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5장. 군계일학(群鷄一鶴). -01 >
못마땅한 기색의 노인과 달리 여인의 미소는 짙어졌다.
원래 그들의 방식과는 많이 다르지만 효율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재미도 있을 터였고.
“재미?”
“그냥 죽이는 것보다는 지들끼리 싸우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후후!”
살벌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근처에 있는 누구도 둘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막으로 소리를 차단했기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건 둘의 입모양뿐이었다.
게다가 다들 온 정신이 비무대회 참가자들에게 향해 있어 둘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하도 시끄럽게 떠들고 응원하는 것도 한 몫 했고.
“나는 별로.”
“비무대회보다는 훨씬 박진감 넘칠 게 분명한데. 여기서는 살인이 안 되잖아. 하지만 그곳에서는 다르지. 인간의 온갖 욕심과 이기심이 판을 칠 텐데. 얼마나 재미있겠어?”
여인이 상상만 해도 흥분된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여인과 달리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때려죽이는 게 그는 훨씬 더 재밌었다.
두개골을 박살내고 척추를 뽑아내는 게 말이다.
“내 취향은 아니야.”
“하긴. 넌 직접 손맛을 봐야 쾌락을 느끼는 쪽이니까.”
“넌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그래도 난 다양하게 즐기니까. 하나만 파지는 않지. 후후!”
묘하게 색기 넘치는 얼굴로 대답한 여인이 다시 한 번 주변을 훑었다.
혹시나 패선이 있을까, 아니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수장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원하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하루 종일 자리를 지켜야 할 것 같군.”
“어쩔 수 없지. 그게 우리의 임무이니까. 그래도 심심하지 않은 게 어디야?”
“하긴.”
여인과 마찬가지로 노인 역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로 주변을 살펴봤다.
잡담은 그만두고 일에 집중했던 것이다.
백륜과 함께 걸어가면서도 석정후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벽우진과 함께 이동한다는 게 여전히 실감나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으응.”
“···불편해 보이시는데요.”
“너도 그래.”
백륜이 쓴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그 역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석정후처럼 벽우진과 함께 걸어간다는 사실이 그도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뭘 그렇게 긴장해?”
“하하.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서요.”
“네가 바라마지 않던 그림 아냐?”
고개만 살짝 뒤로 돌린 벽우진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석정후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맞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이렇게 직접 보여주는 게 더 확실하니까요.”
단지 걸어가는 것뿐인데도 수십, 수백 쌍의 눈들이 자신에게로 향했다.
특히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발산하는 감정은 너무나 격렬했다.
하나같이 경악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던 것이다.
어째서 그와 벽우진이 같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가득한 눈빛들에 석정후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동시에 형들의 견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겠지.”
“예전이었다면 전전긍긍했겠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오히려 부담감을 느껴야 하는 쪽은 형들이지요.”
“둘이 손잡고 널 찍어 누를 수도 있는데?”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 그걸 다 알면서도 사부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석정후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아직은 혼자서 두 형을 상대하는 게 힘들겠지만 견디기만 한다면, 자리만 제대로 잡는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질 터였다.
“날 너무 의지하는 거 아냐?”
“그 정도인 분이기에 제가 도박 아닌 도박을 한 것이지요.”
“너무 일찍 무너지진 마.”
“제가 태어나자마자 배운 게 악착같이 살아남는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나 틈새시장은 존재하는 법이지요.”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누가 장사꾼의 핏줄 아니랄까봐 말발은 정말 끝내주는 것 같아서였다.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둥둥 떠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벽우진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그래도 제자인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저의 스승님이 되어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걸 받았습니다. 아마 조마조마한 것은 두 형들일 겁니다.”
“둘 다 나름 줄 닿은 곳이 있다며?”
“그래 봤자 사부님의 이름에 비빌 곳은 없습니다. 즉 뒷배의 힘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지켜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석정후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대답했다.
언뜻 보면 어린아이가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두 눈빛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그 배짱대로의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구나. 물론 수련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해야 하는 것도 잊지 말고.”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저는 상인이되 무인이니까요.”
석정후가 다부진 얼굴로 말했다.
이제 막 입문한 단계이기에 스스로 무인이라고 말하기가 어색했지만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더구나 사사하는 게 벽우진인 만큼 석정후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저 녀석 석가장의 삼 공자 아냐?”
“어떻게 곤륜파와 같이 있는 거지?”
“저거 무슨 상황이야?”
한편 제자들의 조 추첨을 기다리며 서 있는 벽우진에게로 수많은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원래부터 시선을 끌고 다니기는 했지만 오늘은 유달리 많은 이들이 벽우진 일행을 쳐다봤다.
새로운 얼굴의 등장에 다들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석정후를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두 눈을 부릅뜨며 그와 벽우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석가장이랑 인연이 있나?”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설마··· 패선의 제자가 된 건가? 기준이 까다롭지만 일단 마음에만 들면 무조건 제자로 들이는 게 패선이잖아.”
“에이, 설마. 다른 곳도 아니고 석가장인데 무재가 있었다면 진즉에 고수들이 데려갔겠지. 근데 지금까지 그런 말은 단 한 번도 없었잖아?”
쑥덕거림은 점차 확대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의문에 의문만 더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석정후의 미소는 짙어져 갔다.
“좋으냐?”
“예. 관심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제 이름과 가치가 높아진다는 걸 뜻하니까요.”
“동시에 적들도 많아지지. 아무 이유 없이 너에게 악의를 품는 이들도 생길 거고.”
“감당해야지요. 그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시작하지 말아야 하는 게 맞고요.”
“녀석.”
피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빛내는 석정후의 모습에 벽우진은 쓸데없이 조숙하다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멀리 보이는 대진표를 쳐다봤다.
두 개의 장대에 커다란 천을 말아서 세운 대진표였는데 정확히 서른두 개가 평야에 박혀 있었다.
각 조의 숫자만 적혀 있는 채로 말이다.
“애들이 겹치지 말아야 할 텐데요.”
“무작위 뽑기이니 운에 빌어 봐야지. 겹치면 어쩔 수 없고.”
“아침식사 때 대화하는 걸 들어보니 다들 각오는 한 것 같더라고요.”
“조가 서른두 개나 되지만 겹칠 가능성도 꽤 크니까.”
청민의 시선이 한곳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사뭇 긴장한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벽우진의 제자들은 담담한 얼굴로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디까지 오르실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나한테 지금 객관성을 바라는 거야? 그건 불가능하다고.”
“그럼 어디까지 기대하시는지요?”
“본선에는 모두 다 올랐으면 하는데, 쉽지 않겠지.”
벽우진의 시선이 구룡을 비롯해서 몇몇 후기지수들에게로 향했다.
구룡 못지않은 강자들이 제법 있었던 것이다.
“복병들이 존재할 테니까요.”
“맞아. 또 그래서 재미있는 게 비무대회이기도 하고.”
“···와 있을까요?”
청민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이 수많은 인파들 속에 어쩌면 그들이 와 있을지도 몰랐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비무대회를 개최한 의도를 그들이 모를 리 없을 테니까.”
“꼬리를 잡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쉽지 않을 거야. 잡힐 거였으면 진즉에 잡혔겠지.”
“하긴.”
은밀함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쪽의 실력이나 기술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로 활용하지 않을 뿐.
그래서 더 무서운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이제 시작한다.”
“뿔뿔이 흩어졌으면 좋겠어요!”
“우리들끼리 붙는 건 질리도록 봤으니까?”
지금껏 얌전히 있던 배혁문이 소리치자 벽우진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부를 닮은 건지 평소에는 말수가 드문 배혁문이 지금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조 추첨을 구경했다.
“예! 그리고 본선에 형, 누나들이 다 올라가면 그것 또한 명예이자 기록이잖아요. 서른두 개뿐인 자리에 일곱 명이나 올라간 것이니까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다음번에는 저도 지원해서 한 자리를 더 늘릴게요!”
배혁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이만 아니었으면 그도 비무대회에 지원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이 제한에 걸려 함께 하지 못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헤헤헤!”
이제 열두 살이 된 배혁문이 야무진 얼굴로 웃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자신도 출전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너무한 거 아냐? 어떻게 한 번을 안 찾아 오냐? 매정하다, 매정해!”
“이제는 그만 어울릴 때도 되지 않았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도 벽우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알아서 옆에 설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이제 진짜 우리 둘 밖에 없는데.”
“십 년 후에는 조용해지려나.”
“말을 해도!”
예상대로 옆에 선 당민호가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도 벽우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가족들이랑 같이 있지.”
“거기보다는 너랑 있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오늘은 그냥 대진표 뽑는 날인데.”
“그래도 와야지. 애들이 처음으로 출전하는 비무대회인데.”
당민호의 시선이 멀리 삼남매가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의외로 긴장해 있는 삼남매의 모습에 당민호가 입맛을 다셨다.
“언제부터 그렇게 손주들을 챙겼다고.”
“너만큼이나 신경 쓰고 챙기거든? 근데 이 녀석은 뭐야?”
“뭐긴. 새로 들인 제자지.”
“제자?”
벽우진의 뒤에 서 있던 석정후가 당민호의 시선에 황급히 인사를 올렸다.
누구인지 충분히 예상이 갔기에 공손하게 포권을 했던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석정후라고 합니다.”
“석 가? 강호에 석 씨는 드문데. 혹시?”
“예. 석가장 출신입니다.”
“방계?”
강호와 아예 연관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깊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가주직에서 물러난 후 강호정세에 딱히 신경을 안 썼기에 당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계야. 석가장주의 셋째 아들.”
“호오. 그럼 승계권이 있는 거 아냐?”
당민호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마치 그의 속내가 훤히 보인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벽우진은 그런 당민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있지.”
“이거 봐라. 음흉한 속내가 너무 훤히 보이는데.”
“제 발로 찾아왔어. 내가 데려온 게 아니라.”
“응? 스스로 널 찾아 왔다고?”
당민호의 두 눈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아직 굳어 있는 석정후를 쳐다봤다.
“어. 당돌하게도 거래를 하자고 하더라고.”
“푸하하하!”
상상만 해도 웃긴 모양인지 당민호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반대로 석정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당시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달려들었다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찔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석정후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근데 그게 마음에 들었어.”
“너도 참 취향이 독특하다니까. 정신세계가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 제 75장. 군계일학(群鷄一鶴).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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