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7장. 본선 -01 >
벽우진이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청민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비무대는 하나지만 인원이 확 줄은 만큼 저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준비는 해놓았겠지. 네 말마따나 오늘 끝날지도 모르니까.”
벽우진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평소와 달리 착 가라앉은 기색의 제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참가했던 여덟 명 전원이 본선에 진출했지만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첫 경기부터 서로 부딪칠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에 다들 시작 전부터 긴장해 있었다.
“조 추점이야 얼마 걸리지 않을 테고요.”
“마음먹고 하면 금방 끝나겠지만, 과연 그럴까? 어떻게 보면 본선보다 더 재미있는 구경거리인데.”
“그건 그러네요. 확실히 조 추점을 하면 쫄리는 맛이 있으니까요.”
“내 말이.”
이제는 못 알아보는 사람보다 알아보는 사람이 훨씬 많아져서 그런지 마련된 자리로 가는 길이 그리 힘들지만은 않았다.
그냥 걸어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던 것이다.
딱히 눈초리를 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셨습니다, 장문인.”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 근데 자리가 딱 열다섯 개뿐이네?”
뒷짐을 지고서 걸어가던 벽우진이 비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마련된 자리를 쳐다보며 제갈현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제갈현은 단번에 이해했다.
“열다섯 개면 충분하지요.”
“어후. 저기 앉으면 물도 편하게 못 마시겠는데?”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주변에 앉아 있는 군소방파와 무문들의 수장이 하나같이 뜨거운 눈빛으로 열다섯 자리를 힐끔거리는 걸 볼 수 있어서였다.
심지어 열다섯 개의 의자가 놓인 곳은 다른 곳과 차별을 두기 위해서인지 높이가 달랐다.
거의 비무대와 비슷한 높이에 벽우진은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별석인데 당연히 저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심판 선에서 잘 정리될 것 같은데.”
“근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모르니까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도 있고.”
“이유가 있으니 저렇게 한 것이겠지만, 말이 꽤 많이 나오겠어.”
“반대로 저 자리에 앉기 위해 많은 곳들이 노력하겠지요. 자리는 정해져 있으니 당연히 경쟁이 붙지 않겠습니까.”
제갈현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적당한 경쟁심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게다가 영원한 것은 없었다.
지금의 오대세가들 역시 위기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근데 제갈가주 밖에 안 온 거야?”
“예. 장문인께서 두 번째입니다.”
“청민이랑 아이들은?”
벽우진의 시선이 청민과 배혁문, 석정후와 백륜에게로 향했다.
자신이야 저기 준비된 자리에 앉으면 된다지만 일행이 문제였다.
“따로 준비된 자리가 있습니다.”
“혹시 그 자리에 민호가 앉나?”
“예. 열다섯 개의 자리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을 위해서 마련된 자리인지라.”
“잘 되었군.”
벽우진이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청민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벽우진도 없이 당민호를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던 것이다.
“앉자고. 애들 오려면 시간 좀 걸릴 텐데.”
“예.”
체면이나 위신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벽우진이 성큼성큼 계단을 밟고서 의자로 향했다.
그러자 청민 역시 제자와 석정후, 백륜과 함께 안내를 받아서 배정된 자리로 이동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문인.”
하나둘 오기 시작하는 수장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특이한 복장의 장년인이 벽우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온갖 무기로 온몸을 치렁치렁 감싼 장년인이 정중하게 인사해왔던 것이다.
“음?”
“냉하성이라고 합니다.”
“아, 괴성(怪星)?”
특이한 행색과 함께 이름을 듣자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뇌리 한 구석에 있던 인물이 떠오른 것이다.
“맞습니다. 하하.”
“심판을 맡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아, 내 나이가 많으니 편하게 말해도 되지?”
“물론입니다.”
다짜고짜 내뱉는 하대였지만 냉하성은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벽우진의 성격에 대해서는 익히 듣기도 했고, 한 명의 무인으로서 존경하는 영웅이었기에 냉하성은 호탕하게 대답했다.
“보이는 것처럼 성격도 좋네?”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대인배라는 말은 못 듣지만요. 하하핫!”
“굳이 대인배가 될 필요는 없어.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이지.”
“역시 듣던 대로 대단하신 분인 거 같습니다.”
“유별나다는 걸 돌려 말하는 거지?”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냉하성은 절대 아니라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
“절대 아닙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에 드린 말입니다.”
“근데 괴성씩이나 되는 인물이 어떻게 심판 일을 받아들였데?”
“저도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제갈가주가 엄청 찾아왔습니다. 삼고초려가 아니라 칠고초려를 하더라고요. 결국 그 정성과 노력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냉하성이 그때를 떠올리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제갈세가의 가주씩이나 되는 인물이 몇 번이나 자신을 찾아온 게 그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제갈현은 제갈세가의 가주임과 동시에 강호에서는 기성(奇星)이라 불리는 존재였기에 더더욱 당황했었다.
“그야 본선의 심판으로서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실력은 물론이고 가장 객관적으로 판정을 내려줄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와는 딱히 인연이 없기는 하지요. 낭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생활을 했으니.”
“그래도 무공은 제대로 익힌 것 같은데? 욕심이 좀 과해서 그렇지.”
벽우진의 날카로운 한 마디에 냉하성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도 이런 말을 많이 하지만 벽우진이 하니 왠지 심각하게 다가왔다.
“제가 특이한 병기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지요. 하하하.”
“다행인 건 중심을 잘 잡았어. 하고 싶은 대로 막했으면 이도 저도 안 되었을 텐데.”
“역시 정확하십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나나 소림사를 찾아가. 급한 불은 꺼줄 수 있을 테니까.”
“기억해 두겠습니다.”
지금의 이 한 마디가 상당한 선의라는 것을 알았기에 냉하성이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전쟁 후 몸 상태가 달라졌다는 것을 요즘 느끼고 있어서였다.
“그럼 용봉전 본선의 대진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열다섯 개의 자리가 전부 채워지고 용봉전 본선에 올라온 후기지수들이 모두 모이자 진행관이 대진 추첨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보면 본격적인 천하무림 비무대회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다들 잔뜩 기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누가 뭐래도 가장 긴장한 이들은 용봉전 본선에 출전하는 후기지수들이었다.
“후우.”
“이제 시작인가.”
하나 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들 사이에 곤륜파의 제자들이 있었다.
사형제간이지만 한편으로는 경쟁자였기에 다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왕이면 16강전에서 만났으면 좋겠는데.”
“다 같이 8강에 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양이추와 심대현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매서운 눈빛을 보내왔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다들 날카롭게 둘을 쏘아봤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도 만만치 않았다.
“일단은 최선을 다하는데 의의를 두자.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던 것이니까.”
“그렇긴 해.”
양일우의 말에 양이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 보면 천운이 따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천당가의 경우 삼 남매 중 단 한 명만 본선에 올라왔으니까.
“그럼 한 명씩 나와 주세요!”
예선전과 달리 크기부터가 달라진 비무대 위에서 진행관이 소리쳤다.
그리고 그 뒤로는 숫자만 적힌 여백이 크게 펼쳐져 있었다.
저벅저벅.
진행관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하나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진출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누가 가장 먼저 움직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당 소협.”
“당 공자.”
놀랍게도 가장 먼저 움직인 이는 당주혁이었다.
서릿발 같은 기세를 풀풀 날리며 그는 혼자서 진행관에게 다가갔다.
“우리도 가자.”
“예.”
뒤이어 양일우가 대표로 앞장섰다.
굳이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인원이 적은 만큼 대진 추첨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천하무림 비무대회가 시작되었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명장면들이 말 그대로 쏟아지는 모습에 관중들의 함성이 분지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비무대 한 쪽에 마련된 강호명숙들이 앉아 있는 곳의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으음!”
자신들의 제자가, 혹은 아들이 밀리거나 쓰러질 때마다 다들 일희일비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기뻐하는 이들은 없었다.
아무래도 다 같이 앉아 있는 만큼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서였다.
“아이고!”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유독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이 역시 분명히 존재했다.
“할아버지!”
“이런, 내가 너무 흥분했네.”
삽시간에 집중되는 시선에 당민호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망해 하거나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다.
순간순간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 또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앉으세요.”
“소윤이 넌 분하지도 않느냐?”
“나름 정정당당한 대결이었잖아요. 저희에게 불리한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규칙은 규칙이니까요.”
큰 오라비의 패배에도 당소윤은 의외로 흥분하지 않았다.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어서였다.
그러면서 실전이라면 다를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우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사용할 수가 없는 상태이니. 마비독이라도 사용할 수 있었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게야.”
당민호가 입맛을 다셨다.
독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의외로 크다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 말에 몇몇이 눈살을 찌푸렸다.
비장의 한 수를 쓸 수 없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서였다.
“벽 장문인께서도 속이 쓰릴 것 같아요. 본선 첫 경기에서 두 명이나 탈락했으니.”
“그래도 다섯 명이나 16강에 오르지 않았느냐.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
당민호가 짐짓 부럽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사천당가의 대회는 끝났지만 아직 곤륜파는 남아 있어서였다.
게다가 본선에 여덟 명이나 진출시킨 곳은 곤륜파가 유일했다.
“어쩌면 결승에 오를 지도 모르겠어요.”
“글쎄다. 운이 따른다면 모르겠지만 객관적으로는 힘들지.”
당민호의 시선이 비무대로 오르는 양이추에게로 향했다.
긴장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이었는데 당민호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양이추의 상대가 구룡 중에서도 최강으로 군림하는 남궁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또 모르잖아요. 다른 이들도 아니고 장문인의 제자들인데.”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저 녀석들이 수련한 시간을 생각해 보면.”
“그렇기는 한데···.”
당소윤도 알고 있었다.
상대가 다른 이도 아니고 군자검룡 남궁혁이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이자 10년 전부터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던 인물.
그런 만큼 양이추가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모르겠지만.”
“비무대회는 장기전이라 또 몰라요. 지난 경기에서 남궁 공자의 체력소모도 꽤나 심했으니까요.”
“그건 피차 마찬가지야.”
양이추가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비무대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도전자의 모습으로 남궁혁 앞에 서는 모습에 당민호는 내심 양이추를 응원했다.
아무래도 남궁혁보다는 양이추에게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시작하네요.”
“어쩌면 다른 걸 노릴 수도 있겠는 걸.”
< 제 77장. 본선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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