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48화 (248/325)

< 제 76장. 신성(新星). -04 >

백륜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경쟁자가 갑자기 나타난 만큼 일 공자와 이 공자는 알게 모르게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있을 터였다.

물론 알려진 게 사실이라는 것도 지금쯤은 파악했을 테고.

“암살자가 올 수도 있겠지?”

“···이 공자라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륜의 얼굴이 굳어졌다.

둘 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성격이었지만 그래도 일 공자는 나름 정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공자는 달랐다.

괜히 개차반, 망나니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근데 그 둘째 형도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맞습니다. 아마 중원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바로 이곳일 겁니다. 제아무리 이 공자의 인맥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벽 장문인의 제자를 어쩌지는 못할 테니까요.”

“아마도 사부님께서는 그것까지도 감안하셨을 거야.”

백륜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아무리 그가 석정후를 따르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서였다.

“만사에 귀찮음을 느끼는 사부님이지만 자기 사람은 엄청 아끼셔. 백륜도 그건 알 텐데.”

“예.”

“그리고 의외로 치밀하신 분이셔. 잘 안 드러내서 그렇지.”

석정후가 확신하듯 말했다.

평소에 잘 하지 않는 것뿐이지 벽우진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몇 번이나 증명하기도 했고.

다만 그것들이 엄청난 신위에 가려졌을 뿐.

“안전하기는 하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맞아. 지지기반을 다지기에는 이곳이 썩 좋지는 않지. 하지만 어중간하게 설치다가 훅 갈 수도 있어. 꼭 본가에서만 지지기반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석정후가 눈을 빛냈다.

그는 단순히 무공만 배우는 게 아니었다.

나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모르게 말이다.

“저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도와주고 있어. 그리고 일단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으니까.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돼. 낚시꾼처럼 말이지.”

“경계도 확실하게 서겠습니다.”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기마자세를 취한 채로 석정후가 생각에 잠겼다.

두 형들의 대응도 대응이지만 그는 부친인 석가장주의 반응이 궁금했다.

황금성이라 불리는 가문을 움직이는 자가 바로 그의 부친이었다.

또한 달라진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 빠르게 정보를 입수했을 테고.

‘아직까지 별 말이 없단 말이지. 사부님께도 딱히 서신이 간 게 아닐 테고.’

석정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왔어도 진즉에 왔어야 할 부친의 연락이 아직도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그가 먼저 서신을 보낸 것도 아니었지만.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건가.’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황금성의 주인이 된 사람이 바로 부친이었다.

그런 만큼 생각하는 것 역시 남다를 터였다.

어쩌면 기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기대라.’

석정후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단 한 번도 부친에게서 따뜻한 눈빛을 받지 못했다.

또한 인정 역시 받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반발심에 야망을 가지게 된 것일 지도 몰랐다.

“생각이 많구나.”

“사부님!”

“눈빛에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어.”

“그, 그런가요?”

“근데 나쁘진 않아. 욕심이 있어야 발전도 있는 법이니까. 꿈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고 말이지.”

늘 그렇듯이 뒷짐을 진 자세로 휘적휘적 걸어온 벽우진이 씨익 웃었다.

욕심이 많은 게 꼭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정도라는 거 알고 있지? 과유불급이라고, 과한 건 좋지 않아.”

“명심하겠습니다.”

“걱정이 많겠지만 무공수련을 할 때는 다 잊어버려. 무공수련 한 가지만 생각해. 가끔은 머리를 비우는 것도 필요하니까.”

“예.”

석정후를 시작으로 벽우진은 제자들의 무공을 봐주었다.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제자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물론 가장 크게 신경 쓴 부분은 바로 대련이었다.

전부 다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한 만큼 벽우진은 자신의 경험을 제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 한해서 모조리 가르쳤다.

낮이고 밤이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낙양의 거리와 달리 한적한 곳에 숙소를 잡은 두 사람이 조용히 마주보고 앉아서 차를 들이켰다.

그런데 스물셋, 넷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을 바라보는 노파의 눈빛이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기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직접 보니 어떻더냐?”

“상대들 말인가요?”

“다 알면서 시치미 떼기는.”

노파가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런 노파의 눈빛에도 여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시종일관 담담히 차만 들이켰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마지막에 서로의 눈이 마주친 걸 다 봤건만.”

“오늘 하루 동안 눈이 마주친 남자만 수백 명이에요.”

“끝까지 모르쇠로 나오겠다?”

노파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러자 여인이 결국 졌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봤어요. 마침 저를 보고 있어서.”

“어땠어?”

“소문대로 되게 젊어 보이던데요?”

“그거 말고 느낌말이다.”

노파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봤다.

“별다른 느낌은 없었어요. 그냥 강하다 정도?”

여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눈이 마주쳤을 때 느꼈던 그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였다.

동시에 쉽사리 인정이 되지 않았다.

‘막연함과 아득함이라니.’

먼 거리였지만 서로가 서로를 인지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기에 여인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우리 하나뿐인 제자가 충격을 받은 모양이구나.”

“···그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소림무제와 무당권제마저도 끌어내린 인물이다. 당연히 강할 수밖에. 북숭소림, 남존무당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노파가 피식 웃었다.

그 대단하다는 소림사와 무당파의 최고고수마저도 한 수 접어주는 고수가 바로 패선이었다.

또한 현재 천하제일인에 가장 근접한 무인이라 평가 받는 고수이기도 했고.

“그건 알지만.”

“왜? 네가 최고일 거라 생각했느냐?”

“······.”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네 재능은 분명 대단하다. 노력 역시 누구보다 많이 했지. 하지만 세상은 넓다. 괜히 기인이사들이 모래알처럼 많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저도 경험은 충분히 쌓았습니다만.”

“좀 더 쌓아야지.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네가 한참이나 어리다는 것 아니냐?”

“딱히 위로가 되지 않는데요.”

여인이 새치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꼭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벽을 넘느냐, 넘지 못하느냐였다.

“그래도 간만에 호승심도 생기고 좋지 않느냐. 넘어야 할 산이 있다는 걸 직접 목도했으니까.”

“사실 당장 붙어보고 싶기는 해요.”

잔잔했던 여인의 눈빛에 호승심이 짙게 떠올랐다.

지루했던 오늘의 예선전과 달리 벽우진은 눈이 마주하는 순간 알았다.

이 남자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된다고 말이다.

“그게 쉽게 될까.”

“우승하면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받아줄지 말지는 벽 장문인이 결정하는 것이지. 넌 그저 도전장만 내밀 수 있을 뿐이고. 그리고 붙어보고 싶은 이가 한둘이겠느냐?”

“흐음.”

여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당장 그녀만 하더라도 웬만한 실력자가 아닌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수들을 상대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벽우진도 같은 입장일 터였다.

“어쩔 수 없이 관심을 보이게 만들어야지. 너를 상대하도록 말이야.”

“남은 시간 동안 바짝 노력해야겠네요.”

“쉽지는 않을 거야.”

“지금까지도 쉬웠던 적은 없어요. 하지만 결국 정복했지요.”

여인, 현주혜는 눈을 빛냈다.

모두가 힘들다고,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들을 그녀는 노력 끝에 손에 넣었었다.

그렇기에 이번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이로구나. 네가 그렇게 도전적인 눈빛을 보이는 게.”

“상대가 패선이라면 저는 도전자의 입장이니까요. 당연히 노력해야지요.”

“그럼 남자로서는 어때?”

노파의 눈동자에 짙은 장난기가 서렸다.

제자로서 현주혜는 너무나 완벽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아쉬웠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인 청춘을 보타산에서 보내서였다.

심지어 보타산은 섬에 위치해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세요?”

“무슨 말이긴. 말 그대로의 질문이지. 여자로서 본 남자 벽우진이 어떤가 묻는 거지.”

현주혜가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눈빛으로 스승을 쳐다봤다.

“여러 면에서 너와 나는 비슷하잖아. 검에 청춘을 바쳤으니 이제는 네 인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또 다른 꿈을 저에게 떠넘기시는 건가요?”

“내가 걸어봤잖니. 지금 네가 걷고 있는 길을. 근데 즐거웠던 기억보다는 후회가 더 많았어. 물론 괴롭기만 했던 건 아니야. 나 역시 네가 느끼는 즐거움을 만끽했으니까. 근데 뒤돌아보니 그것뿐이었다. 그 한 가지만의 즐거움만 알 뿐이었지.”

“······.”

과거를 회상하듯 노파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아쉬움이 남겨져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나보다 빠르지. 그러니 조금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쩌면 그게 벽을 뚫는 돌파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저는 사부님과 같이 있을 거예요.”

“나처럼 꼬부랑 할머니가 되려고?”

“그게 어때서요?”

현주혜가 빙긋 웃었다.

보타문은 그녀에게 있어 집이며 안식처였다.

또한 가족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굳이 연애를 하지 않아도, 남자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꼭 그게 나쁜 건 아닌데, 그래도 이왕이면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네 사고들도 늘 말하잖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말하죠. 이번에 같이 나오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나 하나만 감당하면 되니까?”

현주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짙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경쟁자는 좀 보여?”

“없어요. 단 하나도.”

현주혜가 더 이상 그 주제로 대화하는 걸 꺼려하는 듯하자 노파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그게 특효약이었는지 현주혜의 눈빛이 달라졌다.

“우승할 수 있겠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나오지 않은 비무대회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경험적인 면에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의외의 복병을 만나서 본선 첫 대결에 패배할 수도 있어.”

노파가 우려 섞인 눈빛을 보냈다.

제자가 강한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넓었다.

또한 기인이사, 괴짜, 괴물들도 넘쳐났다.

“결과로 보여드릴게요.”

현주혜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녀가 어떤 부분을 염려하는지 알았지만 그녀는 자신 있었다.

예선전을 치르는 동안 수많은 참가자들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기준에 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너무 욕심내지는 말고.”

“예.”

두 사제가 다시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하는 생각은 너무나 달랐다.

퍼퍼퍼펑!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폭죽과 쉴 새 없이 펄럭이는 깃발들을 응시하며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까지 열심히 응원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축제를 즐기는 나름의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선전하고 분위기가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게.”

“얘기를 들어보니까 잘하면 용봉전과 태성전의 본선이 오늘 하루 만에 끝날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결과가 빨리 나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오전에는 용봉전, 오후에는 태성전을 끝내면.”

< 제 76장. 신성(新星). -04 > 끝

ⓒ 윤신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