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2장. 명문대파(名門大派). -04 >
곧은 걸음걸이로 다가온 정휴가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찰들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요즘에 질리도록 겪고 있었기에 보는 순간 무엇인지 알아차렸던 것이다.
“자네도 한눈에 알아보는군.”
“국주님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요즘 꽤나 시달리고 있거든요.”
“자네에게도?”
“예. 조금 다른 청탁도 있고요.”
청탁이라는 말에 유한열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게 청탁이라는 말보다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 없었다.
“다른 청탁?”
“대표두를 뽑을 계획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정휴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조차도 쉽게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대표두를 임명하는 건 오로지 국주인 유한열의 권한이었기에 정휴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하긴. 지금의 규모를 생각하면 대표두의 숫자가 적기는 하지. 비슷한 규모의 표국들의 경우 대표두가 적어도 여섯, 일곱 명 정도는 되니까.”
“그렇습니다. 대표두 자리를 준다면 이직하겠다고 은근히 운을 띄우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하하하.”
유한열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비호표국이 어려울 때는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던 이들이 이제는 되레 이직을 하고 싶어 하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아마 마 대표두도 비슷한 상황일 겁니다.”
“그럴 테지. 자네를 찾는데 마 대표두라고 다를까.”
“일단 저는 잘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저 숟가락 얹을 생각만 하고 있으니.”
유한열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대표두의 숫자가 적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비호표국을 운영함에 있어 어렵거나 버거운 점은 없었다.
두 명의 대표두 만으로도 비호표국은 충분히 잘 굴러갔다.
“저도 그게 좀 그랬습니다. 힘들 때는 그렇게도 피해 다니던 이들이 이제는 알아서 찾아오니까요.”
“이런 걸 보면 참 많은 게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니까.”
“저 역시 제가 이런 일을 겪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정휴의 시선이 다시 책상 위로 향했다.
그러자 유한열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니. 나조차도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아서. 이래서 중간에 끼면 난감해진다니까.”
“그래도 장문인께서 노하시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역시 그렇지?”
유한열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버거운 곳들에서 온 서신이라지만 상대가 벽우진이라면 얘기는 달라졌다.
그 어떤 곳도 벽우진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길게 오래 살려면 장문인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의 비호표국은 어떻게 보면 장문인께서 일으켜 세우신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물론 국주님의 역할도 상당하시지만요.”
“그게 어찌 나만 잘해서 된 일인가. 정 대표두와 마 대표두, 그리고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다 함께 잘해준 덕분이지. 물론 지분은 장문인이 가장 많이 가지고 계시지만 말이야.”
“맞습니다.”
“이번에 새로 표두가 된 이들은 어떤가?”
유한열이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표두들과 표사들을 관리하는 것은 정휴였기 때문이다.
“빠르게 적응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영입한 게 아니라 일급표사들이 표두로 대거 올라왔기에 반발도 적습니다. 오히려 표사들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언젠가는 자신들도 표두로 진급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외부 인사를 영입하는 것보다는 원래부터 데리고 있던 인력을 올리는 게 여러 모로 좋지. 충성심도 있고.”
“그렇습니다. 다만 다른 표국에 있던 이들이 많이 아쉬워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봤자 남이지. 우리 사람이 아니니까.”
유한열이 피식 웃었다.
그들이 아쉬워하든 말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비호표국 내의 사람이 중요하지 그 밖에 있는 사람은 그에게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이미 받은 것처럼, 맛 볼 것처럼 생각하니까요.”
“쯧쯧!”
“표사들도 그렇지만 쟁자수들을 뽑을 때도 경쟁이 치열하다고 합니다. 장문인의 눈에만 들면 속가제자가 아니라 본산제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일수는 특별한 경우였지. 그 후에 그렇게 간택 당한 일도 없고.”
곤륜파에 지원을 나갔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벽우진의 선택을 받은 이는 없었다.
심지어 신입표사들도 꽤나 많이 지원하러 갔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장문인의 눈에만 들면 인생역전이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가능했으면 인생역전이라는 단어도 생기지 않았겠지. 일수는 솔직히 운이 없었던 거지 누구보다 노력했던 아이니까. 어떻게 보면 그 노력이 빛을 발한 경우지.”
누구보다 근면성실하고 부지런했던 이가 도일수였다.
또한 십 년 넘게 꿈을 포기하지 않은 아이가 도일수였고.
그래서 유한열은 도일수가 벽우진의 선택을 받았을 때 누구보다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사람들은 결과만 보니까요. 운이라는 것도 작용하기도 하고 말이죠. 게다가 아직 장문인께서 제자들을 그만 뽑겠다고 말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호법님들도 제자를 받고 있으니 다들 눈이 돌아갈 수밖에요.”
“그래서 명단은?”
“가져왔습니다.”
정휴가 품속에서 곱게 접힌 보고서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런데 의외로 두께가 그리 두껍지 않았다.
“백 명 정도라고 하지 않았나?”
“추가로 스무 명이 더 늘었습니다. 종이가 얇은 건 낭비를 최대한 줄이고자 빽빽하게 적어서입니다.”
“나도 슬슬 노안이 오는데.”
“장문인 앞에서 그런 말씀 하시면 큰일 납니다.”
눈가를 비비는 유한열의 모습에 정휴가 실소를 흘렸다.
벽우진 앞에서 나이를 거론하는 건 금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미리부터 조심해야 했다.
“에이. 설마 내가 장문인께서 계신 자리에 그러겠는가. 출발 준비는 잘 되어가고?”
“예. 다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입표사, 쟁자수들 할 거 없이요.”
“이번에는 좀 뽑혔으면 좋겠군. 벌써 세 번이나 갔는데 단 한 명도 선택받은 이가 없었잖아.”
“몇 번 더 뽑히지 않으면 이런 류의 청탁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정휴가 살짝 기대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쏟아지듯 들어오니 이제는 흰머리가 생길 지경이었다.
아직 그는 장가도 가지 못했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어. 이 일을 관두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계속 시달릴 걸세. 자네나 나나 똑같이. 혹 곤륜파나 장문인께서 잘못되면 모를까.”
“그렇겠죠.”
“예전보다는 낫지 않은가. 지금 정도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고.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편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니 투정은 그만 부리게.”
“예.”
유한열이 보고서를 펼쳤다.
마지막으로 인원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업무를 일찍 끝낸 후 벽우진은 집무실을 나섰다.
비호표국에서 사람들이 오는 날이었기에 마중도 나가고 확인도 할 겸 나선 것이다.
이윽고 미끄러지듯이 이동한 벽우진의 눈에 꽤 많은 인원을 안내하는 도일수가 들어왔다.
“자식. 이제는 다른 애들한테 맡겨도 된다니까.”
뒷짐을 지고 있던 벽우진이 혀를 찼다.
자신의 제자들 중에서는 막내지만 이제 도일수의 밑으로도 제법 많은 사제들이 생겼다.
속가제자들은 물론이고 청민과 서진후의 제자들도 있었기에 벽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앞장서서 숙소로 안내하는 도일수의 모습을 보며 벽우진이 땅을 박찼다.
이윽고 벽우진의 신형이 도일수의 옆에 떨어졌다.
“사부님!”
“장문인!”
“아아. 잘들 지냈어?”
갑자기 나타난 벽우진이었지만 도일수나 유한열은 놀라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기에 크게 당황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뒤따르던 인원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야 늘 똑같습죠. 허허허.”
“대표두들 남기고 왜 국주가 왔어? 요즘 많이 바쁘다고 하던데.”
“둘 다 일이 많아서요. 그리고 소문과 달리 막 엄청 바쁜 건 아닙니다. 또 인사를 드린 지도 좀 된 것 같아서 직접 왔습니다.”
“고생했네.”
공손히 인사하는 유한열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벽우진이 시선을 돌렸다.
유한열이 데려온 이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꿀꺽!
뜬금없이 나타난 벽우진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 십대 초반에서 이십대 초반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간택을 받을 지도 몰랐기에 다들 하나같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벽우진의 시선에 그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다들 기대가 큽니다.”
“그래서 국주가 고생을 많이 하는 거 알고 있습니다.”
“고생이라니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그렇다고 얻는 게 없는 것도 아니고요.”
“흐음.”
“···이번에도 없습니까?”
유한열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어째 벽우진의 반응이 시원찮은 것 같아서였다.
“한 번 본다고 아나. 내가 신도 아닌데. 좀 더 지켜봐야지.”
“지켜볼 만한 아이들은 있다는 거군요.”
유한열이 눈을 반짝였다.
적어도 기준에 근접한 아이들은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건 늘 있었어. 단지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지. 일단 숙소배정부터 해. 유 국주는 바로 내려가나?”
“차를 한 잔 얻어 마셔도 될까요?”
“안 될 것은 없지.”
벽우진이 흔쾌히 대답했다.
차 한 잔 주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기에 벽우진은 도일수에게 인솔을 맡기고는 유한열을 데리고 몸을 돌렸다.
“우와.”
“존재감 장난 아냐. 눈이 마주쳤는데 아주 그냥.”
“역시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는 괜히 고수가 아니구나.”
“나 오줌 지릴 뻔.”
휘적휘적 걸어가는 벽우진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소곤거렸다.
소문으로만 듣던 벽우진을 직접 보게 되자 들뜬 것이었다.
하지만 몇몇은 벌써부터 얼굴이 어두워져 있었다.
당연히 마주치자마자 간택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였다.
“가시죠.”
기대가 한풀 꺾인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 실소를 흘리며 도일수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에게로 온 시선이 쏠렸다.
비호표국의 만년 쟁자수에서 벽우진의 제자가 된 이가 바로 눈앞의 도일수였다.
그래서인지 다들 선망 어린 눈빛으로 도일수를 쳐다봤다.
“저기요.”
“말하세요.”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모두가 선망 어린 시선을 보낼 때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표사 중 한 명이 슬그머니 도일수에게 다가갔다.
지켜보기만 해서는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기에 먼저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 모습에 도일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장문인의 눈에 들으셨습니까?”
“음.”
남자의 질문에 뒤따르던 모두가 귀를 쫑긋거렸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가 도일수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조언을 좀 구하고 싶습니다.”
“저도요!”
“저도 듣고 싶어요!”
곧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듯이 뒤에서도 간절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본 파에서 속가제자들을 모집할 때의 일을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모두가 다 아는 그런 것 말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사부님의 속마음은 사부님만이 아시니까요.”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원한 건 이런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일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제 72장. 명문대파(名門大派).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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