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3장. 천하무림 비무대회. -04 >
“이게 1차 심사인가?”
“2차가 없으니까 기본 심사, 혹은 기초 심사라는 게 맞겠죠.”
“얼마나 깊게 파내야 합격인 거야?”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철 기둥을 쳐다보며 중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반 강철보다 몇 배나 더 단단한 게 바로 묵철인 만큼 웬만한 실력으로는 흠집도 내기 힘들 터였다.
“저 쪽에서 보니까 기준이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일정한 깊이로 파내거나 흔적을 남기지 못하면 탈락인 것 같아요.”
“어느 정도인데?”
“대략 한 치 정도인 거 같아요.”
“한 치씩이나?”
중년인이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철만큼은 아니지만 묵철도 단단하기로 유명한 금속이었다.
그런 금속을 한 치나 파내려면 보통 사람은 불가능했다.
“지원자가 다들 무인이잖아요.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 예선전에 오를 수 있는 거겠죠.”
“내공이 없으면 불가능하겠는데.”
“웬만한 내공으로도 힘들 걸요?”
“그럼 외공을 익힌 자들에게는 너무 불리한 시험 아냐?”
중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내공 위주로 치우친 듯한 기준이어서였다.
무인 중에는 외공만 판 이들도 존재했는데 말이다.
“중요한 건 익힌 무공의 성취가 아니라 실력이라는 거겠죠. 또 극성에 이른 외공이라면 이만한 기둥을 산산조각 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외공만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신력을 타고나지 않는 이상은.”
“그런 이들도 있겠죠. 참가 신청을 한 이가 수천 명이라는데.”
“어후.”
수천 명이라는 말에 중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다른 인부들과 함께 이동했다.
할 일을 다 했으니 임금을 받고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아저씨, 구경하다 갈래요?”
“구경은 무슨. 이런 시험에. 예선전이라면 모를까. 나는 일도 했으니 한 잔 때리러 갈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훅 가요, 아저씨.”
“그게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흐흐흐!”
“참나.”
당장 죽더라도 술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대꾸하는 중년인의 모습에 청년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좋아해도 저 정도면 병이나 마찬가지였다.
“근데 구경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렇게나 몰려오는데.”
“나무 위에서라도 봐야줘. 저는 참가자는 아니니까.”
마치 개미떼처럼 새까맣게 모여드는 참가자들의 모습에도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순서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높은 곳에 올라가서 구경하다가 집에 가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드디어 신분확인이 끝난 첫 번째 참가자가 철 기둥 앞에 섰다.
“지문으로 확인하네. 하긴. 이름만으로는 진짜 참가자인지 확인하기가 힘드니까.”
부리나케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간 청년이 신박한 신원확인 방법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문을 이용한다면 대리시험을 치르려는 이를 상당수 걸러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완벽하게는 힘들겠지만 말이지.”
참가자가 수십 명도 아니고 수천 명이었다.
그런 만큼 접수처에서 얼굴과 이름을 모두 다 기억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
천재라고 불리는 제갈세가주도 힘들 거라고 청년은 생각했다.
“시작이다.”
평야에 나란히 세워진 철 기둥의 앞으로 지원자들이 섰다.
그러자 철 기둥 근처에 서 있던 두 명 중 한 명이 철검을 내밀었다.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철검으로 모두가 한 곳의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준비 되었으면 시작하시오.”
참가자가 검을 받자 바늘처럼 생긴 기묘한 도구를 들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잠시 후 참가자가 한 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철 기둥을 향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일격을 날렸던 것이다.
까아아앙!
얼마나 힘을 세게 준 것인지 검으로 쳤음에도 타종소리와 비슷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오로지 철 기둥에만 향해 있었다.
“확인해 보겠소이다.”
참가자의 참격에 투박한 원기둥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철 기둥에 큼지막한 흠이 생겼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흠집의 크기가 아닌 깊이였다.
한 치 이상이 되어야지만 합격이 가능했다.
꿀꺽!
이윽고 바늘처럼 생긴 기이한 도구를 지닌 남자가 가장 깊숙한 곳에 도구를 찔러 넣었다.
바늘처럼 생긴 도구를 이용해 깊이를 재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참가자가 침을 삼켰다.
“안타깝게도 탈락입니다.”
“뭐라고!”
“조금 모자랍니다. 보시죠.”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참가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탈락이라는 말에 흥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단호했다.
조금이라도 모자라다면 과감하게 탈락시키라는 지시를 오늘 아침에도 수십 번 들어서였다.
“한 번 더 하겠다.”
“신원확인을 하면서 말씀드렸을 텐데요.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달라고 말이지요.”
“한 번 더 하겠다니까!”
참가자가 억지를 부렸다.
이대로 탈락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러나 남자는 대답 대신 뒤쪽을 쳐다봤다.
“좋은 말로 할 때 가자. 서로 피곤하지 않게.”
이런 상황을 대비한 것인지 철 기둥의 뒤쪽에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억지를 부리는 이들을 치워버리기 위해서였다.
“자, 다음 참가자 오세요!”
두 명의 남궁세가 무인들에게 붙잡혀서 끌려 나가는 첫 번째 참가자를 일별하며 남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참가자가 굳은 얼굴로 철 기둥을 향해 접근했다.
두 번의 기회가 없는 만큼 그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최선을 다해 기준치 이상의 흠집을 내는 것.
까아앙!
다시 한 번 청아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준치 이상의 깊이는 나오지 않았다.
“아오!”
“조금만 더 했으면 되었는데!”
여기저기에서 괴성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의외로 통과하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어? 공동파다!”
“저곳에는 황보세가가 있다!”
시간이 흘러도 가뭄에 콩 나듯이 합격자가 나올 때 뒤쪽이 시끄러워졌다.
정오에 가까워지자 명문세가와 대문파의 제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리고 괜히 명문이 아니라는 듯이 그들은 시험을 너무나 쉽게 통과했다.
주변의 소란스러움과는 반대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철 기둥에 흔적을 남기고는 가뿐히 통과했던 것이다.
“역시···.”
“전통의 강호라 이건가.”
“군소세가의 자제들도 대단하네.”
뒤이어 위지세가, 단리세가 출신들이 거만하게 손도장을 찍고 가는 모습에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참가자들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는 아등바등 대도 합격을 할까 말까인데 명문세가의 자제들은 너무나 쉽게 합격을 하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 색목인?”
“색목인 아냐. 혼혈이지. 곤륜파의 제자들인 것 같은데.”
“패선도 함께 온다!”
“지, 진짜?!”
벽우진의 등장에 평야가 들썩였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멀리서조차 볼 수 없는 벽우진의 등장에 참가자들이 갑자기 함성을 내질렀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에게서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 때문인지 누구도 감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오래 기다려야겠는데?”
“가장 짧은 줄을 찾아보겠습니다.”
“저리로 가자.”
어디를 봐도 참가자로 가득한 줄의 모습에 도일수가 입을 열었다.
막내는 배혁문이지만 나이 제한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그는 이번 비무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시 막내가 된 도일수가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벽우진은 고개를 저으며 맨 끝의 줄을 향해 걸어갔다.
“네!”
“저기가 가장 빠를 것 같아.”
“저는 사부님이 가자고 하는 곳이면 다 좋아요!”
“그래도 적당히 날 좋아해야 해. 나중에 혼례도 올리고 아들딸도 낳고 살아야지.”
마실이라도 나온 것 마냥 자신의 손을 붙잡고 헤실 거리는 심소혜의 모습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는 곤륜파의 미래도 중요했지만 그 못지않게 제자들의 행복 역시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문을 위해 꼭 희생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저 혼인 안 할 건데요? 사부님이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예요!”
“어허. 그럼 안 되지. 때가 되면 가야지. 가정을 이루는 것 역시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도리이니라.”
“하지만 그러면 사부님 혼자만 남게 되잖아요.”
“왜 혼자 남아? 일우도 있고, 혁문이도 있고.”
“저도 있습니다, 사부님.”
조용히 뒤따르던 도일수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 역시 혼인을 생각하지 않고 있어서였다.
나이는 벽우진의 말마따나 찬 상태였지만 말이다.
“실없는 소리들 하지 말고 좋은 사람 있으면 가. 너희들이 자식을 낳는 것도 나에게는 행복이니까. 자식들 좀 크면 나한테도 보여주고.”
“생각만 해도 슬퍼요.”
방금 전까지 환하게 웃고 있던 심소혜가 울상을 지었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울적해졌던 것이다.
“뭐가 슬퍼. 그게 당연한 건데. 난 오히려 너나 대혜, 예지가 처녀귀신이 되는 꼴은 못 본다.”
“그럼 정말 괜찮은 남자가 생기면 그때 생각해 볼게요!”
“잘생긴 남자가 고백해오면 냉큼 받아들일 거 같은데?”
“아뇨! 사부님 같은 남자가 오면 그때 고민해 볼게요. 히히!”
“녀석 참.”
애교 넘치는 심소혜의 대답에 벽우진이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의외로 합격률이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길게, 크게 흔적을 내기는 쉬워도 일정 깊이 이상 파내는 건 쉽지 않지. 적어도 묵철을 가지고.”
듬직하게 벽우진을 수행하던 양일우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시험인데 통과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다.
“확실히 제갈세가주가 영리한 것 같습니다. 딱 기준을 명확하게 잡았어요.”
“경신술 따위는 보지 않겠다는 거지. 내공운용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기본실력이니까. 저 정도 흠집도 내지 못하면 조 추첨을 할 자격도 없어.”
떨어지는 이들이야 돈도 아깝고 자존심도 상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차라리 지금 탈락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비무대 위에서 못난 꼴을 보이며 관중들의 야유를 받는 것보다는 말이다.
또한 하수와 중수를 나누는 기준이 생각 외로 높다는 걸 깨닫는 것만으로도 탈락자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테고.
“웬만한 무인들은 죄다 모인 것 같습니다, 사부님.”
“지금도 뒤로 계속 줄이 생기고 있잖아.”
“어후.”
양이추가 뒤를 돌아봤다가 식겁했다.
만약 이른 아침에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 뒤에 서 있을 거라 생각하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도 새치기는 없네.”
“할 배짱이 있겠어? 여기 사부님이 계신데.”
“흐흐흐! 하긴. 저 쪽에 보니까 산동악가주랑 하후세가주도 있던데.”
동갑내기인 양이추와 심대현이 시시덕거렸다.
명문세가의 가주들은 물론이고 벽우진이 있는 만큼 새치기를 할 정도로 간 큰 자는 없을 터였다.
또한 분명한 명분 없이 싸움을 일으키는 자는 바로 실격이라고 참가 등록을 할 때 누누이 강조했던 만큼 신경전은 있을 지라도 칼부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우와아!”
“대단하다!”
“역시 위지세가의 소가주!”
그때 앞쪽에서 거대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실력 발휘를 한 듯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저벅저벅.
감탄이 담겨 있는 환호성에 화려한 무복을 입고 있던 청년 하나가 잔뜩 거만한 기색으로 몸을 돌렸다.
합격을 하고 당당히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줄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양일우와 눈이 마주쳤다.
“흥.”
무당산에서 열린 용봉회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기에 위지건은 한눈에 양일우를 알아봤다.
그리고 도발적인 눈빛을 날렸다.
마치 예선전에서 만나면 제대로 밟아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 제 73장. 천하무림 비무대회.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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