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3장. 천하무림 비무대회. -02 >
“그래도 기대되지 않아? 내가 이 정도니까 너도 여기까지는 자라지 않겠어?”
“지금 놀리는 거지?”
“위로해 주는 건데?”
“그게 더 나빠!”
심소혜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더니 이내 탕 속으로 머리까지 집어넣었다.
“호호호.”
잠수한 상태로 멀어지는 막내의 모습에 심대혜가 웃으며 다시 물속 깊이 몸을 담갔다.
그리고는 물에 온몸을 맡긴 채로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지하에다가 이렇게 만드는 것도 좋네. 일단 시선도 확실하게 차단되고. 온도 유지도 쉬울 테고 말이지.’
실내를 살펴보며 심대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하에 이렇게 욕탕을 만드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서였다.
“언니도 그 생각하지?”
“다 풀렸어?”
“오래 생각해 봤자 내 기분만 나쁘니까. 하지만 지금만 진 거야. 내년에는 다를지 몰라.”
“그럴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지만.”
여전히 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심소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심대혜가 말했다.
마치 엄마처럼 머리를 정돈해주었던 것이다.
“두고 봐. 꼭 언니보다 커질 테니까!”
“사저는 힘들다고 인정한 모양이네?”
“사저는 뭐···.”
심소혜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머리를 감고 있는 서예지를 힐끔거렸다.
등만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심소혜는 그녀의 풍만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뒷모습은 너무나 가냘퍼 보이는데 말이다.
“잘 생각했어. 불가능한 꿈은 가급적 안 꾸는 게 좋아.”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게 있고.”
“맞아.”
“우리도 나중에 이렇게 지하에 욕실을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아. 건물을 크게 지어서 지하도 넓게 만드는 거야. 남자랑 여자랑 따로 사용할 수 있게.”
심소혜의 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어린 시절 그녀뿐만 아니라 형제들은 모두가 똑같은 꿈을 꾸었었다.
사남매가 함께 객잔을 운영하는 꿈을.
비록 지금은 곤륜파의 제자가 되어 무공을 익히고 있지만 누구도 그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당장은 안 되고 나중에.”
“나도 당장은 싫어. 사부님이랑 떨어지는 건 싫거든. 한 오십 년쯤 후에? 소일거리도 운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오십 년 후라. 각자 하나씩 맡아서 운영해도 되겠는데? 돈이야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모으면 되니까.”
“에이. 그럼 재미없을 거 같아. 다 같이 해야 재미도 있고 편하지.”
심소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각자 운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애초에 생각했던 게 사남매가 함께 하는 것이기도 했고.
“확실히 외롭기는 하겠다. 혼자 하면은.”
“그때쯤이면 다들 혼인해서 외롭지는 않을 것 같은데? 오히려 다툼이 있을 수도 있고.”
“아.”
젖은 머리를 틀어 올리며 서예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두 자매의 얼굴이 붉어졌다.
혼인이란 말에 무언가를 떠올린 듯 동시에 얼굴을 붉혔던 것이다.
“저, 저는 혼례 안 올릴 거예요. 사부님이랑 오순도순 살 거예요.”
“객잔은?”
“그건 출퇴근하면 되지. 어차피 곤륜산 인근에 차릴 테니까.”
“흐음. 그렇게 말한 아이들이 가장 먼저 시집을 가던데.”
심대혜가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안 그래도 속가제자들 중에서 심소혜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가 꽤나 많았다.
그래서 심대혜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막냇동생을 쳐다봤다.
“나는 달라. 어차피 내가 제일 오랫동안 사부님을 모실 걸? 내 나이가 가장 어리니까.”
“태어날 때는 순서대로 태어나지만, 가는 순서는 모르는 거야.”
“그런 말은 너무한 거 아냐?”
“장담할 수는 없다는 거지. 그리고 사부님을 오래 모시고 싶은 건 나도 똑같아. 대현이나 소천이도 마찬가지고.”
심대혜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심소혜가 못 이기는 척 안겼다.
“우선은 비무대회부터 생각하자. 사부님께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지.”
“목표는 우승!”
“쉽지 않을 걸?”
“그래도 목표는 우승이야!”
심소혜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서른 살 이하만 출전이 가능한 용봉전에는 심소혜뿐만 아니라 서예지와 양일우, 양이추 형제, 그리고 도일수도 참가했다.
거기다 구룡오화도 참가한다고 말이 도는 만큼 우승은 쉽지 않을 터였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하니까. 언니도 목표는 우승 아냐?”
“난 경험 삼아 나가는 건데? 서른두 명만 오를 수 있다는 본선무대에는 오르고 싶지만 우승에는 욕심 없어. 어렵기도 하고.”
“사람이 야망을 가져야지!”
여전히 품에 안긴 채로 심소혜가 소리쳤다.
하지만 심대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부님께서도 말씀하셨잖아. 승부에 너무 연연할 필요 없다고. 승리는 중요한 순간에 챙기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이야.”
“그렇기는 한데···.”
그 말을 들을 때 심소혜도 같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심소혜는 벽우진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우리도 너랑 다 똑같은 마음이야. 우승을 하면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 우리가 이만큼 크고 성장한 모습을 말이야.”
“흐으음.”
“자, 그만 올라가자. 다들 우리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저녁 든든히 먹고 다시 수련해야지.”
“응!”
심소혜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혼자서 씩씩하게 몸 구석구석을 닦기 시작했다.
“등은 내가 닦아줄게.”
“그럼 난 사저를 밀어드릴래.”
잠시 후 세 여인이 한쪽을 쳐다보며 나란히 앉았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번갈아가며 닦아주었던 것이다.
벽우진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는 번화가 건물의 지붕을 밟으며 이동했다.
거리와 골목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에 지붕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런 벽우진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점이었다.
휘익! 휘이익!
지붕을 타고서 이동하는 건 벽우진 뿐만이 아니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곳곳에서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사람들이랑 부대끼기 싫은 이들이 벽우진처럼 지붕을 이용했던 것이다.
“저곳인가.”
뒷짐을 진 채로 여유롭게 이동하던 벽우진은 주변의 객잔들을 압도하는 거대한 크기의 거각을 보고는 가볍게 몸을 날렸다.
딱 설명한 대로의 모습에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스스슥!
그런데 벽우진이 내려서기 무섭게 사방에서 날카로운 기세들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경비무사들이 발 빠르게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부터 숙였다.
“장문인.”
“내 얼굴 알지?”
“예.”
“근데 사칭한 놈이면 어떡하려고 순순히 인정해?”
벽우진이 가지각색의 복장을 하고 있는 무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얼굴만 보고 너무 순순히 기세를 거둔 것 같아서였다.
“용봉회 때 멀리서 장문인을 뵌 적이 있습니다. 외모와 체형은 따라할 수 있지만 장문인 특유의 눈빛과 분위기는 모방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그럼.”
조금의 의심도 없다는 듯이 확고하게 대답한 무사가 절도 있게 포권을 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분명 소속이 다른 무인들도 있는데 그의 의견에 딱히 반발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뭐, 나야 편하면 좋은 거지만.”
다시 제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무사들을 일별하며 벽우진이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하인의 안내를 받은 벽우진이 널찍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장문인.”
“아아.”
방 안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빈자리가 하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제갈현의 인사보다 열다섯 개만 놓여 있는 자리를 유심히 쳐다봤다.
‘이미 확정이 된 건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보며 벽우진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감지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구대문파에 다시 속하리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굳이 그렇게 아등바등 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세인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곤륜파는 대문파였고,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세인들의 평가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오시는데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알면서 뭘 물어?”
“하하하.”
“백주대낮에 양상군자 놀이 좀 하고 왔지. 도저히 인파를 헤쳐 나갈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제갈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들도 인해 그 역시 며칠 동안 골치를 썩고 있는 중이었다.
성황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그는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대책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마차를 타면 좀 낫습니다만.”
“대신 시간이 지붕을 건너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걸리겠지. 그보다 점창파는 결국 안 부른 거야?”
유일하게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며 벽우진이 물었다.
자리가 열다섯 개만 있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었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으니까.
“상황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유혈사태도 일어난 것 같고요. 쉬쉬 하고 있지만 사태가 심각한 모양입니다.”
“채 장문인하고도 연락이 안 되나?”
“예.”
제갈현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주위에 앉아 있던 이들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하니 상황이 그렇게나 심각하게 흘러갈 줄은 다들 몰랐다는 기색이었다.
“어쩌다가 그리된 건지.”
“욕심과 야망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그럼 결국 점창파는 제외한 건가?”
“오지 않으니 별 수 없지요.”
제갈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답장도 안 오는 마당이니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직접 점창산에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말이다.
“쯧쯧!”
“저도 안타깝습니다. 이 중요한 시점에 점창파를 잃는다는 건 너무나 큰 손실이니까요. 그런데 내부문제이기에 제 3자가 끼어들 수도 없는 문제라.”
“그렇긴 하지.”
“도와달라고 하면 그게 더 문제가 되기도 하고.”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개왕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점창파에 대해 가장 많이 알아본 곳이 바로 개방이었다.
때문에 제갈현 못지않게 개왕 역시 점창파의 사정에 밝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도와주기도 애매했다.
“자체적으로 잘 정리하기를 기대해 봐야지. 근데 이렇게 우리끼리만 모여도 괜찮나? 말이 나올 것 같은데.”
벽우진의 시선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따로 모인 만큼 아무래도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어서였다.
“늘 그렇듯이 말만 많을 것입니다.”
“실제로 따지는 이는 없겠지요. 오히려 이 자리를 차지하고 싶으면 모를까.”
“그냥 단순히 차 한 잔 하는 자리인데요.”
벽우진의 우려와 달리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새였다.
신경은 쓰이지만 딱히 염려하지는 않는 정도랄까.
그리고 그 저변에는 짙은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아마 따로 만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현재 낙양에는 내로라하는 명문세가와 대문파, 군소방파들이 거의 다 모여 있으니까요.”
“심지어 은거고수들이나 그의 후인들 역시 대거 와 있을 테지. 비무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내게 되면 단숨에 무명을 얻을 수 있으니까.”
제갈현과 개왕의 말에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오는 와중에 상당히 뛰어난 고수들을 꽤나 빈번하게 볼 수 있었다.
그가 살짝 놀랄 정도로 말이다.
“무림에 고수가 모래알처럼 많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지.”
“장문인의 제자들은 전부 출전 합니까?”
< 제 73장. 천하무림 비무대회.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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