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46화 (246/325)

< 제 76장. 신성(新星). -02 >

당민호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건 어제 그가 위지건을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었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

“이유가 있다고?”

“응. 시작은 저 녀석이 했거든. 대현이가 아니라 다른 애들이랑 만났어도 상황은 비슷했을 거야.”

“도대체 무슨 이유인데?”

몸은 비교적 멀쩡했지만 얼굴은 그야말로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잘생긴 얼굴은 사라지고 불어터진 찐빵처럼 변해 버린 위지건의 모습을 보며 당민호가 물었다.

“우리 애들한테 제대로 도발을 했거든. 보아하니 비무대 위에서도 뭐라고 지껄인 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그렇지 애 얼굴을 저리 만드는 건 심했지.”

“저 정도면 양호하지. 팔다리를 잘랐어, 단전을 박살냈어? 기껏해야 외상 좀 입은 것뿐인데.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수는 있지만, 그건 지가 이겨내야지. 무인의 길을 걸으면서 매번 이길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니까.”

벽우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어디 하나 잘려나간 것도 아니고 무인으로서의 삶이 끝난 것도 아닌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한데.”

“자업자득이야. 대현이가 괜히 그러겠어?”

“근데 궁금하긴 하다. 마지막에 뭐라고 귓속말 했을까?”

“하고 싶은 말 했겠지.”

벽우진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않는 성격이니 꼭 필요한 말을 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무심한 척 하긴. 방금 전까지 엄청 싸고돌았으면서.”

“싸고돌기는. 난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뭐, 무인에게 성깔이 있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그런데 좀 반전이긴 하네.”

“그게 우리 애들 매력이지.”

“요놈은 겁을 잔뜩 집어먹었는데?”

당민호가 씨익 웃으며 석정후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흥분하는 배혁문과 달리 석정후는 겁에 질린 눈으로 심대현을 보고 있어서였다.

“지금까지 상인으로 살아왔잖아. 감안해 줘야지.”

“애 하나 버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사천당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본가가 어때서?!”

당민호의 주름진 이마에 핏줄이 두툼하게 올라왔다.

말투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왜 흥분할까? 네 스스로도 알고 있으니까 그런 것 같은데.”

“전혀! 난 그저 어이가 없어서 그런 것뿐이다!”

“나도 별 뜻 없었어.”

묘하게 말리는 듯한 느낌에 당민호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따져봤자 인정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네 손녀 나왔다.

“끄응!”

벽우진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시선은 당소윤이 올라간 비무대가 아닌 다른 곳에 향해 있었다.

천하무림 비무대회의 둘째 날이 밝았다.

용봉전에 이어 태성전의 예선전이 열렸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진짜 고수들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태성전이었기에 이른 시간임에도 모여든 인파는 어마어마했다.

대충 눈대중으로 봐도 어제보다 더한 인원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더 느는 것 같습니다, 사형.”

“내가 보기에도.”

옆에 앉아 있던 청민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제보다 많은 걸 넘어 정오가 다 되어 가는 시간임에도 인원이 계속 늘어나는 것 같아서였다.

심지어 나무 위에 올라가서 보는 이들도 꽤나 많았다.

“자리를 따로 마련해주지 않았다면 저희들도 저기 어딘가에 있었겠죠?”

“그랬겠지. 어제와 달리 알아보는 이들도 엄청 많았을 테고.”

의외로 자신이나 청민을 알아보는 이들이 적었던 어제를 떠올리며 벽우진이 대답했다.

오히려 그나 청민보다 석정후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았다.

대외적으로 활동이 그리 많지 않고, 아는 사람만 벽우진을 알다보니 일반 양민들이나 평범한 무인들은 벽우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긴가민가하기는 해도 확신하지는 못한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저희들 때문에···.”

“그런 말은 하지 말고. 왜 너희들 때문이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알려질 일이기도 했어.”

심대혜가 송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자 벽우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혼혈인 데다가 눈동자의 색이 다르기에 사람들 속에 있으면 유독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제 예선전의 활약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기도 했고 말이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부님의 위치를 생각하면요.”

“위치는 무슨. 똑같은 사람인데.”

“사부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르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대우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석정후가 조심스럽게 둘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자신이 끼어들어도 되는지를 확인하며 말했던 것이다.

아직은 낯선 것이 사실이기에 석정후는 입을 여는 것조차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말투와 눈빛이 너무 다른 것 아니냐?”

“하하하.”

“편하게 해, 편하게. 버릇없는 것만 아니면 괜찮으니까.”

“예.”

석정후가 머쓱하게 웃었다.

나름 표정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역시나 귀신 같이 알아채는 모습에 석정후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장문인.”

“저도 왔습니다, 허허.”

쉼 없이 이어지는 비무대회를 지켜보는데 벽우진의 곁으로 두 사람이 다가왔다.

제갈현과 개왕이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인사했던 것이다.

“둘 다 웬일이야?”

“여기가 가장 객관적으로 비무대회를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저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넉살 좋게 대답하는 개왕과 달리 제갈현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벽우진과 마찬가지로 제갈세가와 개방 역시 태성전에 참가한 인원은 없었다.

인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자제했던 것이다.

이유가 사뭇 다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긴. 세 곳 다 태성전에 출전하는 인원은 없네.”

“그러니 순수하게 구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근데 내가 원하지 않는데?”

벽우진의 시선이 개왕에게 닿았다.

그가 오기 무섭게 주변에 있던 인원들이 눈살을 찌푸렸던 것이다.

“험험! 금세 적응 될 겁니다. 후각의 적응력이 오감 중 가장 뛰어나지 않습니까.”

“왜 굳이 적응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는 한다만.”

“크험!”

할 말이 없어진 개왕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실외라서 금세 날아갈 겁니다.”

“그치! 여기는 실내가 아니니까!”

제갈현의 도움에 개왕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집중되는 영역만 달라졌을 뿐 악취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아서였다.

“크험! 큭!”

“쿨럭!”

특히 개왕을 처음 마주한 석정후와 백륜은 좀처럼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콧구멍을 찌르는 듯한, 소변을 수백 배 응축시킨 것 같은 냄새가 연신 콧속을 찌르는 것 같아서였다.

“에구.”

그 모습에 심대혜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석정후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 역시 겪었던 것이었기에 석정후가 얼마나 괴로울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래도 그녀는 내공이라도 있었지만 석정후는 아니었다.

이제 막 내공심법에 입문한 상태였기에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허허. 이거 참.”

다른 이들과 달리 유독 괴로워하는 석정후의 모습에 개왕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힘들어하는지 그 역시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바로 일어날 수는 없기에 개왕은 헛기침을 하며 딴 곳을 바라봤다.

“은근히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니까.”

점점 더 영역을 넓혀나가는 악취에 벽우진이 손을 휘저었다.

그런데 귀찮다는 듯이 흔든 그의 손짓에 악취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바람을 일으켜 하늘 위로 날려 보낸 것이었다.

“흐읍!”

한순간에 상쾌해진 공기에 여기저기에서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쉬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상쾌한 공기도 잠시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안 씻는 건 이해하는데 뭐라도 덮어. 주변에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할 거 아냐.”

“그래도 방주라 1년에 한 번은 씻습니다만.”

“안 씻은 지 넉 달 넘게 지났다는 말이잖아.”

벽우진의 면박에 개왕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갈현은 부하를 시켜 모포를 가져왔다.

후각을 차단할 정도의 실력이 있지만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개왕의 몸을 덮어버릴 작정이었다.

“이걸 덮으시지요.”

“끄응!”

“싫어도 덮어. 그마저도 싫으면 가고.”

“하겠습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벽우진의 말에 개왕이 순순히 모포를 몸에 감았다.

수십만 거지들의 우두머리인 그였지만 벽우진에게는 한낱 후배에 불과했다.

“머리카락도.”

“···예.”

머리카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냄새도 장난이 아니었기에 벽우진은 추가적으로 주문했다.

그러자 지독했던 악취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의심하겠는데요. 몸을 죄다 가리고 있어서.”

“제갈가주도 있고 나도 있는데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일단 주변을 봐봐. 다들 안도하고 있잖아.”

“그렇긴 하죠.”

몸을 죄다 감춘 개왕을 보며 제갈현이 옅게 웃었다.

저 꼴만 보면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이어서였다.

“그리고 여기에 신경 쓸 정신이 있겠어?”

벽우진이 비무대를 향해 눈짓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서른두 개의 비무대 위에서는 살벌한 격전이 치러지고 있는 중이었다.

괜히 고수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듯이 비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대결의 수준은 어제와 비교할 수 없었다.

강기가 드문드문 보였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기본이 강기였던 것이다.

퍼퍼펑!

게다가 화려함도 비교할 수 없었다.

얼마나 격렬한지 비무대가 남아나질 않았던 것이다.

구덩이가 생기는 것은 예사고 반 가까이가 박살나는 경우도 있었다.

“우와.”

“역시 달라.”

“이래서 무인들이 비무대회에 열광하나보다.”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큰 전투와 실전을 많이 겪은 제자들이었지만 이처럼 비무대회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또한 순수하게 제 3자로서 지켜볼 수 있었기에 느끼고 깨닫는 것도 적지 않았다.

“근데 인부들은 많이 힘들 것 같아.”

콰앙!

심소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8조의 비무대가 폭삭 무너졌다.

검강과 권강의 충돌에 비무대가 남아나질 않았던 것이다.

정육면체 모양의 석재가 넉넉히 준비되어 있기는 했지만 중요한 건 그걸 나르고 정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심소혜가 안쓰러운 얼굴로 석재가 실린 우마차를 끌고서 8조로 향하는 인부들을 쳐다봤다.

“저게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어쩌면 좋아할 수도 있어. 일거리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으니까. 게다가 임금도 확실하게 지불하고.”

“혼자 하는 것도 아니니까.”

심대현과 심소천이 웃으며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서 했기에 힘들기는 해도 그렇게 무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서였다.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좀 있으십니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과 함께 굉음이 울려 퍼졌다.

대문파와 명문세가는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방귀 깨나 뀐다는 군소방파와 중소세가의 수장들이 대거 출전한 게 바로 태성전이었다.

그렇다 보니 비무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아직은. 근데 확실히 중원이 넓기는 한가 봐. 오독문과 북해빙궁에 입은 피해가 꽤나 크다고 생각했는데 저걸 보면 아닌 거 같아.”

“모두가 나서서 싸운 것은 아니니까요. 직접적으로 두 곳과 부딪치지 않은 지역도 있고요.”

제갈현이 살짝 씁쓸한 기색을 띄우며 말했다.

전력이 남아 있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들이 중원의 전력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북해빙궁과 오독문이 침공했을 때 자진해서 두 곳의 휘하로 들어간 문파도 적지 않았다.

< 제 76장. 신성(新星).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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