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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244화 (244/325)

< 제 75장. 군계일학(群鷄一鶴). -04 >

몸의 탄성을 이용해 황급히 바닥에 착지한 사내가 창대의 상단을 잡았다.

거리를 주지 않는다면 짧은 거리에서 싸우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서 차차 자신의 간격을 찾아가도 되었다.

‘간격을 좁힌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개싸움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였다.

창을 쓰기에 근접전에 약할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전신이 무기이며 흉기였다.

쉬이익!

그것을 증명하겠다는 듯 사내는 창을 짧게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심대혜의 단전을 노렸다.

피하면 그대로 공격을 이어서 심장이나 허벅지를 노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카아앙!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유려한 보신경을 보여주던 심대혜가 처음으로 검신을 비틀어 그의 찌르기를 흘려냈던 것이다.

‘걸렸다!’

그 순간 사내의 눈이 번뜩였다.

창과 검이 맞닿은 순간 심대혜는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기에 망설이지 않고 득달같이 달려들며 좌장을 찔러 넣었다.

치졸하게도 그 짧은 순간에 일부러 가슴을 노렸던 것이다.

‘피할 수밖에 없을 걸!’

남자의 손이 다가오는데 피하지 않을 여자는 없었다.

그게 본능이었고, 웬만큼 경험을 쌓지 않는 한 이런 공격을 대부분 피했다.

때문에 사내는 확신했다.

심대혜가 뒤로 물러날 것이고 그 순간 이어서 준비한 자신의 치명적인 일격에 대결은 끝을 맺을 것이라고 말이다.

터엉!

하지만 심대혜의 선택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정확히 유방을 노리고서 파고드는 사내의 공격을 심대혜는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서 좌수를 뻗었다.

“큭!”

유려한 수영(手影)과 함께 펼쳐지는 태청산수(太淸散手)에 오히려 사내가 뒷걸음질쳤다.

막강한 내력이 실린 일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투두둑.

발뒤꿈치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에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비무대 끝까지 자신이 밀려나 있어서였다.

‘도대체 어느 틈에?!’

경기가 시작되고 고작 몇 합 주고받은 게 다였다.

그런데 어느새 비무대 끝에 서 있자 사내의 동공이 흔들렸다.

우우우웅.

하지만 심대혜는 사내가 놀랄 틈조차 주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그 순간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전방과 좌우, 삼면을 가득 채우는 검세로 사내를 몰아붙였던 것이다.

비록 서예지처럼 화려하거나 양일우처럼 신력을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대신 심대혜에게는 꼼꼼함이 있었다.

그 장점을 그녀는 여지없이 보여주며 그대로 사내를 비무대 밖으로 밀어버렸다.

“허!”

수십 개의 검기에 사내는 속절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공간이 여유로웠다면 어찌어찌 피해낼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허락된 공간은 뒤쪽뿐이었다.

즉 선택지는 하나뿐이었기에 사내는 허망한 얼굴로 비무대 아래로 착지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소.”

별다른 상처 없이 그저 공간만 차지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밀어낸 심대혜를 사내가 멍하니 쳐다봤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는 알았다.

처음부터 심대혜가 이것을 노렸음을 말이다.

‘완패로군···.’

복기하면 복기할수록 모든 게 이미 다 짜여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패자답게 조용히 물러났던 것이다.

반면에 비무대 위에 있던 심대혜는 정말 환하게 웃으며 벽우진을 쳐다봤다.

그를 향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던 것이다.

스윽.

그런 심대혜를 향해 벽우진은 말없이 엄지를 들어 보였다.

다른 말이 필요없었다.

그저 행동 하나면 충분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예.”

벽우진의 칭찬에 기분이 한껏 좋아진 심대혜가 심판에게도 정중히 인사한 후 비무대를 내려갔다.

다음 대결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무대회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비무에 참가자들은 물론이고 관중들 역시 눈을 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살판 난 사람들은 장사꾼들이었다.

등에 큼지막한 나무상자를 짊어지고서 음식을 파는 이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오늘 하루 만에 끝나지는 않겠지?”

“알려진 일정으로는 용봉전과 태성전이 격일로 진행된다고 하니까 적어도 내일까지는 구경할 수 있겠지.”

“용봉전이고 태성전이고 하루 만에 끝내기는 힘들 것 같은데. 아무리 비무대가 서른두 개라고 하더라도.”

두 청년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결이 빠르게 진행되는 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조도 있어서였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결판이 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백의경장을 청년이 힘들 거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모레 이어서 하겠지. 대신 일찍 끝낸 조는 그만큼 더 쉬는 거고.”

“빨리 이기는 게 장땡이네.”

“그렇지. 근데 그게 또 달리 말하면 실력이 좋거나 아니면 대진 운이 좋다는 뜻이니까.”

“둘 다 있으면 금상첨화겠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중에도 결과는 속속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인 점은 비무대에서 떨어져 실격패하는 이들의 숫자가 제법 많다는 점이었다.

“저거 괜찮은 거 같아. 은근히 긴장감도 있고.”

“시야가 좁은 순간 그냥 떨어지는 거니까. 근데 곤륜파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안 떨어지지 않았나?”

멀리 보이는 9조의 비무대를 바라보며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 대단하다는 소림사와 무당파, 화산파의 제자들도 심심찮게 탈락한 마당에 곤륜파는 아직까지 떨어진 이가 없는 것 같아서였다.

“에이. 규모를 생각해야지. 많게는 스무 명 넘게 참가한 곳도 있는데 곤륜파는 달랑 일곱 명이 전부잖아.”

“근데 그 일곱 명이 다 패선의 제자들이잖아. 무공에 입문한지 3년도 안 된.”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부럽긴 하다. 아니, 엄청. 왜 나에게는 그런 천운이 닿지 않은 건지.”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3년 만에 저 정도의 고수가 되었다고 하자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서였다.

누구는 십 년 넘게 아등바등 대도 제자리인데 말이다.

“너만 부러운 줄 아냐. 나도 부럽다.”

“곧 떨어지겠지. 아직 경기 많이 남았잖아.”

“만약이긴 한데. 일곱 명 전부 본선에 오르면 대박이긴 하겠다.”

“구룡 중에 떨어진 이가 있으면 더더욱.”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말 그대로 상상에 불과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여파가 상당할 터였다.

하지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괜히 전통의 강호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확실히 구경하는 재미는 있어.”

“우리도 합격했으면 저 비무대를 밟아봤겠지.”

“지금 보면 차라리 일찍 탈락한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내일이라도 한 번 찾아가볼까? 내일은 태성전이라 참가하는 이는 없잖아.”

남자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모르는 게 세상일이었다.

특히 벽우진은 배경이나 나이, 성별도 전혀 보지 않았기에 가능성이 마냥 낮다고는 볼 수 없었다.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우리만 그런 생각을 하겠어? 참가하는 제자도 없으니 숙소에서 아예 안 나올 수도 있어.”

“그럼 발품을 팔아 봐야지. 내일 낙양의 대로는 한산할 거 아냐. 죄다 여기로 구경 올 테니.”

청년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였다.

그리고 고수가 되어 강호를 호령하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또 꼭 제자가 될 필요는 없었다.

‘다른 방법도 있지. 후후후.’

청년의 시선이 그리 멀지 않은 대기 천막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급격하게 남자 무인들의 관심을 받는 심대혜가 있었다.

첫 번째 대결을 승리로 장식한 심대현이 위풍당당하게 비무대 위로 올랐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긴장한 기색이 아니라 마치 잘 걸렸다라는 표정으로 비무대의 반대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9조 44번!”

미리 와 있는 심대현과 달리 순서가 되었음에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44번의 모습에 심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심판이기 이전에 어떻게 보면 강호의 선배인데 이렇게까지 시간을 지키지 않자 화가 난 것이었다.

“갑니다.”

다시 한 번 목소리에 공력을 담아 소리치려고 할 때 천막 안에서 건들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 후 자다가 깼는지 눈곱을 떼며 나오는 44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꺄아아악!”

“위지 공자님!”

“기다렸어요!”

느릿하게 비무대로 향해 오는 귀공자를 향해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졌다.

대부분이 여자들이었는데 환호성이 얼마나 컸는지 다른 비무대에서 격전을 치르던 참가자들마저 깜짝 놀랄 정도였다.

“흐아암.”

하지만 그런 엄청난 환호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인 위지건은 심드렁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건들거리며 비무대 위로 올라왔던 것이다.

“일찍일찍 못 다니나?”

“아, 예에.”

“······.”

눈살을 잔뜩 찌푸린 심판이 차갑게 말했지만 위지건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제야 앞에 선 심대현을 쳐다봤다.

“잘 지냈냐, 애송이?”

“언제 봤다고 애송이야?”

“용봉회 때 봤잖아? 말은 안 섞었어도 눈은 마주친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랬었나?”

심대현이 귀를 후벼 팠다.

딱히 그때나 지금이나 관심 없다는 투였다.

그 모습에 위지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역시 못 배운 녀석들이라 그런가. 예의를 모르는군.”

“그건 그쪽이 들어야 할 말 같은데? 누가 누구한테 지적질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 자식이···!”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심대현의 모습에 위지건의 눈빛이 달라졌다.

매서운 살기를 뿌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심판의 손이 파고들었다.

“신경전은 그만. 둘 다 준비하도록.”

“······.”

“예.”

심판의 주의에도 위지건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력을 끌어올리는 듯 전신에서 강렬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둘 다 준비 되었나?”

“예.”

이번에도 대답하는 이는 심대현 뿐이었다.

위지건은 심판이 말하거나 말거나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오직 살벌한 눈빛으로 심대현만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럼 시작!”

“내 앞에서 언제까지 그렇게 시건방을 떨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말인데?”

“건방진 새끼!”

위지건이 입술을 비틀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곤륜파의 제자들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나같이 비천한 신분을 가진 녀석들이 선택받은 이만 참석할 수 있는 용봉회에 함께 있다는 게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심 벼르고 별렀다.

기회가 되면 반드시 태생과 신분의 차이를 알려주기로 말이다.

‘그 시작이 네놈이다.’

버러지는 버러지일 뿐이었다.

비천한 근본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위지건은 알려줄 작정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달라지지 않는 게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츠츠츠츠!

순식간에 뽑혀진 위지건의 검에서 서늘한 검기가 솟구쳤다.

뽑는 즉시 예리한 검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던 것이다.

“흥.”

하지만 위지건과의 만남을 기다린 건 심대현도 마찬가지였다.

어제의 그 재수 없는 눈빛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에 심대현은 코웃음을 치며 땅을 박찼다.

피할 수 있었지만 심대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면대결을 피한다면 위지건이 기고만장해질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 꼴은 절대 못 보지.’

다음 경기를 생각하면 최대한 충돌을 피하고 부상을 입지 않는 게 좋았다.

비무대회는 장기전이었으니까.

하지만 심대현은 이번 경기만큼은 그런 걸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곤륜파의 제자가 되기 전 내 별명이 왜 싸움닭이었으니 보여주마.’

< 제 75장. 군계일학(群鷄一鶴).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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