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38화 (238/325)

< 제 74장. 석가장의 삼 공자. -01 >

스윽.

그러나 양일우의 반응은 담담했다.

대놓고 도발하는 위지건의 표정과 눈빛에도 양일우는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옅은 미소와 함께 전방을 바라봤다.

네까짓 것에는 딱히 관심 없다는 듯이 말이다.

으드득!

그 기색을 위지건 역시 알아차렸는지 눈빛이 살벌해졌다.

하지만 더 이상 양일우를 노려보지는 않았다.

양일우의 옆에 벽우진이 있기에 한 차례 눈을 부라리고는 제 갈 길을 갔다.

“벌써부터 뜨겁구만.”

“즐거워하시는 것 같아요.”

“저런 놈이 있어줘야 부수는 맛도 있지 않겠느냐.”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놈을 부수는 맛이 상당하다는 것을 벽우진은 알고 있어서였다.

또한 수없이 그리 하기도 했고.

“분수를 모르는 것 같아요.”

“직접 깨져봐야 알아. 저런 놈들은.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니까.”

담담한 양일우와 달리 심소혜는 매서운 눈빛으로 멀어지는 위지건을 주시했다.

마치 꼭 기억해두겠다는 듯이 말이다.

“예선전에서 만나면 사부님 말씀대로 아주 박살을 내놓을 게요!”

“너무 심하게 패면 안 된다?”

“규칙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됐다.”

벽우진이 웃으며 심소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심소혜가 해맑게 웃었다.

마치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서였다.

“본인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곤륜의 서예지입니다.”

“헙! 검봉!”

잠시 후 드디어 곤륜파의 차례가 되었다.

선봉장은 바로 서예지였다.

그리고 그녀의 등장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눈부신 미모에 문서를 작성하던 서기는 물론이고 근처의 감독관, 그리고 참가자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던 것이다.

“여기 지장이요.”

놀라는 서기와 달리 서예지는 담담하게 책상 위에 있는 종이에 자신의 지문을 찍었다.

그러자 서기가 어쩔 줄을 모르며 황급히 서류를 뒤적거렸다.

“무슨 검사가 필요해. 얼굴이 다 증명하는데. 그리고 뒤에 안 보여?”

“응?”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료에게 옆에 앉아있던 서기가 눈짓했다.

이윽고 당황하던 남자의 시선이 서예지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곤륜의 벽 장문인도 계시잖아.”

“흐업!”

“나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나는 출전하고 싶어도 못하니까.”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내 얼굴 본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숙이는 서기들의 모습에 벽우진이 손을 휘휘 저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좋아할지 모르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래도···.”

“자네들이 일을 제대로 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해. 오늘은 그저 제자들을 응원해주려고 온 것뿐이니까. 번잡스럽게 만들지 말고 할일 들 해.”

“예!”

서예지에 이어 양일우, 양이추 형제를 시작으로 사남매와 도일수도 본인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차례대로 본 후 벽우진은 서예지를 찾았다.

철 기둥 앞에 우아하게 서 있는 제자를.

“키야!”

“한 폭의 그림이다.”

“오화는 아직인가?”

“소문에는 검봉이 오화보다 더 아름답다던데?”

벽우진만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닌지 여기저기에서 탄성소리 흘러 나왔다.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검봉의 짝은 누가 될까?”

“누가 되었든 간에 부럽네. 부인이 청해일미라니.”

“구양검은 아예 끝났고. 남궁세가에서 관심을 보인다고 하던데.”

“어? 나는 사천당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감탄은 잠시고 쓸데없는 말들과 음담패설이 쏟아졌다.

나름 작게 소곤거린다고 하지만 벽우진의 귀에는 다 들렸다.

“쩝.”

하지만 들린다고 여기서 개판을 낼 수도 없었기에 벽우진은 입맛만 다셨다.

뒤늦게 벽우진의 심기 불편한 기색을 알아차린 것인지 다들 입을 다물기도 했고.

스윽.

한편 칠 척 가까이 되는 철 기둥 앞에 선 서예지는 감독관이 건네주는 검을 정중히 받았다.

패선의 제자이지만 예의를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소한 예의가 벽우진의 위신과도 연관되어 있기에 서예지는 몸가짐을 바로 했다.

‘확실히 흔적이 많네.’

찬찬히 철 기둥을 살펴보던 서예지가 눈을 빛냈다.

곳곳에 정말 가지각색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였다.

몇몇은 꼼수를 노린 듯 다른 이가 남긴 흠집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했다.

‘거만한 자들도 많고.’

언뜻 보기에 처절하고 간절해 보이는 검흔들 사이로 오만함이 느껴지는 흔적들이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는 듯 손도장을 찍은 이들이 제법 많았던 것이다.

그 흔적들을 보며 서예지는 고개를 저었다.

푸욱.

감독관이 건네준 검으로 서예지는 정확히 한 치보다 살짝 깊게 검흔을 남겼다.

젓가락으로 두부를 찌르듯이 너무나 부드럽게 검극으로 철 기둥을 찔렀던 것이다.

“합격입니다!”

“수고하셨어요.”

“벼, 별말씀을요!”

간결하게 딱 합격에 필요한 만큼만 검흔을 남긴 서예지를 감독관이 감탄한 눈으로 쳐다봤다.

검봉이라 불릴 정도로 서예지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였다.

게다가 인품 역시 훌륭했기에 감독관은 황송한 얼굴로 대답했다.

“흠.”

뒤이어 양일우, 양이추 형제도 가볍게 시험에 통과했다.

서예지와 마찬가지로 딱 필요한 만큼의 공력만 사용했던 것이다.

쓸데없이 공간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서 말이다.

“저는 무투가라 괜찮습니다.”

“아.”

심대혜에 이어 심대현이 철 기둥 앞에 섰다.

하지만 그는 감독관이 건네주는 검을 받지 않았다.

무투가였기에 검 대신 손가락을 사용했던 것이다.

꾸욱!

자신의 무력을 자랑하거나 뽐내려는 후기지수들과는 다르다는 듯이 심대현은 검지로 딱 한 치보다 살짝 깊게 구멍을 냈다.

사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딱 필요한 만큼의 힘만 썼던 것이다.

“합격입니다.”

“감사합니다.”

심대현의 뒤로도 합격은 이어졌다.

제자들 중 누구도 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모습에 뒤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부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벽우진의 제자들은 인생역전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에 꺼내는 간 큰 이는 없었다.

그저 한없이 부러운 눈빛으로 멀어져 가는 제자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정작 제자들이 한 노력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서 말이다.

청범객잔의 입구에서 단출한 옷차림의 한 소년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왔음에도 긴장으로 인해 가슴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손바닥에서는 연신 땀이 흘러나왔고 말이다.

“공자님.”

“후우. 괜찮아. 약간 떨려서 그래. 그보다 도착하신 거 맞지?”

“예.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제자들이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청범객잔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렇다고 지붕으로 나가는 모습도 없었고요.”

“들어가자.”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말끔한 인상의 소년이 결연한 얼굴로 청범객잔의 문을 열었다.

어쩌면 오늘을 기점으로 그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소년은 굳은 얼굴로 청범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옵셔~!”

소년과 수행원으로 보이는 청년이 객잔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점소이가 달려왔다.

조건반사처럼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던 것이다.

“벽 장문인을 뵈러 왔다.”

“예?”

얼굴 가득 접대용 미소를 머금고서 다가왔던 소육이 순간 눈을 끔뻑거렸다.

자리가 있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대뜸 벽우진부터 거론하자 당황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눈빛과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곤륜의 벽 장문인을 뵈러 왔다고 말했다.”

“약속이 되어 있으신 건지요?”

단출한 옷차림이었지만 소육 역시 낙양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은 점소이였다.

그렇기에 소육은 한 눈에 알아봤다.

눈앞에 있는 소년이 명문가 출신임을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귀티나 귀티지만 수행원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도 역시 만만치 않았기에 소육은 자연스럽게 몸을 낮추며 물었다.

“약속은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말은 건네줄 수 있지 않더냐. 석가장의 삼 공자가 장문인을 뵙고자 찾아왔다고 전해다오.”

“석가장이요?”

소육의 두 눈이 커졌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석가장 출신일 줄은 몰라서였다.

강호무림에서야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가문이지만 중원상계로 한정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상계에 한하면 오대세가보다 더한 위세를 지닌 가문이 바로 석가장이었다.

“그래.”

소년이 씨익 웃으며 소매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소육의 손바닥 위에는 금원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괜히 석가장 출신이 아니라는 듯이 배포도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흐헙!”

객잔에서 10년 넘게 일을 했지만 금원보를 받은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개 철전이었고 운이 좋아야 일 년에 한두 번 받는 게 은자였다.

그런데 난생처음 보는 금원보에 소육이 자기도 모르게 괴성을 질렀다.

“너무 티내면 좋지 않을 텐데.”

“흡!”

멍한 눈으로 금원보를 쳐다보던 소육이 황급히 품 안으로 감췄다.

그가 받은 것이니 만큼 당연히 그의 것이었지만 금원보 정도 되면 다른 점소이들이 욕심을 내고도 남았다.

그렇기에 재빨리 품속으로 숨긴 소육이 잽싸게 주변을 훑었다.

혹시나 본 사람이 있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돈은 장문인과의 자리가 만들어지도록 너에게 ‘부탁’하는 돈이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무, 물론입니다.”

“난 꼭 장문인을 만나야만 해. 그러니 부탁한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소육이 눈을 빛내며 득달같이 몸을 돌렸다.

곧장 후원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소년이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주시했다.

“가능할까요?”

“가능하게 만들라고 준 돈이야. 안 되도 되게 만들어야지. 그게 사람의 역량이고 돈의 힘이지.”

수행원이자 호위무사라고 할 수 있는 청년이 침음을 흘렸다.

벽우진에 대한 소문은 워낙에 많았다.

특히 무당산에서 벌어졌던 일은 유명했다.

어떻게든 벽우진의 눈에 들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한 일화는 이미 중원 전역에 퍼져 있었다.

“안 되면 여기까지인 거고.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야지. 그래도 난 다른 이들보다는 낫잖아? 크게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돈 걱정은 하지 않고 살 수 있으니까.”

“공자님···.”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거, 백륜도 알고 있잖아.”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후련한 얼굴로 소년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되면 진짜 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담담한 얼굴로 조용히 기다렸다.

“헉헉헉!”

일 각이 지나고, 한 식경이 다 되어 갈 때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육이 보였다.

진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소년을 향해 전력질주를 해왔던 것이다.

“왔습니다, 공자님.”

“나도 보여.”

“고, 공자님!”

잠시 후 땀범벅이 된 모습으로 소육이 소년의 앞에 섰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꽤나 밝았다.

‘좋은 소식인가?’

안 좋은 소식이라면 이처럼 표정이 밝을 리가 없었다.

금원보까지 받은 마당에 말이다.

그래서 소년은 살짝 기대하는 눈빛으로 소육을 쳐다봤다.

“결과는?”

“따라오시지요.”

소육이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입을 열었다.

얼굴 가득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그 모습에 소년의 얼굴에도 미소가 맺혔다.

“그래. 가자.”

< 제 74장. 석가장의 삼 공자.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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