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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251화 (251/325)

< 제 78장. 검후(劍后). -01 >

강호명숙들이 대거 출전한 태성전도 어느새 준결승까지 치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경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점점 더 뜨거워지는 열기와 달리 벽우진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용봉전 때는 그렇게 집중해서 보던 그가 이제는 지겹다는 얼굴로 비스듬히 앉아서 비무대회를 지켜봤던 것이다.

“표정이 너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으니까.”

제갈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참 거침없이, 여과 없이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위험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적고. 일단 하성이가 비무대 위에 있고, 여차하면 무제나 권제가 있잖아? 내가 나설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지켜봅니다만.”

“에이. 다들 알 텐데 뭐. 내 성격이 어떤지.”

“아까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의 모습하고 너무 비교된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제갈현이 에둘러 비무대회에 집중해줄 것을 권했다.

비무대회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그런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서였다.

“비교될 수밖에 없지. 본 파에서는 출전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렇기에 더더욱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성이가 잘하고 있는데 뭘. 흐아암!”

벽우진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런데 웃긴 건 벽우진이 그러거나 말거나 다들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허허허.”

“안 가고 앉아 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진짜 고민했거든. 이 자리를 민호 녀석에게 넘기고 갈까, 아니면 눈이 벌게져 있는 녀석들에게 넘겨줄까 진지하게 고민했었지. 만약 양보한다고 하면 달려들 녀석이 적어도 열 명은 넘을 걸?”

“그럴 겁니다.”

제갈현 역시 심심찮게 느끼고 있었다.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이곳으로 향하는 열망어린 시선을 말이다.

“난 사실 이런 자리에 딱히 관심 없어. 오히려 애들이랑 구경하는 게 더 편해. 해줄 말도 많고.”

비무대 위에서는 굉음과 폭발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로 인해 대결하는 두 무인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했다.

흙먼지도 흙먼지지만 워낙에 움직임이 빠르다보니 평범한 사람들의 육안으로는 쫓기가 힘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관중들은 열광했다.

“장문인을 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태성전의 참가자들이요.”

“도발적인 눈빛은 이미 많이 받고 있어.”

“그만큼 동기부여가 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왜들 그렇게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무제도 있고 권제도 있는데. 남궁가주야 무서워서 못 덤벼드는 거겠지만. 아, 내가 혹시 만만해 보이나?”

벽우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그 말에 제갈현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호승심이 과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흠.”

제갈현의 말에도 벽우진은 여전히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턱을 쓰다듬으며 묘한 눈으로 비무대 위를 쳐다봤던 것이다.

“확실히 중원무림은 저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수들이 계속 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요. 모용세가도 모용휘로 인해 다시 재건될 테고요.”

“오대세가의 자리를 노리던 이들이 악착같이 찍어 누르겠지.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겨내야 하지요. 본가 역시 그래왔고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걸 저 녀석은 알까.”

벽우진의 시선이 용봉전의 우승자에게로 향했다.

준우승자인 남궁혁과의 혈전으로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음에도 모용휘는 비무대 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더 강해지겠다는 열망이 두 눈에서 활활 불타올랐던 것이다.

“모르지만 패기로 밀어붙이는 게 또 젊음이지 않겠습니까.”

“부럽다. 나도 그 패기 좀 가지고 싶다.”

“···이미 충분히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말투가 묘한데?”

벽우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제갈현을 쳐다봤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그런데 제갈현의 반응도 묘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개방과 협조해서 천하무림 비무대회 기간 동안 샅샅이 수색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딱히 발견한 것이 없습니다.”

“말 돌리는 걸 보니까 더욱 수상한데.”

“흠흠! 장문인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뭐 넘어가주지. 난 사소한 걸로 질척거리는 성격은 아니니까.”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그 역시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했었고.

“쉽게 색출해내지 못할 거라고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흔적 정도는 찾아내지 않을까 했는데 아직까지는 별다른 성과가 없습니다.”

“마교도라고 다 무공을 익힌 건 아니니까. 그리고 마공을 숨기는 방법도 많이 있을 테고.”

“중원인 중에서도 마공을 익힌 이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제갈현의 이마에 주름이 많아졌다.

마음먹고 수색하는데도 정작 성과는 미비해서였다.

“아예 안 왔을 수도 있고. 그 녀석들은 일단 때려 부수는 걸 좋아하잖아. 암계나 귀계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지.”

“과거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은 또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교주의 성향에 따라 방식은 달라지는 법이니까요.”

“글쎄. 난 쉽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벽우진이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다고 하지만 천년마교의 성향이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저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하지만 책사는 기본적으로 변수에 신경 쓸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이 변수이니까요.”

“예를 들면 저 아이처럼?”

“변수라면 변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좋은 변수입니다.”

준결승전임에도 조금도 긴장한 기색 없이 노고수를 가볍게 때려눕히는 현주혜의 모습에 제갈현이 웃었다.

저런 변수라면 그는 언제라도 두 손을 번쩍 들고서 반겨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태성전의 우승자가 나온 것 같은데.”

“형산파의 고수도 만만치 않습니다만. 그래도 결승까지 올라온···.”

제갈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심판의 배려에도 곧바로 결승전을 시작한 현주혜가 상대로 올라온 형산파의 고수를 단 일검에 날려 보내서였다.

단 한 방으로 실격패를 만들어버리는 광경에 제갈현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도 지겨웠던 모양이야. 흐흐흐!”

결승전답지 않게 너무나 싱겁게 끝난 대결에 제갈현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잔뜩 기대한 결승전이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서였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충격을 받은 이는 형산파의 고수였다.

“이게, 무슨···.”

그는 그저 막기만 했을 뿐이었다.

한데 너무나 허망하게 결승전이 끝나버렸다.

고군분투 끝에 결승전까지 겨우겨우 올라왔는데 말이다.

“시합 종료!”

허탈함에 말을 잇지 못하는 형산파의 고수를 잠시 응시하던 냉하성이 손을 번쩍 들며 시합 종료를 알렸다.

당혹스럽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규칙은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순간의 방심으로 승부가 갈리는 것 또한 비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소이다.”

검을 집어넣은 후 정중히 허리를 숙이는 현주혜의 모습에 여전히 멍한 얼굴로 서 있던 노고수가 힘겹게 대답을 한 후 몸을 돌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받아들여야 했다.

방심한 자신이 잘못이지 그걸 노린 현주혜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태성전의 우승자는 보타문의 현주혜입니다!”

“꺄아아악!”

“최고다!”

“고맙다! 덕분에 한탕 했다!”

관중석에서 온갖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유달리 여인들의 반응이 열렬했다.

뭇 남성들을 죄다 쓰러뜨리고 현주혜가 우승하자 묘한 감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반면에 몇몇 남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우승 소감을 말씀하시죠.”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럼 지금 보고 싶은 사람은요? 그 분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됩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에 귀가 아파올 지경이었지만 현주혜의 얼굴은 담담했다.

시종일관 무덤덤한 얼굴로 서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결승전까지 오면서 그녀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강해. 역시 검후라는 건가.’

오늘은 심판으로서 이 자리에 있었지만 냉하성 역시 한 명의 무인이었다.

또한 괴성이라 불릴 정도의 고수가 그였다.

그렇기에 냉하성은 그 어떤 참가자들보다 현주혜의 무경을 가장 깊게까지 볼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건가요?”

“예. 지금 이 순간은 현 소저를 위한 시간이니까요.”

“그럼.”

냉하성의 대답에 현주혜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사부가 앉아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

갑자기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제갈현의 두 눈에 의문이 서렸다.

보통은 사부나 사형제들을 찾는데 뜬금없이 이곳을 쳐다보니 의아했던 것이다.

“곤륜의 벽 장문인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응?”

누가 우승을 하던 관심 없다는 듯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벽우진이 퍼뜩 놀랐다.

아이들에게 복기를 어떻게 시켜야 하나 고민할 때 갑자기 그의 이름이 들려서였다.

“장문인께 한 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뭐야?”

갑작스러운 현주혜의 도전장에 관중들이 술렁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각 파의 수장들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근데 보고 싶기는 하다.”

“그치? 사실 나도. 언제 또 패선의 무위를 볼 수 있겠어?”

그런데 그때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현주혜가 던진 돌이 어마어마한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열기에 냉하성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 참.”

설마 하니 현주혜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냉하성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그는 옆으로 삐딱하게 앉아있는 벽우진을 슬쩍 쳐다봤다.

암만 생각해봐도 그의 손을 떠난 일인 것 같아서였다.

“우리도 보고 싶다!”

“패선! 패선!”

“검후! 검후!”

들불처럼 일어난 기대감이 삽시간에 관중석을 집어삼켰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벽우진의 무위를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다들 한 마음 한 뜻으로 바랐던 것이다.

동시에 다들 궁금해 했다.

천하제일인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벽우진이 어떤 무공을 보여줄지 말이다.

“장문인.”

제갈현이 얼굴 가득 난감한 기색으로 벽우진을 불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 역시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 뭐.”

“예?”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제갈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알고 있는 벽우진은 이렇게 쉬운 인물이 아니어서였다.

“거절하면 계속 달라붙을 걸. 처음부터 날 목표로 하고 있었어.”

“검후가 말씀이십니까?”

“응. 착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벽우진은 태성전의 예선전이 치러지던 때를 떠올렸다.

처음 현주혜를 봤을 때 그녀는 정확히 벽우진을 응시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그만을 말이다.

“불편하시면 따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제갈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굳이 이 많은 관중들 앞에서 벽우진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위신도 위신이지만 체면도 걸려 있었기에 제갈현은 추후를 논했다.

“뭐 하러 그래. 번거롭게. 이미 판도 벌어져 있겠다, 장소도 마련되어 있겠다. 그냥 하면 되지.”

“하지만···.”

“하성이도 심판을 보고 있는데. 괜찮아.”

벽우진은 손을 휘휘 저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안 나서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 수도 있었고.

그리고 달리 생각하면 기회이기도 했다.

‘본 파를 알릴 수 있는 기회 말이지. 지금까지는 소문만 무성했으니까.’

< 제 78장. 검후(劍后).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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