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40화 (240/325)

< 제 74장. 석가장의 삼 공자. -03 >

“왜? 농담 같으냐?”

“어···.”

장난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벽우진의 모습에 석정후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실없는 농담을 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원체 벽우진은 괴짜로도 유명했다.

그렇기에 석정후는 섣불리 믿지 않았다.

“내가 장난을 좋아하기는 해도 이런 걸로 농담을 하지는 않아.”

“···제게 재능이 있습니까?”

여전히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벽우진의 두 눈은 진지했다.

또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만을 오롯이 주시했다.

그걸 뒤늦게 깨달은 석정후가 흥분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근골은 나쁘지 않아. 다른 이들이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라고 하지만 난 그런 말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그 정도 조사는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맞습니다.”

석정후의 시선이 양일우와 도일수에 한 번씩 닿았다.

둘 모두 무공에 정식으로 입문한 시기는 상당히 늦었다.

대부분의 무문과 무가들이 너무 늦었다고 판정을 내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벽우진의 제자가 된 후 둘은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구룡과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무인으로 성장했다.

“둘에 비하면 넌 한참 어리지. 게다가 출발선 자체가 완전히 다르고.”

“출발선이라고 하심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몸에 좋은 걸 많이 먹었잖아?”

“아!”

석정후가 탄성을 내질렀다.

출발선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1할은커녕 1푼도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뭐 건강을 위해서라고 하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 어차피 무가도 아니고 상가인데.”

“제가 장문인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싫지는 않다는 말이네?”

“어느 누가 이런 제안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문인께서 직접 하시는 제안인데요.”

석정후가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막말로 벽우진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게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보다 쉽고 확실한 방법이 생겼는데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지?”

“예! 그런데 조금 걱정이 됩니다. 제가 과연 잘할 수 있을 지가요.”

아까 전의 당당함은 어디로 갔는지 석정후는 조심스럽게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벽우진의 안목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지만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었기에 그는 말끝을 흐렸다.

“왜? 무공을 익히면 상인이라는 정체성이 흔들릴까봐?”

“맞습니다. 장사라는 게 생각보다 하는 일이 많습니다. 바쁠 때는 몇 날 며칠 동안 밤을 새며 일해야 하는 게 장사꾼인데 제가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럼 포기하게?”

“그럴 수는 없지요.”

석정후가 즉각 대답했다.

염려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를 놓치기도 싫었다.

벽우진의 제자가 되는 걸 거절한다면 후원 역시 날아가는 것이었기에 석정후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밑밥을 까는 거네. 제자도 되고 무공도 익히겠지만 열심히 수련하지는 않겠다. 이런 거지?”

“아닙니다. 불가피한 사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참 잘해.”

“이런 점에 대해서 미리 말씀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요. 나중에 장문인을 실망시켜 드리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방금 전의 말을 철회하더라도?”

석정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너무나 좋은 기회라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존재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갑은 누가 뭐래도 벽우진이었다.

“···예.”

“아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대답이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솔직하기도 하고. 근데 쓸데없는 걱정이다.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말했을 것 같더냐?”

석정후의 두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답게 벽우진의 말을 바로 이해한 것이었다.

“그, 그럼!”

“네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한 가지다. 장사를 하면서도 무공을 수련할 각오가 있는지. 난 그것을 묻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절대 허투루 수련하지 않겠습니다.”

“그거면 되었다.”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킬 수도 없는 말을 일단 내뱉고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나았다.

“저어 궁금한 것이 몇 개 있습니다.”

“몇 개나 되는데?”

“일단 지금 생각나는 것은 두 개입니다.”

“적당하네. 물어 봐.”

석정후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몇 개 있어서였다.

“왜 저를 허락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저의 무재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 같아서요.”

“궁금해졌거든. 과연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호언장담했던 대로 석가장주가 될 수 있을지 말이야. 진짜로 네가 석가장주가 된다면 나로서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궁금증입니까.”

“기대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두 번째는?”

“곤륜산에 머물러야 하는지요?”

첫 번째 질문이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왔다면 두 번째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패선을 사부이자 후원자도 둔 지금 시점에서 곤륜산에 머무는 것은 썩 좋은 선택이 아니어서였다.

가뜩이나 격차가 벌어져 있는데 곤륜산에 머무른다면 가문에서 그의 영향력을 넓히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아주 현실적인데?”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걱정하지 마. 기초를 다질 시간은 충분하니까. 시간은 한정적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지니까.”

벽우진이 씨익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석정후는 왠지 모르게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지옥문 앞에 선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사형제가 될 이들의 표정 역시 심상치 않았다.

“충분하다는 말씀은?”

“비무대회를 치르는 동안 죽어라 기초를 다져야 한다는 뜻이지. 석가장으로 돌아가려면 말이야.”

“······.”

“자신 없느냐?”

“해보겠습니다.”

잠시 겁먹은 표정을 지었던 석정후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얼마나 배부른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 뒤늦게 깨달아서였다.

남들은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게 곤륜파의 무공이었다.

근데 그걸 두려워하다니.

‘내가 정신이 나갔지.’

벽우진을 앞에 두고서 석정후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이렇게라도 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제야 좀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

“최선을 다해 배우겠습니다. 어디에서도 못난 꼴을 보이지 않도록.”

“그래. 그 각오면 되었다.”

“구배지례를 올리겠습니다.”

처음 별채 안으로 들어왔던 그 표정으로 석정후가 벽우진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다.

결정된 이상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따라 오너라.”

“예.”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구배지례를 마친 석정후를 쳐다보며 벽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철 기둥 시험이 있었던 평야에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바로 오늘 합격자들의 조 추첨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천하무림 비무대회에 참여하는 무인들 말고도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조 추첨을 구경하러 다들 모인 것이었다.

“엄청나군.”

“오랜만의 축제잖아. 오히려 적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

수많은 인파 속에서 시험에 합격한 참가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통제선 안을 쳐다보며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았다.

언뜻 보기에 조손지간처럼 보이는 둘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서로에게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축제라기보다는 경고의 의미가 더 크지.”

“그런 의미도 있고.”

꾸부정하게 서 있는 백발노인의 말에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째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주도해서 비무대회를 열었는지 그녀는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전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 이번 비무대회는 어떻게 보면 숨어 있던 전력을 모조리 다 긁어모으려는 것이잖아.”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중원무림의 저력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저력도 끝은 있었다.

더구나 북해빙궁과 오독문, 사왕성에 의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게 현재의 중원무림이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근데 왜 우리가 여기에 와 있어야 하는 건지.”

“난 좋은데?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언제 또 이렇게 마음 편히 중원에 와보겠어?”

여인이 히죽 웃었다.

귀찮은 기색이 완연한 노인과 달리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썩 나쁘지 않았다.

피가 튀고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도 좋았지만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았다.

“너야 목적이 따로 있으니까 그렇겠지.”

“흐흥. 그럼 너도 좀 즐기지 그래? 중원 여인들 속맛은 너도 못 봤을 거 아냐? 아, 이제는 힘드나?”

여인이 은근한 눈빛으로 노인의 하반신을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남자의 그곳을 말이다.

하지만 적나라한 그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내 물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흐응. 안 설 것 같은데? 이제는 나이가 적지 않잖아? 몸뚱이도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내게 나이 가지고 뭐라 할 처지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머. 지금 여자에게 나이로 공격한 거야?”

여인이 새치름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기분 나쁘다는 기색을 띠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여인의 모습에도 노인은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먼저 시작한 쪽이 누군데?”

“너무 삐딱하게 나오니까 그렇지. 그냥 마음 편히 구경해도 되는데. 언제 또 이렇게 편하게 구경할 수 있겠어?”

“약해빠진 놈들을 봐서 어디에 쓰겠다고. 잊은 모양인데 우리는 놀러 온 게 아니다. 엄연히 임무를 받고서 낙양에 온 거다.”

“알고 있어. 근데 꼭 그렇게 빡빡하게 안 해도 되잖아. 내가 마냥 노는 것도 아니고. 나름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네 딴에는 그렇겠지.”

노인이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봐도 그에게는 농땡이 피우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서였다.

“진짜라니까? 아마 보고서는 내가 제일 많이 보냈을 걸?”

“보내긴 했겠지.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께 더 심도 깊을 걸?”

여인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놀 때도 화끈하게 놀지만 일도 열심히 하는 게 바로 자신이었다.

게다가 기웃거리고 엿듣는 게 다인 노인과 달리 그녀는 상당히 밀도 높은 정보도 얻어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수박 겉핥기식 정보 수집과는 비교할 수 없지. 내 방식이.”

“흥.”

“근데 패선이 아직 안 보이네. 유독 제자들을 챙긴다고 해서 오늘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더 이상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여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이 많지만 패선 정도 되는 무인이라면 보는 순간 알 수 있을 터였다.

또한 알게 모르게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을 수도 있었고.

“너무 티내지 마라. 염탐도 중요하지만 들키지 않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니까.”

“작업 하루 이틀 하나. 걱정하지 마. 찾아도 가까이 다가갈 생각은 없으니까. 근데 확실히 구룡들이 잘 생기긴 했네. 곱상하게 생긴 게 딱 내 취향인데.”

여인이 입맛을 다셨다.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둔 것처럼 연신 침을 삼켰던 것이다.

“쯧쯧! 또 딴 데 정신 파는군.”

“찾는 김에 보는 거야.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 거라고.”

“그나저나 이해할 수가 없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주군의 변덕이라고 생각해. 그게 마음 편하지. 그리고 난 재미있을 거 같은데?”

< 제 74장. 석가장의 삼 공자. -03 > 끝

ⓒ 윤신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