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32화 (232/325)

< 제 72장. 명문대파(名門大派). -03 >

서진후가 쪽지를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벽우진은 의외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오만한 성격도 틀린 건 아니었지만 정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죽은 속가제자들의 생일을 일일이 챙기는 것이었고.

“사실 그 어느 문파도 일개 속가제자에게 이런 신경을 쓰지는 않지.”

대문파는 괜히 대문파가 아니었다.

규모도 규모지만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 역시 많았다.

본산제자들도 많았으며 속가제자들은 그 몇 배나 되었다.

그런 만큼 장문인 씩이나 되는 사람이 속가제자들을 일일이 안다는 건 불가능했다.

“아직 우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은 아니니까.”

벽우진은 달랑 서신이나 서찰을 써서 보내는 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그렇게 하고 보통은 자신이 직접 움직였다.

그래서 지금도 자리를 비운 것이었고.

하지만 그게 서진후는 싫지 않았다.

그만큼 한 명 한 명을 소중히 대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 정도 인간미는 있어야 사람이지.”

가끔 서진후는 물론이고 청민도 문득 걱정이 될 때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벽우진이 떠나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죽음이 아니라 우화등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와 청민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런 미담들이 좀 알려져야 사형의 괴상한 소문도 좀 잠잠해질 텐데.”

자리를 비운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가 책상에 쌓이겠지만 이런 일이라면 괜찮았다.

농땡이를 피우는 것도 아니고 속가제자와 유가족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벽우진의 방문에 감격해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터였다.

“이제는 기틀도 어느 정도 잡혔으니까.”

곤륜파의 후예라는 걸 사칭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중에는 진짜도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곤륜파는 극심한 인력부족에서 조금은 벗어난 상태였다.

거기다 호법들 역시 제자들을 거두었고, 속가제자들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기에 서진후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점차 성장하는 곤륜파를 보자 든든했던 것이다.

“내 제자들도 잘 크고 있고.”

무공에 늦게 입문했지만 어차피 그는 제자들에게 무력적으로 큰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충성심을 보고 뽑기도 했고, 곤륜파의 무력을 대표할 이들은 따로 있었다.

그런 만큼 그는 무공의 성취에 대해서는 크게 독촉하지 않는 중이었다.

똑똑똑.

“사부님. 저 예지입니다.”

“사형은 안 계신다.”

“···할아버지세요?”

“내가 주인은 아니지만,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며 놀란 표정의 서예지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이내 벽우진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부님은 어디 가신 건가요?”

“하삼이네 집에 가신 듯하다.”

“아.”

벽우진이 남긴 쪽지를 서진후가 손가락으로 집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자 서예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속가제자들의 신상에 대해서 벽우진이 따로 조사했었음을 알기에 왜 갔는지 바로 이해한 것이었다.

“너도 알고 있었느냐?”

“대막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외출이 잦으셨으니까요.”

“일단 앉자. 서서 대화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래도 될까요? 사부님도 안 계신데.”

“사형 성격을 알지 않느냐. 이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쓸 거다. 오늘 집무실에 들어오려나 모르겠다.”

서진후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러 가지 일로 바쁜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농땡이도 잘 피우는 게 벽우진이었다.

집무실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고.

만약 집무실에 관심이 있었다면 이렇게 휑하지만은 않았을 터였다.

“제가 따라드릴게요.”

“이제는 삼매진화도 할 줄 알고. 우리 손녀 많이 컸네, 진짜.”

“수련은 꾸준히 하고 있으니까요. 공력도 사부님의 은혜로 부족함이 없고요.”

“허허허.”

서진후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완연한 절정고수가 된 손녀의 모습이 너무나 뿌듯했던 것이다.

더구나 미모로 얻은 청해일미가 아닌 검봉으로 불린다는 사실도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우리 가문에서 검봉이라 불리는 여고수가 나올 줄이야.’

상재(商才)라면 모를까 무재(武才)를 타고난 아이는 여태껏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가지 못했던 그 길을 서예지가 개척했기에 그는 더더욱 뿌듯했다.

“그런 은혜를 입었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그게 더 문제이지 않을까요?”

“네 말도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 노력을 깎아내리지는 말거라. 네가 한 노력만큼은 진짜니까. 또 모두가 알고 있고.”

“저만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요.”

서예지가 빙그레 웃으며 조부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이윽고 깊고 그윽한 차향이 서서히 방 안을 채워나갔다.

“이렇게 단 둘이 있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구나.”

“그러게요.”

“예지야.”

“예, 할아버지.”

박자를 맞추듯 서진후와 같이 차를 들이켜던 서예지가 담담히 대답하며 조부의 눈을 쳐다봤다.

그러자 새까맣고 심유한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더냐?”

“네.”

“그 많은 후기지수 중에서? 구룡도 있었는데?”

“단 한 명도 제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없었어요.”

은근한 어조로 물었던 서진후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너무나 단호한 대답에 찔러볼 여지조차 없는 듯해서였다.

“우리 손녀, 알고 보니 눈이 엄청 높구나?”

“높다기보다는, 아직 제 마음을 흔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 같아요. 할아버지께서도, 아버지도 저에게 말씀하셨잖아요. 절대 정략결혼만은 시키지 않겠다고.”

“그랬었지.”

서진후는 오래 전 일이 떠올랐다.

천검문의 망나니가 정말 오랜만에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던 것이다.

만약 그때 벽우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청하상단은 물론이고 자신 역시 땅 속에 있었을 터였다.

그때의 천검문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으니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아버지보다 먼저요.”

“그건 참 마음에 드는 소리로구나. 후후!”

“전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더 좋아했다는 거 알고 계시죠?”

서예지가 빙긋 웃었다.

어릴 때처럼 애교 넘치게 다가와 안기지는 않았지만 서진후는 이런 모습조차도 기꺼웠다.

무공을 익히면서 너무 차가워지는 건 아닐까 우려했었는데 다행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같이 어울려 지낼 사형제가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지.’

호적수가 있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사형제 또한 필요했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의외로 중요한 게 바로 심리적인 부분이었다.

“애비가 바빠서 그런 건 아니고?”

“그것도 없지 않아 있고요. 저랑 오빠와 늘 같이 놀아주신 게 할아버지시잖아요.”

“시간이 참 빨리 지났어. 내 품에서 오줌을 싸던 애들이 어느새 이렇게 장성했으니.”

“할아버지!”

오줌싸개 시절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모습에 서예지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모습에 서진후는 오히려 웃었다.

“뭐 어떠냐. 여기에는 우리 밖에 없는데.”

“그래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도 있는데요. 가뜩이나 요즘 애들 오감이 얼마나 예민해져 있는데!”

서예지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좌우로 휙휙 돌렸다.

아무래도 여름이기도 하고 환기도 시킬 겸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기에 서진후의 목소리가 새어나갈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래서 서예지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연신 살폈다.

“이럴 때 보면 예전이랑 똑같은데 말이지.”

“할아버지!”

“그래그래. 알았다. 농담은 이만하마. 허허허.”

매서운 손녀의 눈빛에 서진후가 항복하겠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런데 잠시 웃던 서진후가 묘한 눈으로 서예지를 쳐다봤다.

“무기명이기는 하지만 저는 사부님의 첫 번째 제자라고요. 저의 위신도 좀 생각해주세요.”

“녀석. 근데 예지야. 할아비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다.”

“어떤 거요?”

여전히 창문을 살피며 서예지가 대답했다.

자신의 기감에 잡히는 기척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양일우나 도일수는 그녀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기에 서예지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사형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아니지?”

“사숙이요?”

“아니. 청류 사형.”

“무슨 말씀이세요.”

농담처럼 청민을 거론했던 서예지가 실소를 흘렸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서였다.

“정말이지?”

“제가 어떻게 사부님께 그런 감정을 가져요. 불손하게. 전 그저 한 명의 무인으로서, 그리고 제자로서 사부님을 존경하는 것뿐이에요. 물론 사부님 때문에 눈이 높아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기는 하지만요.”

서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휴우. 다행이구나. 난 또 혹시나 하는 심정에.”

“나이 차이가 얼마인데요. 애초에 불가능한 사랑이기도 하고요.”

“사형이 여자에 관심이 전혀 없으니까. 근데 또 모르는 게 남녀사이이기도 하고.”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께서 걱정하는 일은 절대 없으니까요.”

무엇이 그리 웃긴지 서예지가 실소를 계속 흘렸다.

그리고 서진후 역시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근데 사형 때문에 눈이 높아졌다니 큰일이로구나. 군자검룡도 눈에 안 차겠어.”

“잘생기긴 했지만 제 취향은 아니에요.”

“그래도 남궁세가면 가문은 훌륭하지. 사천당가에 따라잡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천하제일가로 불리는 가문이 아니더냐.”

“아까우세요?”

서예지가 웃으며 조부를 쳐다봤다.

표정을 보아하니 나름 진지하게 생각했던 듯했다.

“흠흠! 그런 말이 아니라 나쁘지 않다는 거지. 손자사위의 가문으로는.”

“안타깝게도 저는 관심이 없어요.”

“그래도 혼인은 현실인 거 알고 있지? 사랑과 조건을 다 봐야 하는 게 결혼이다. 둘 다 볼 수 없다면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야 해.”

“명심할게요.”

서예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말은 어려서부터 엄마에게서 귀에 박히도록 들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했고.

“사형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겠네.”

“저녁 먹기 전에는 돌아오실지 않을까요? 늘 그랬잖아요.”

“일이 많이 밀렸는데 말이지.”

“안 들어오실 수도 있겠네요. 그런 촉은 또 기가 막히시잖아요.”

서진후가 입맛을 다셨다.

벽우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으니까.

이윽고 서진후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비호표국의 국주 유한열이 복잡한 표정으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책상 위에는 청해성은 물론이고 인접해 있는 사천성, 감숙성에서 온 서신들이 한 가득 쌓여 있었다.

“후우.”

국주로서 처리해야 할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로 그에게 온 서신들의 숫자는 상당했다.

그것도 하나같이 처리하기가 난감한 것들이었기에 유한열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표국이 커지는 것은 좋은데, 이런 건 참 힘들군.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지금의 그조차도 함부로 하기 힘든 곳에서 온 서신들도 있었기에 유한열으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결정권이 그에게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어서였다.

어떻게 보면 그는 중간에 낀 상태였다.

“국주님. 정휴입니다.”

“들어오게.”

정작 봐야 하는 업무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연거푸 한숨만 내쉬던 그가 문밖에서 들려오는 대표두의 목소리에 입을 열었다.

잠시 후 말끔한 정복 차림의 정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고르고 고른 게 그 정도입니까?”

< 제 72장. 명문대파(名門大派).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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