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8장. 검후(劍后). -02 >
벽우진이 강한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무공을 본 이는 드물었다.
소문으로만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벽우진은 이 상황을 기회로 여겼다.
‘더 이상 몰락한 문파가 아님을 알려줄 필요가 있지.’
용봉전에서 제자들이 엄청난 대활약을 했지만 그건 후기지수들 중에서였다.
딱 후대가 기대되는 정도.
하지만 벽우진이 나서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더구나 상대가 태성전의 우승자이자 천하무림 비무대회의 실질적인 우승자인 검후가 아닌가.
“무례한 부탁을 받아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 무인이 호승심을 느끼는 건 당연한 거니까. 아, 내 나이는 알고 있지?”
“예. 편하게 말씀하세요.”
겉모습은 또래처럼 보였지만 실제 나이 차이는 삼십이 넘었다.
그렇기에 현주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성이는 물러나고. 오늘 하루 고생했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네가 일부러 만든 것도 아닌데. 괜찮아. 내려가서 구경하고 있어.”
“예.”
면목 없다는 듯이 냉하성이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비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주변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자 다들 입을 다물고서 집중하는 것이었다.
“휴식은 필요 없겠지? 힘도 별로 안 쓰던데.”
“보셨나 봐요?”
현주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결승까지 올라오면서 가장 많이 본 게 하품하는 모습이었는데 그래도 용케 자신의 시합을 본 것 같아서였다.
“아무래도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으니까. 보기 싫어도 보이더라고.”
“봐주셔서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요.”
“영광까지. 그럼 시작하지.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스르릉.
현주혜는 대답 대신 검을 뽑았다.
넣은 지 얼마 안 된 검을 쥐고서 날카로운 눈으로 벽우진을 주시했다.
그런데 시작하자는 말을 꺼냈음에도 벽우진의 자세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 다가왔던 모습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근데 빈틈이 없다.’
현주혜의 동공이 흔들렸다.
단순히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것뿐인데 놀랍게도 빈틈이 없었다.
어느 곳 하나 노릴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아직 벽우진은 검조차 뽑지 않은 상태였다.
‘권각술에도 일가견이 있으니 검이 있든 없든 상관은 없겠지. 근데, 자존심은 상하네.’
벽우진이 강하다는 건 그녀도 잘 알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앞에 서보니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꿀꺽.
보는 것만으로도 막막함을 느끼게 만드는 벽우진의 모습에 현주혜가 침을 삼켰다.
어렵게 얻은 자리인 만큼 흘러가는 시간조차도 아까웠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달려들 생각은 없었다.
‘말리는 순간 끝이야.’
힘들게 얻은 기회를 허망하게 날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기에 현주혜는 신중하게 벽우진을 주시하며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조금씩 변화를 주어 빈틈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으음!’
하지만 벽우진은 조금의 방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심유한 눈빛으로 그녀를 따라 천천히 방향을 틀기만 했다.
딱히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조금의 방심도 하지 않는 벽우진의 모습에 현주혜는 결단을 내렸다.
이대로는 쓸데없이 시간만 흐를 것 같아서였다.
파파파팟!
결단을 내린 것과 동시에 그녀의 기도가 달라졌다.
착 가라앉아 있었던 그녀의 기도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벽우진에게로 예리한 기세가 쇄도했다.
의형살인강이라고도 불리는 무형강기가 사방에서 그를 노리며 쏘아졌던 것이다.
푸스스스···.
그러나 맹렬한 기세로 날아가던 무형강기는 벽우진의 근처에 다가가기 무섭게 힘을 잃었다.
폭풍이 한순간에 미풍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바스러지는 광경에 현주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무형강기에는 무형강기라는 듯이 벽우진이 너무나 쉽게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자 분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우우웅!
방금 전의 일격은 시작이었다는 듯이 현주혜가 공력을 가일층 끌어 올렸다.
동시에 땅을 박찼다.
무형강기로 벽우진의 사방과 머리 위를 공격하면서 자신 역시 검을 뿌렸던 것이다.
쩌저저적!
두 사람의 무형강기가 충돌하자 비무대 바닥이 사정없이 갈라졌다.
둘의 기운을 비무대가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빈틈이 없다면, 억지로라도 만들 수밖에!’
천하무림 비무대회에서는 우승자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는 도전자였다.
그렇기에 현주혜는 망설이지 않았다.
신중한 것은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시간만 보내기도 싫었다.
“진즉에 그렇게 나왔어야지.”
무형강기로 휘몰아치면서 그 틈을 타 기습적으로 검을 찔러 넣는 현주혜를 바라보며 벽우진이 씨익 웃었다.
아무리 후배라지만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건 지루해서였다.
스슥.
뒷짐을 진 채로 서 있던 벽우진이 한줄기 섬광처럼 파고드는 검극을 힐끔거린 후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반 보를 움직이지 않고 허리만 움직여서 현주혜의 찌르기를 피해냈던 것이다.
“흡!”
그러나 그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봤음에도 현주혜는 놀라지 않았다.
도전자의 입장이었기에 벽우진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피하든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서 공격을 펼쳤다.
찌른 상태에서 검을 비틀어 그대로 횡 베기를 펼친 것이다.
스웅.
예리한 현주혜의 일검이 벽우진의 몸을 갈랐다.
하지만 현주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손맛이 전혀 없다는 건 한 가지를 뜻해서였다.
쉬이익!
예상대로 갈라졌던 벽우진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현주혜의 검은 잔상을 베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그녀는 몸을 돌렸다.
쩌어어엉!
몸을 돌린 현주혜는 곧바로 검을 끌어 당겼다.
검면으로 몸을 보호하듯 상반신을 가렸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벽우진의 손등이 검신을 가격했다.
“큭!”
“감이 좋은데? 아니,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감인가?”
마치 날벌레를 쫓듯이 가볍게 휘두른 손등이었지만 그 안에 실린 힘은 강대하기 그지없었다.
수십 년을 수련한 그녀의 중심을 단번에 무너뜨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두 발자국의 뒷걸음질로 충격의 대부분을 흘려보낸 현주혜는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접근한 이 상황을 놓칠 수 없어서였다.
‘전력으로 간다!’
입술을 앙다문 현주혜가 보타문의 절학을 극성으로 펼쳤다.
이윽고 그녀의 검에서 새하얀 검강과 함께 수많은 검들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검해(劍海)인가.”
벽우진이 사뭇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웬만한 이해가 아니고서는 펼칠 수 없는 검공이었기에 순수하게 감탄했던 것이다.
단순히 공력이 많다고 해서 펼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벽우진은 놀란 얼굴로 우장을 활짝 펼쳤다.
콰콰콰쾅!
이윽고 벽우진의 장심 앞에서 펼쳐진 호신강기에 검해가 쏟아졌다.
노도와 같은 기세로 거칠게 벽우진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하지만 현주혜의 공격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정면에서는 검해를 펼치면서도 무형강기를 쉴 새 없이 조종해 벽우진의 뒤를 노렸다.
‘이것 봐라?’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이 이번 공격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현주혜의 모습에 벽우진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순무식하게 밀어붙이는 것 같지만 노리는 게 따로 있다는 것을 벽우진은 알 수 있어서였다.
‘엉큼하긴.’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녀가 노리는 게 무엇인지 알기에 실소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제대로 해볼까나. 후배가 이렇게 처절하게 달려드는데.’
벽우진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진지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드는 후배에게 예의를 다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곧 기세에 드러났다.
후우우웅!
단순히 마음을 달리 먹은 것만으로도 벽우진의 기세가 달라졌다.
지금껏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흐릿하던 존재감이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솟구쳤던 것이다.
퍼퍼퍼펑!
단순히 기운을 일으킨 것뿐인데도 현주혜의 무형강기가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현주혜는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귓가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서였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방금 전까지는 그저 어울려 준 것에 불과했다.
어디 한 번 마음껏 날뛰어보라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녀가 마음대로 공격했던 것이고.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터였다.
쩌어어억!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녀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던 검해가 갈라졌다.
한줄기 검광에 그녀가 펼친 검해가 너무나 무기력하게 양분되었던 것이다.
“흐아압!”
도도하게 검해를 가르며 다가오는 벽우진의 일검을 향해 현주혜는 오히려 달려들었다.
피하기보다는 정면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좋은 선택.”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지만 정확하게 뻗어나가는 검격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드는 현주혜의 모습을 보며 벽우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한다고 될 공격이 아니란 걸 알아차린 게 대견해서였다.
꽈아앙!
벽우진의 검과 현주혜의 검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러자 귀청이 찢어질 법한 굉음이 비무대에서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공력을 잔뜩 머금은 검이 부딪치니 자연스레 무지막지한 폭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쩌저저적!
그뿐만 아니라 비무대도 남아나질 않았다.
잔금이 가 있던 비무대가 이번 격돌로 인해 수십 개의 깊은 고랑이 파였다.
휘이익!
하나 현주혜에게는 딱히 변수가 되지 않았다.
허공을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그녀에게 지면의 상황은 크게 중요치 않아서였다.
지금만 하더라도 허공답보를 자연스럽게 펼치는 모습에 관중석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쌔애애액!
폭발에도 밀려나지 않았던 현주혜는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환검을 극성으로 펼쳤던 것이다.
하나하나가 허상이지만 진짜이기도 한 아홉 개의 검격이 벽우진의 전신사혈을 노리고서 파고들었다.
까앙! 깡!
그러나 벽우진도 만만치 않았다.
단순하지만 간결하게 현주혜의 공격을 모조리 튕겨냈다.
그뿐만 아니라 무형강기로도 그녀를 끈질기게 몰아붙였다.
스극. 스그극.
보이지 않기에 더 위협적인 무형강기가 끊임없이 그녀를 노렸다.
심지어 은밀하게 스며들었기에 그녀로서는 순간순간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상대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건 너무···!’
현주혜가 몸을 비틀었다.
강맹한 검격을 피하기 무섭게 벽우진의 좌장이 그녀의 단전을 노리며 파고들어서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파파파파팡!
활짝 펼쳐진 벽우진의 좌수에서 다섯 줄기의 지풍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그것도 지척에서 뿌려지는 공격이었기에 현주혜는 다급하게 호신강기를 펼쳤다.
“소용없어.”
현주혜의 뇌리로 짧은 한 마디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말에 그녀는 가일층 공력을 끌어 올렸다.
전력을 다해 호신강기를 펼쳤던 것이다.
쩌저적!!
그리고 그 순간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호신강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걸 들음과 동시에 현주혜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호신강기를 방패삼아 몸을 날린 것이다.
“흡!”
그런데 허공으로 솟구치기 무섭게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덮었다.
마치 이렇게 움직일 거라고 예상했다는 듯이 벽우진이 현주혜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콰아앙!
눈이 마주친 순간 벽우진은 망설임 없이 무상검을 휘둘렀다.
무자비하게 그녀를 내리찍었던 것이다.
“크윽!”
가까스로 검을 들어 참격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충격은 어쩔 수 없었다.
워낙에 강력한 일격이었기에 현주혜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이내 번개같이 몸을 일으켰다.
이어질 후속 공격에 대비한 것이다.
스슥!
과연 예상했던 대로 벽우진의 신형이 순식간에 접근했다.
예의 무시무시한 검강을 일으킨 채로 그녀에게 휘둘렀던 것이다.
‘이번에는 밀리지 않아!’
< 제 78장. 검후(劍后).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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