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6장. 신성(新星). -03 >
“박쥐같은 놈들이야 어디에나 있으니까.”
“비밀리에 접촉은 해볼 생각이지만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꼭 생각했던 대로, 단순하게 움직이지만은 않으니까요.”
“맞아. 그래서 예측하기가 쉽지 않지.”
“욕심이지만 믿을 수 있는 은거고수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아성은 여전히 건재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전력은 북해빙궁과 오독문이 침공하기 전에 비하면 반 이상이 깎여나간 상태였다.
각 파와 각 가문이 계속해서 전력복구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 대화가 안 되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아예 절망적인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여지는 있으니까요.”
“우와아아!”
“기다렸다!”
그때 한곳에서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제 구룡이나 오화가 등장했을 때보다 더한 환호성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 사람이 나온 모양이군.”
제갈현마저 시끄러운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 잠자코 있던 개왕이 입을 열었다.
마치 자신은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던 것이다.
“누군데 그래?”
“태성전의 유력한 우승후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준결승전까지는 무난히 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호오. 준결승까지?”
확신하듯 말하는 개왕의 모습에 벽우진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서렸다.
그리고 그건 제갈현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벽우진의 시야에 비무대 위로 오르는 한 여인이 잡혔다.
말끔한 흑의무복 차림이었는데 흑단 같은 머리카락 때문인지 새하얀 피부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저 사람은···.”
“제법인데?”
제갈현이 말끝을 흐렸다.
그도 알고 있는 인물이어서였다.
반면에 벽우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당한 고수임을 한눈에 알아봤던 것이다.
“보타문주입니다. 대대로 검후(劍后)를 배출하는 문파이지요. 문도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한 명 한 명이 모두 실력자들입니다.”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하네요.”
개왕에 이어 제갈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혼자만 세월을 비껴간 것 같아서였다.
“검후라.”
“후기지수 시절부터 유명했던 분입니다. 보타문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라 불리기도 했고요.”
“그런 것 같네.”
벽우진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저 서 있는 게 전부였지만 벽우진에게는 보였다.
보타문주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말이다.
“참고로 나이가 저와 비슷합니다. 아마 저보다 한 살 아니면 두 살 많을 겁니다.”
“맞아. 제갈가주 또래지. 다른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밖과 교류를 잘 하지 않는 곳이니까요.”
불혹이 한창 지났음에도 여전히 이십대 초반과 같은 미모에 제갈현과 개왕이 놀란 기색을 띠었지만 정작 벽우진은 관심이 없었다.
이른 나이에 환골탈태를 하면 저렇게 노화가 늦게 진행된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재능만 있는 게 아니라 노력도 엄청 했나 보군. 젊은 나이에 환골탈태를 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쩌면 보타문 역사상 역대 최고의 검후일지도 모르니까요.”
“끝났네.”
개왕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비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결이 끝나서였다.
단 일합 만에 상대방을 제압해버리는 검술에 개왕은 역시나란 표정을 지었다.
“우승후보네.”
그리고 벽우진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 일검이었지만 검후의 경지를 엿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죠?”
“응. 일단 한 명은 나왔네.”
“그건 맞습니다만, 보타문은 예상했던 곳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곳이 준동한다면 가장 먼저 서신을 보내기로 결정한 곳이기도 하고요.”
“또 나오겠지. 아직 반도 치르지 않았는데.”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대를 버리기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경기가 많이 남아 있어서였다.
게다가 어제 치러졌던 용봉전 역시 마무리가 안 된 상태였다.
“많이들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천년마교가 긴장할 정도의 고수가요.”
“기인이사가 모래알처럼 많다는 격언에 기대해 봐야지.”
제갈현과 개왕의 시선이 다른 비무대 위로 향했다.
보타문주의 실력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다른 이들을 살펴봤던 것이다.
“응?”
근데 벽우진은 그러지 못했다.
아직 비무대 위에 있던 보타문주가 그를 쳐다보는 것 같아서였다.
‘잘못 느낀 건가?’
강렬한 시선에 벽우진도 보타문주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가 느낀 게 잘못되지 않았다는 듯이 보타문주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미소를 머금고서 그를 마주봤다.
“왜 그러십니까?”
“보타문주가 날 쳐다봐서.”
“지금요?”
묘한 분위기를 느낀 모양인지 개왕이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는 보타문주가 서 있던 비무대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보타문주가 비무대를 내려간 뒤였다.
“왜 쳐다봤지?”
“신기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장문인에 대한 소문은 중원 전역에 퍼져 있으니까요.”
“거기에 한 손을 보탠 게 개방이잖아.”
“아, 아닌데요?”
개왕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잡아뗄 작정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한 것은 아니니까.
물론 그렇다고 책임이 아예 없는 것은 또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뭐 눈도 없고 귀도 없는지 아나?”
“정말 아닙니다. 저는 하늘에 맹세코 이상한 소문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바로 잡지도 않았지.”
“······.”
개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벽우진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이 연신 비무대만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저도 궁금해서 쳐다봤을 확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시겠지만 장문인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엄청 많으니까요.”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할 말이 있으면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보타문의 수장인 검후인데요.”
“그렇겠지.”
벽우진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 궁리해본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고, 굳이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콰앙! 콰콰쾅!
그러는 사이에도 폭발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강기가 난무하자 비무대가 남아나질 못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심판이 호신강기를 펼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동틀 무렵부터 시작된 아침 수련에 석정후가 땀을 뻘뻘 흘렸다.
단순한 달리기였지만 그게 열 바퀴가 넘어가자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평소에 운동을 하던 습관이 없었기에 더더욱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석정후는 뛰는 걸 멈추지 않았다.
“헉헉헉!”
뛰는 거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의 속도였지만 적어도 멈추지는 않았다.
사형제들이 모두 스쳐 지나가도 계속 달렸던 것이다.
“할 수 있습니다, 공자님.”
“마, 말 걸지 마. 죽을 것 같으니까.”
“좀 더 힘내십시오!”
“헥헥!”
그나마 백륜이 옆에서 같이 뛰어주었기에 석정후는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계속 응원해주고 힘을 북돋아주었기에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진짜 대단하네.’
얼굴은 물론이고 전신이 땀범벅이었다.
하지만 그거 가지고 생색을 낼 수가 없는 게 모두의 무복이 젖어 있었다.
뒷마당을 뛰는 사형제들 전부가 내공은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그보다 두 살 어린 배혁문조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뛰고 있었기에 석정후는 이를 악물었다.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숙소에서 뻗어 있을 거 아니면.”
“괘, 괜찮습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아무도 네가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담담히 조언을 건네는 서예지의 말에 석정후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땀을 흘리는 모습조차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게으름을 피우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아무리 바빠도 수련을 빼먹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
“각골명심하겠습니다.”
“걷다가 뛰어도 되니까 무리하지 마. 다쳐서 수련을 못하게 되면 그게 더 손해이니까.”
“예!”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게진 얼굴로 석정후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백륜의 말에 가까스로 대답한 것과는 너무나 상반된 모습이었다.
“너무 차이 나는 것 아닙니까?”
“헤헤헤. 티 났어?”
“엄청요.”
할 말을 다하고 순식간에 튕겨져 나아가는 서예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석정후가 멋쩍게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다르다는 걸 인지할 수 있어서였다.
“근데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 백륜도 알잖아? 저런 분이 조언을 해주시는데.”
“그것도 인정합니다. 오화보다 더 아름다우신 거 같아요. 강인하고. 검봉이라는 별호가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할까요. 특히 검무를 추실 때는···.”
백륜이 침을 꼴깍 삼켰다.
우연찮게 봤던 그 광경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선녀가 검무를 추는 듯한 모습에 백륜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봤었다.
“쉿! 그거 들키면 큰일 나! 나야 상관없지만 백륜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입 싹 닫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요.”
백륜이 손으로 입을 잠그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뿐만 아니라 눈알만 굴려서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들은 사람이 있나 싶어서였다.
“근데 확실히 엄청나기는 했어. 나도 진짜 선녀가 내려온 건 아닐까 했다니까.”
“비무대회 이후로 서 소저 때문에 밤잠 설치는 이들이 엄청나게 늘 것 같습니다.”
“이미 많아. 구환비룡도 들이댔다가 까였잖아.”
“혹시 연심을 품고 계신 건 아니죠? 나이 차이가···.”
백륜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석정후를 쳐다봤다.
같은 남자로서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곱 살 차이는 결코 적지 않아서였다.
‘일단 삼 공자님을 남자로 보느냐가 가장 중요하지.’
백륜이 남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나이에 비해 왜소한 체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장이 빠른 것 또한 아니었다.
딱 열세 살 소년처럼 보였기에 서예지가 석정후를 남자로 볼 가능성은 희박했다.
“무무무, 무슨 소리를!”
“얼굴은 왜 붉히세요? 말도 더듬고.”
“동경이야, 동경! 연심이 아니라!”
“그럼 다행이고요. 이제 하체 단련에 들어가시죠.”
백륜이 달리는 것을 멈췄다.
다들 달리기를 멈추고 기초수련에 들어가는 것을 봐서였다.
“드, 드디어!”
“힘드셨죠?”
“응. 입에서 단내가 나.”
“그래도 한 번에 많이 드시면 안 좋습니다. 입을 한 차례 헹군 후 천천히 드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백륜의 지시대로 석정후는 입 안을 가볍게 헹군 후 조금씩 물을 삼켰다.
물론 자세는 기마자세를 취한 후였다.
하반신을 단련하는데 이것보다 좋은 것은 없기에 석정후는 매일 기마자세로 하체를 단련했다.
조금씩 시간을 늘리면서 말이다.
“언제쯤이면 적응이 될까?”
“적어도 1년은 고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대쪽에서 자신과 똑같이 기마자세를 하고 있는 배혁문을 쳐다보며 석정후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거지 기마자세를 완벽하게 취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부들부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석정후의 두 다리는 사시나무 떨리듯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데 의외로 석정후는 넘어지지 않고 두 팔을 앞으로 뻗어서 나름 균형을 유지 중이었다.
“간략하게 보고 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말해. 기마자세 하면서 들을 테니까.”
“본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원흉은 나겠지?”
“예. 더불어 날아오는 서신도 상당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오는 서신들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었다.
진짜 패선의 제자가 된 것인지 묻는 게 절반 이상이었다.
나머지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 넌지시 떠보고 있었고.
“두 형들한테서 온 건 아직 없지?”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삼 공자님께 큰 관심을 두고 있을 겁니다.”
< 제 76장. 신성(新星).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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