두 눈에 기대감이 서렸다.
안 그래도 복기하면서 몇 번이나 아쉬움을 달랬다.
만약 조금이라도 따로 시간을 가졌다면, 무공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면 더욱 좋았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낮에 있었던 비무도 그녀의 억지로 인해 만들어진 자리였기에 차마 연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쑥스러움이 많은 제자를 대신해서 내가 서신을 보내 놓았지. 아마 지금쯤 확인했을 거야.”
“확정은 아니네요.”
“이게? 나니까 그래도 인편이라도 보낼 수 있었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시도조차 불가능했어. 벽 장문인 성격을 알면서 그래?”
“깐깐하고, 까칠하죠. 자기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그 말은 반대로 자기 사람에게는 잘한다는 뜻이기도 해. 그리고 벽 장문인 정도 되는 무인과 연을 맺어서 나쁠 것은 없지.”
연진청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직접 본 벽우진은 소문과는 크게 달랐다.
실력만큼은 진짜였고.
게다가 여자와 관련된 염문조차 없었기에 연진청은 고민하지 않았다.
‘본 문과 제자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놀리는 것은 장난이었고 친분만 맺어도 그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섭게 성장하는 곤륜파와 좋은 인연을 맺어둔다면 보타문으로서도 나쁘지 않아서였다.
“답장이 안 올 수도 있어요.”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꼭 한 가지 방법만 고수할 필요는 없으니까.”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네가 그렇게 웃었으면 좋겠구나.”
연진청이 부드럽게 웃으며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이가 벌써 불혹이 지났지만 그녀에게 현주혜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오랜만이네요. 사부님께서 이렇게 쓰다듬어 주시는 건.”
“이젠 다 커서 기분 나쁘지?”
“아뇨. 좋아요. 그래서 저도 나중에 꼭 제자의 머리를 자주 쓰다듬어줄 거예요.”
“그것도 나쁘진 않지. 혼자보다는 나으니까.”
흑단 같은 제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기며 연진청이 말했다.
또르륵.
곤륜산에서 가져온 찻잎이 적당히 뜨뜻한 물을 맞으며 서서히 차향을 뿜어냈다.
그 향에 제갈현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백호은침, 용정차 등 구하기 힘든 고급 차도 심심찮게 마셔본 제갈현이었지만 곤륜파에서 만든 차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곤륜산 특유의 향과 맛이 난다고나 할까.
“이거 파는 겁니까?”
“특산품으로 팔아보려고. 맛이 나쁘지 않지?”
“맛있습니다. 개성이 확실하게 잡혀있네요. 특이하지만 크게 이상하지 않은 느낌이랄까요. 특히 차향이 일품입니다.”
“중원에서도 자주 접하게 될 거야.”
제갈현의 극찬에 벽우진의 미소가 짙어졌다.
재배부터 가공까지 그도 직접 참여해서 만든 차였기에 제갈현의 칭찬이 더욱 기꺼웠던 것이다.
“혹시 석가장의 삼 공자를 받아들이신 게?”
“그건 우연이었고. 원래 계획은 청하상단을 이용해서 판매할 생각이었어. 청해성에 인접한 감숙성이랑 사천성을 시작으로. 근데 정후를 알게 되었으니 다른 성들도 가능해지겠지.”
“중원상계의 절반을 석가장이 쥐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그 정도야?”
벽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가장이 상계에서는 대단한 가문이라고 듣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였다.
“모르셨습니까?”
“나 나온 지 이제 2년 좀 넘었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더 많아.”
“아.”
제갈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그 사실을 깜빡한 것이다.
그리고 벽우진은 굳이 58년의 공백이 아니더라도 석가장에 딱히 관심이 없었을 터였다.
지금이야 석정후 때문에 알게 되고 신경 쓰는 것이지.
“대단한 가문인가보네.”
“적어도 중원 상계 내에서는 짝을 찾아보기 힘든 가문인 것은 사실입니다.”
“쉽지 않겠는데.”
“아마 집에 돌아가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벽우진을 향해 제갈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새롭게 부상한 경쟁자를 두 형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분명해서였다.
물론 뒷배가 벽우진인 만큼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도 않을 터였다.
“제갈가주도 같은 소리를 하는군.”
“원하는 사람은 세 명이지만 자리는 하나뿐이니까요. 괜히 피바람이 몰아치는 게 아니지요.”
“사람 욕심이라는 게 참 그래. 근데 나도 인간이라서 그런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이해가 가기도 해.”
“모든 곳이 마찬가지이지 않겠습니까. 본가 역시도 그래 왔고요.”
제갈현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착하게 살고 싶다고 해도,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자격이 있는 순간 운명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잡아먹던가, 잡아먹히던가.
“그 예로 현재 점창파를 들 수 있겠지.”
“빨리 정리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 포섭하는 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천하무림 비무대회는 끝났지만 진짜 중요한 일은 지금부터잖아.”
“그게, 쉽지 않습니다.”
제갈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수면 밑에 있던 고수들을 천하무림 비무대회로 끌어 올렸지만 정작 그들을 포섭하는 건 어려웠다.
단순히 의협심만으로 설득하기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어서였다.
“대부분이 정사중간적인 성향이지?”
“예.”
“명예는 얻고 싶지만 책임은 지고 싶지 않다, 이건가.”
“정확합니다.”
“쯧쯧. 명예도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인데.”
벽우진이 혀를 찼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속세에서 떨어져 있는 곤륜파는 전력을 다해서 세외의 침공을 막아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잊혀졌지.’
지금이야 자신이 패선이라 불리며 세인들이 치켜 세워주지만 벽우진은 잘 알고 있었다.
이것 역시 한때라는 사실을 말이다.
< 제 78장. 검후(劍后).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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