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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253화 (253/325)

< 제 78장. 검후(劍后). -03 >

현주혜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별다른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독기가 바짝 선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검세는 더욱 예리해지고 빨라졌다.

츠츠츠츠!

다시 한 번 펼쳐지는 아홉 개의 검강이 벽우진에게 날아갔다.

하나같이 치명적인 사혈을 노리며 벼락처럼 뻗어나갔던 것이다.

“아직도 깨닫지 못한 모양인데.”

“······!”

쩌어엉!

현주혜가 두 눈을 부릅떴다.

부딪친 순간 너무나 허망하게 박살나는 자신의 검강에 놀란 것이었다.

심지어 벽우진은 별다른 초식을 펼치지도 않았다.

그저 적절한 위치에서 검을 휘두른 것이 전부였다.

한데 그 검을 그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못 깨달으면 여기에서 끝이야.”

생사결이었다면 승부는 진즉에 갈렸을 터였다.

하지만 이건 비무였다.

게다가 현주혜가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싶다 말하기도 했었고.

그렇기에 벽우진은 차분하게 기다려주었다.

펑! 퍼엉!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시작된 비무는 계속 되어야 하므로 차례차례 현주혜의 검강을 박살냈다.

울컥!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검강이었기에 하나씩 박살날 때마다 그녀가 받는 충격 역시 적지 않았다.

이미 내상이 계속 축적되기도 했었고.

하지만 그녀는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핏물을 억지로 짓누르며 벽우진의 말을 곱씹었다.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내가?’

현주혜가 두 눈을 부릅뜨고서 벽우진의 검을 바라봤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검로.

그런데도 신기하게 피할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알아. 나도 하수들을 상대로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장문인이 말하는 건 이게 아냐.’

쉴 새 없이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현주혜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악착같이 버티며 벽우진의 말을 곱씹었던 것이다.

카아앙!

그러던 어느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충돌음이 들렸다.

동시에 벽우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감을 좀 잡았나보군.”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박살나지 않은 검강을 쳐다보며 벽우진이 웃었다.

이제 좀 깨달은 것 같아서였다.

“밀도인가요.”

“흔히들 말하잖아? 혼을 실어야 한다고. 그거와 비슷하게 생각하면 돼. 또한 공력이 많으면 좋지만 그렇다고 꼭 많을 필요는 없고 말이지.”

“집중과 압축인가요.”

“맞아.”

씨익 웃은 벽우진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간결하게 딱 필요한 만큼만 검을 움직이던 것과 달리 큰 동작을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 틈을 현주혜는 노릴 수 없었다.

틈이 벌어진 순간 무지막지한 무형강기가 그녀를 덮쳐와서였다.

“크윽!”

송곳처럼 찔러대는 무시무시한 무형강기에 현주혜 역시 마찬가지로 무형강기를 일으키며 응수했다.

그러나 공력도 공력이지만 무형강기를 제어하는 실력 차이가 너무나 컸다.

마치 어른과 어린아이의 싸움과도 같은 격차에 현주혜는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패선이 대단하기는 한가 보네. 상대가 안 돼.”

“태성전의 우승자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네.”

눈에 보이지 않는 공방이었지만 그렇다고 느끼지 못하는 건 또 아니었다.

그렇기에 관중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태성전과는 격이 다른 수준에 연신 감탄했던 것이다.

툭.

그때 벽우진이 무상검을 손에서 놓았다.

던진 것도 아니고 그냥 놓아버렸다.

동시에 사방팔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난생처음 보는 이기어검에 관중들이 깜짝 놀란 것이었다.

“부족한 경험을 오늘 이 자리에서 조금 채워주지.”

“흡!”

손에서 놓기 무섭게 빛살처럼 쇄도하는 무상검을 현주혜는 반사적으로 막았다.

그러나 이기어검은 막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만큼 상대하기가 너무나 까다로웠다.

또한 이기어검을 처음 겪어보았기에 그녀는 더더욱 어려움을 느꼈다.

콰앙! 쾅!

정신없이 몰아치는 공세에 현주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상태로 검을 휘둘렀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공격이기에 극도의 집중력이 발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쿵!

하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급격한 체력 소모에 끝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텼으나 한계는 어쩔 수가 없었다.

“후욱! 훅!”

체력은 물론이고 공력 또한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현주혜의 표정은 밝았다.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땀범벅이긴 해도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때? 너보다 고수와 겨뤄본 소감이.”

“사부님께서 왜 그렇게 큰 세상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는지 깨달았어요.”

“세상도 세상 나름이야.”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도하고 차가웠던 첫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농담을 하는 현주혜의 모습에 벽우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짧은 사이에 심경의 변화가 너무 큰 것 같아서였다.

“알면 됐다.”

무상검을 집어넣은 벽우진이 다시 뒷짐을 지고서 자리도 휘적휘적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현주혜의 도전에 비무대 위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아직 비무대회는 끝나지 않았다.

3, 4위전이 남아 있었기에 피해주는 것이었다.

“끝나고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싶습니다, 장문인.”

“먹은 걸로 칠게.”

멀어지는 벽우진을 향해 현주혜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벽우진은 고개도 돌아보지 않고서 대답했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현주혜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대차게 까이는 건 또 처음이네.’

소녀 때부터 그녀는 뭇 남자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아니, 애기였을 때부터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했다.

어쩌면 그렇기에 여인들의 문파인 보타문에 들어가게 된 걸지도 몰랐다.

적어도 남자들처럼 대놓고 욕망어린 눈빛을 보내지는 않았으니까.

“저기···.”

“아, 네. 내려갈게요.”

멀어지는 벽우진을 흥미로운 눈으로 응시하던 현주혜는 옆에서 들려오는 인부의 음성에 곧바로 이동했다.

벽우진과의 대결로 인해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비무대가 박살이 났기에 황급히 피해주는 것이었다.

잠시 후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인부들이 예비 석재를 이용해 비무대를 다시 멀쩡히 복구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3, 4위전은 관중들의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워낙에 벽우진과 현주혜의 대결이 강렬했기에 상대적으로 시시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천하무림 비무대회는 막을 내렸다.

낙양의 온 거리가 불야성을 이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천하무림 비무대회가 끝나자 사람들이 술과 음식으로 밤을 지새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미어터진다는 표현이 너무나 잘 어울릴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한 대로의 모습에 벽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밖의 광경을 보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은?”

“다들 복기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는데.”

청민의 대답에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게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어서였다.

“음식 많이 준비했는데.”

“제가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안 그래 백륜?”

“어, 다섯 명이서 먹기에는 양이 좀 많은데요.”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배혁문의 말에 석정후가 호기롭게 말했다.

원탁 위에 올라온 음식이 적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천천히 먹으면 다 먹을 수 있어!”

“하하. 꼭 다 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남기면 되죠.”

“음식을 남기면 못 써. 이게 다 돈인데.”

석정후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낭비라면 그 역시 일가견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조심하고 경계해야 했다.

자고로 돈이란 버는 건 어렵고 쓰는 건 금방이었다.

“···며칠 사이에 너무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달라져야지. 이제부터는 돈을 벌어야 하니까. 내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데요.”

백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후계자는 아니지만 석정후가 쓸 수 있는 돈은 제법 많았고, 덕분에 그 역시 나름 호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을 보아하니 앞으로는 많은 게 달라질 것 같았다.

“에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다고 내가 좀생이처럼 하겠어? 쓸 때는 평소처럼 쓸 거야. 다만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려는 거지. 제일 무서운 게 눈 먼 돈이 나가는 거니까.”

“철들었네, 우리 정후.”

“확실히 입장이 달라지니까 마음도, 생각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일단 먹자. 애들은 나중에 따로 시켜주면 될 일이니.”

창가에 서 있던 벽우진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의 주위로 청민과 배혁문, 석정후와 백륜이 앉았다.

“간단히 데워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빼놓을까요. 너무 늦으면 숙수가 퇴근해서 따로 음식을 만들기 힘들 거예요.”

“그럴 바에는 식어도 괜찮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빼놓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말과 동시에 빠르게 음식들을 골라내는 석정후의 모습에 벽우진이 피식거렸다.

첫인상은 부티 나는 귀공자였는데 지금은 억척이가 따로 없는 모습에 실소가 절로 나왔다.

“일단 먹어. 한 끼 굶는다고 죽을 애들도 아니고 육포도 넉넉히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오래 안 걸릴 거야.”

“알겠습니다.”

석정후가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사형제들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벽우진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직 벽우진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았기에 석정후는 조심스럽게 음식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래. 결정은 내렸어?”

“사부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일단 본가로 돌아갈까 합니다. 본가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예전처럼 안전하지는 않을 거야.”

벽우진이 소채볶음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야망을 드러낸 만큼 이제부터는 두 형들에게서 제대로 된 견제가 들어올 게 자명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암살이 있을 수도 있어. 석가장에서 곤륜산은 너무나 멀리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피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피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위험한 건 두 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살시도는 누구나 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석정후는 그 부분에서는 적어도 셋 다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본가에서는 섣불리 시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가장 의심받을 사람은 아무래도 두 형들일 테니까.

“정면 돌파라는 게냐.”

“한 번 피하면 계속 피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계획해둔 것도 있고요. 일단 지금 급한 쪽은 두 형들이기도 하고요. 그만큼 사부님이라는 패는 강력하니까요.”

“일수를 붙여주마. 함께 가라.”

“감독관인가요.”

석정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 말고도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아서였다.

“맞아. 난 내 제자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싫거든. 일이 많겠지만 시간은 어떻게든 만들면 되는 법이다.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었다는 건 변명에 불과해.”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고마울 것 없다. 나도 손해만 보지는 않을 테니까. 청하상단이 곧 너를 찾아갈 거다. 너무 냉대하지 말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석정후가 눈을 빛냈다.

청하상단이라는 패를 잘만 활용하면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해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언제라도 곤륜산으로 오고. 적어도 네가 머물 자리는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한 마디에 석정후가 빙그레 웃었다.

자리가 있다는 말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서였다.

< 제 78장. 검후(劍后).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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