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7장. 본선 -02(10권 끝) >
당민호의 시선이 바람에 펄럭이는 거대한 대진표로 향했다.
만약 이 경기에서 남궁혁이 승리한다면 다음 경기에서 양일우와 붙을 수 있었다.
전제조건이 양일우가 상대를 이겨야 한다는 점이었지만 당민호가 보기에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지금 보이는 경기처럼 두 번째 경기는 양일우의 우세가 점쳐졌기에 어쩌면 그의 예상처럼 양이추가 그럴 노릴 지도 몰랐다.
‘자신이 이길 수 없다면 형을 위해 최대한 물고 늘어지겠지. 체력과 공력의 소모를 최대한 이끌어내는 식으로.’
어떻게 보면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당민호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궁 공자도 알고 있을 걸요?”
“그럴 테지. 외로운 싸움은 저 녀석 역시 마찬가지니까.”
“타도 곤륜파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그 말 엄청 들었는데.”
당소윤은 문득 비무대회에 참가하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마치 공공의 적인 것처럼 수많은 참가자들이 타도 곤륜파를 외쳤다.
평소라면 남궁세가나 소림사, 무당파를 집중 견제했을 이들이 말이다.
“그럴 수밖에. 본선에 가장 많은 인원을 진출시켰으니까. 또 워낙에 관심이 크기도 했고.”
“그래서 더 대단한 거 같아요. 아예 대놓고 잡아먹겠다고 달려들었는데도 끝내 본선까지 올라왔으니까요.”
“그 사부에 그 제자들인 게지.”
당민호의 눈동자에 언뜻 부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개인의 무공과 명예뿐만 아니라 인복까지도 다 가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웃긴 건 단순히 인복이라고 치부하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다.
벽우진의 제자들 중에서 특출나다고 할 수 있는 이는 양일우, 양이추 형제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둘은 입문시기가 다른 명문세가나 대문파에 비하면 엄청나게 늦었다.
한데 벽우진은 그 둘을 구룡 못지않은 후기지수로 키워냈다.
‘아무리 비천단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지만 내공만 많다고 해서 저 정도 수준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공력이 많으면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고하의 절대적인 기준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벽우진의 제자들은 공력만 많은 게 아니라 그 힘을 효율적으로,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알았다.
그 말인 즉 각고의 노력을 했다는 뜻이었다.
‘마음씨도 어찌 그리 하나같이 착한지.’
성깔은 있지만 그것을 벽우진 앞에서는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는 아이들의 모습에 당민호는 짙은 부러움을 느꼈다.
혈족으로 이루어진 사천당가에서도 보기 드문 광경이어서였다.
콰앙! 쾅!
당민호가 생각에 잠긴 사이 16강전의 첫 번째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대로 경기는 시작부터 지저분하게 진행되었다.
양이추가 죽어라 남궁혁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지더라도 쉽게 지지는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나름 재미있겠어.”
“장문인은 다르겠지만요.”
“어쩔 수 없지. 자기 제자인데.”
당민호의 시선이 열다섯 개의 자리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자신의 오랜 친우에게로 말이다.
비무대를 바라보는 남궁진의 두 눈에 은은한 감탄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가 바라보는 이는 아들이 아닌 양이추였다.
속절없이 밀리면서도 끝끝내 치명적인 공격을 피해내는 모습도 모습이지만 승기가 기울었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분명 스스로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이추는 포기하지 않았다.
스극.
아들의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이 살갗을 갈라도, 상처에서 피가 솟구쳐도 양이추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남궁혁에게 달려들었다.
애초부터 자신은 도전자였다는 듯이 말이다.
털썩!
“···졌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끝내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남궁진에게는 깊은 여운을 주었다.
“수고하셨소.”
“남궁 소협도요.”
“그대 형제들은 나를 참 힘들게 하는 것 같소. 용봉회 때도 그러더니.”
“그렇기 때문에 다음 경기가 더 재미있어지지 않겠습니다.”
남궁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양이추가 자신을 죽어라 물고 늘어졌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짝짝짝.
그때 비무대 위로 박수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바로 벽우진의 박수소리였다.
뒤이어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멋진 승부를 보여준 두 사람을 응원하는 환호성이었다.
“사부님···.”
하지만 양이추의 시선은 오직 벽우진에게 향해 있었다.
열심히 했지만 결국 패배했기에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해 벽우진은 더욱더 강하게 박수를 쳤다.
지긴 했지만 정말 잘 싸워서였다.
“애썼다. 고개를 들어. 이걸로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거리가 상당했음에도 벽우진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 소리에 양이추는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눈가를 소매로 슥슥 비비고는 비무대 아래로 향했다.
‘쉽지 않겠어.’
한편 남궁진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아직 16강전의 두 번째 경기가 시작하지 않았지만 다음 상대는 양일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그 경기에서 양일우가 체력과 공력을 상당히 보전한 다음에 남궁혁과 붙는다면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이긴다고 해도 그 마음이 문제야.’
예선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본선 역시 장기전이었다.
승자는 계속해서 경기를 치러야 하는 만큼 몸 상태를 관리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그걸 알고 양이추 역시 죽어라 매달린 것일 테고.
“축하해.”
“저는 오히려 양 소협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저런 근성은 누구나 쉽게 보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게다가 다음 상대가 양일우일 가능성이 크니···.”
순수한 벽우진의 축하에도 남궁진의 안색은 어두웠다.
양이추도 대단했지만 그보다 더욱 뛰어난 이가 양일우였다.
무당산에서 열렸던 용봉회 때는 남궁혁이 승리했지만 그건 과거였다.
시간이 제법 흐른 만큼 이제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재미있지 않겠어?”
“···괜찮으십니까?”
“승패는 병가지상사야. 애들이 목표했던 대로 우승하면 너무나 기쁘겠지만 실패해도 괜찮아. 비무대회가 이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실패를 함으로써 배우는 것 역시 있을 테니까.”
“의외로 연연하지 않으시는군요.”
남궁진이 정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과는 많이 다른 반응이어서였다.
평소 제자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만큼 당연히 기대도 클 줄 알았는데 그와 정반대의 모습에 남궁진은 살짝 놀랐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뭘. 그건 남궁가주 아들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게 말씀하시니 확실히 마음이 편안해지긴 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부담주지 말자고. 가뜩이나 긴장해 있을 텐데. 꽉 조일 때가 필요한 것처럼 살짝 놓아줄 때도 필요한 법이야.”
남궁진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별 거 아닌 말이었는데 그에게는 이상하게 크게 다가와서였다.
느닷없이 마음속에 하나의 파문이 일었다고나 할까.
“할 수만 있다면 장문인의 그 말씀을 참가자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습니다.”
“말해준다고 해서 들리겠어? 지금 다 정신없을 텐데.”
남궁진이 조용해지자 슬그머니 대화에 참여했던 제갈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서였다.
하지만 꼭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말이기도 했다.
모두가 언제나, 늘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만 말했으니까.
‘심지어 나조차도 말이지.’
기대는 욕심이 되어 자연스럽게 강요 아닌 강요를 하게 되었다.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윽박지르고 독촉했던 것이다.
정작 자식들이 원하는 것은 묻지 않은 채 말이다.
‘어쩌면, 아니 그래서였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혈족이라는 단어로 묶여 있는 자신이나 남궁진보다 오히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곤륜파가 더욱 끈끈해 보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본산제자들 뿐만 아니라 속가제자들 역시 결속력이 엄청나다는 점이었다.
정작 벽우진은 다정다감함과는 거리가 엄청나게 먼 성격이었는데 말이다.
남궁진과 제갈현이 각자 자기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비무대회는 계속되었다.
동시에 벽우진의 박수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16강전에서 양이추에 이어 심대혜가 탈락하고, 8강전에서는 심대현과 양일우가 분전 끝에 패배했다.
그리고 이어진 4강전에서는 두 명이나 오르는 저력을 보여주었으나 안타깝게도 도일수와 서예지마저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짝짝짝짝!
하나같이 아쉬움에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었지만 벽우진은 오히려 웃으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제자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처절하게 싸웠음을 그는 알고 있어서였다.
“우승자보다 곤륜파 제자들의 인상이 더욱 깊게 남겠습니다, 아미타불.”
“그래도 우승자에 비할 바는 안 되지.”
결승전의 두 주인공은 남궁혁과 모용휘였다.
당대 천하제일가라 불리는 남궁세가와 이제는 몰락한 모용세가의 후예가 결승에서 맞붙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몰락해서 잊힌 가문이지만 한때 모용세가는 남궁세가 못지않은 위세를 가졌던 가문이었다.
또한 잠시나마 천하제일가라 불렸던 시절도 있었고.
“그만!”
“크아아아!”
심판을 맡은 냉하성의 외침과 함께 비무대 위에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치열한 접전 끝에 모용휘가 끝내 남궁혁을 쓰러뜨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한끝 차이로 승부를 결정지은 모용휘는 끌어 오르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자 그것을 참지 못하고 분출했던 것이다.
“제갈가주가 원하는 대로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군. 그것도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남궁혁을 제압하면서 말이야.”
“모용세가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남궁가주의 기분은 좋지 않으시겠지만···.”
제갈현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자연스레 그도 들을 수밖에 없어서였다.
그런데 의외로 남궁진은 호쾌하게 웃었다.
“벽 장문인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승패는 병가지상사이지 않나. 게다가 이번 승부는 운이 꽤 작용하기도 했고. 그리고 너무 지지 않는 것도 좋지 않아.”
아직도 충격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남궁진은 오히려 웃었다.
자기가 최고라는 자만에 빠지는 것보다 한 번쯤은 이렇게 충격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격차를 느끼며 패배한 것도 아닌 만큼 남궁혁은 이번 패배를 계기로 삼아 더욱 절차탁마할 터였다.
“용봉전의 우승자는 모용세가의 모용휘입니다!”
“크흐흑!”
“장하다, 모용휘!”
“우아아아!”
세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냉하성이 용봉전의 우승자를 공표했다.
그러자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관중석에서 터져 나왔다.
모용휘의 울음소리를 한순간에 가려버리는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관심이 모용휘에게 쏠릴 때 벽우진은 조용히 본선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사부님···.”
“왜 울상이야? 다들 너무나 잘해주었는데.”
벽우진이 한곳에 모여서 결승전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밝은 표정과 달리 제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였다.
마치 면목 없다는 듯이 말이다.
“···죄송합니다.”
양일우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모두가 입을 떼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그가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입만 열었을 뿐 양일우도 벽우진을 쳐다보지 못했다.
와락!
“고생했다. 충분히, 아니 다들 너무나 잘해주었어. 최선을 다한 것이면 되었다. 꼭 이겨야만 하는 건 아냐. 승리는 반드시 이겨야 할 때만 이기면 된다.”
양일우를 시작으로 벽우진은 제자들을 하나하나 꽉 껴안아 주었다.
그러자 심대혜와 심소혜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진심이 담긴 위로와 격려에 끝내 눈물이 터졌던 것이다.
“으아아앙!”
“잘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안기기 무섭게 대성통곡을 하는 심소혜의 등을 두드리며 벽우진이 다른 제자들과도 눈을 맞췄다.
< 제 77장. 본선 -02(10권 끝)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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