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31화 (231/325)

< 제 72장. 명문대파(名門大派). -02 >

“너도 느껴서 묻는 거겠지만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이유요?”

벽우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쪼그려 앉는 바람에 흙먼지가 묻은 장포의 끝자락을 손바닥으로 팡팡 털었다.

“응. 눈앞에서 사형제들을 잃었거든. 그게 본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는 게 또 인간이기도 하니까.”

“아···.”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저렇게 처절하게 수련하는 거다. 다른 이유 때문에 그러는 아이도 있고. 하지만 모두가 똑같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건 있지.”

“그게 무엇인가요?”

별 거 아닌 말임에도 왠지 모르게 가슴을 울리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문정일이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기초체력을 단련하는 제자들에게 향한 채로 말이다.

“각오. 우리 애들이 다른 문파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이유는 별 거 없어. 강해져야 한다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그게 각오로 이어졌기에 눈부신 성장세를 보여주는 거지.”

꿀꺽!

“그러니 너도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봐. 그런 각오가 있는지. 어쭙잖게 달려들면 어중간한 수준 밖에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마른침을 삼키던 문정일이 방금 전과는 다른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심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단순히 무인이 되고 싶어서, 협객이 되고자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게 얼마나 철없는 행동인지 깨달은 것이었다.

“뭐, 지금 네 나이는 아무 생각 없이 놀아도 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말이지.”

“저희 동네에서는 열일곱에 장가가는 형들도 있는데요?”

“그럼 뭐해. 네가 간 게 아닌데.”

“에헤헤헤.”

“배고프면 식당에 가서 간식이라도 달라고 해. 너는 지금 한창 먹을 때니까. 지금 많이 먹어야 키도 큰다. 알지? 남자에게 있어 키는 무엇보다 중요해.”

벽우진이 히죽 웃으며 말하고는 뒷짐을 지고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마치 동네 한량이 연상되는 그 모습에 문정일은 실소를 흘렸다.

저 모습만 보면 누구도 패선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무겁고 처연한 분위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큼지막한 원탁에는 산해진미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온갖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지만 가족들 중 누구 하나 선뜻 수저를 들지 않았다.

대신 숙연한 얼굴로 빈자리를 멍하니 쳐다봤다.

주인 없이 수저하고 앞 접시만 덩그러니 있는 그 자리를 말이다.

“크흑!”

멍하니 빈자리를 쳐다보던 중년여인이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집안의 안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의 울음소리에 가장인 중년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두 눈을 감았다.

부인이 어떤 심정인지 그는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어서였다.

“하아.”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깊은 한숨뿐이었다.

아내가 아들을 잃은 것처럼 그 역시 아들을 가슴 속에 묻었다.

그렇기에 그는 부인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잉어찜이 여기 있는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잉어찜을 보자 중년여인은 다시금 슬픔이 복받쳤다.

살아생전 그렇게나 셋째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이 바로 이 잉어찜이었다.

하루 종일 잉어찜만 먹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 잉어찜이 앞에 있는데 아들은 없었다.

“여보.”

“크흐흐흑!”

“···먹자.”

자신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듯한 부인의 모습에 중년인이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었다.

죽은 아들을 기억하며 살아가면 되었다.

똑똑똑.

자고로 음식은 식기 전에 따뜻할 때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법이었다.

더구나 그와 자식들 모두 주방에서 일을 하는 숙수였기에 잠시간의 묵념 후 식사를 시작했다.

한데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첫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셋째의 기일이기에 오늘은 장사도 하지 않는데 집으로 누군가가 찾아오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당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먹자.”

“예.”

첫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며 중년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연신 자신의 부인을 살폈다.

아무리 슬퍼도 밥을 먹어야 울 기력도 생기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인의 앞 접시에 음식을 조금씩 덜었다.

“흐허업!”

그때 마당 쪽에서 기함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듯한 첫째의 괴성이 방 안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응? 형 목소리 같은데요?”

“왜 그러지?”

그 소리에 원탁에 앉아있던 모두가 마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내며느리는 슬그머니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통해 마당을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에구머니나!”

“왜 그러느냐, 아가?”

창문을 열었던 막내며느리가 화들짝 놀라자 중년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왜들 그렇게 놀라나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자, 자···!”

“대체 누군데 그러는 것이냐?”

“흑흑흑!”

옆에 앉은 아내는 여전히 울고 있고 막내며느리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중년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지켜보던 둘째 아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칵!

“아버지! 아버지!”

그 순간 방문이 열렸다.

마당에 나갔던 첫째가 헐레벌떡 뛰어온 것이었다.

한데 그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자, 장문인께서. 곤륜파의 장문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뭐야?!”

중년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둘째 아들은 물론이고 둘째 며느리, 막내아들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벅저벅.

그리고 그때 발자국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동시에 모두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자자자, 장문인!”

황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던 중년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입가에는 방금 먹은 소채볶음의 양념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지만 중년인은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정도로 놀란 것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 그건 다른 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중년여인을 제외한 모두가 파도를 타듯이 벽우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거 너무 지나치게 환대해 주시는 것 같은데요. 주인공인 제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

뒤늦게 벽우진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중년여인의 동공이 크게 확대됐다.

설마 하니 벽우진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리라고는 정말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었기에 중년여인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굳어버렸다.

“하삼이의 생일인데 얼굴은 비춰야 할 것 같아서요. 오랜만에 인사도 드릴 겸.”

벽우진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음성에는 슬픔이 짙게 서려 있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벽우진은 장하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큰 울림을 주었다.

“장문인···.”

“두 분만큼은 아니지만 저에게도 하삼이는 소중한 제자였습니다. 또한 곤륜의 아이였고요. 생일상에 찾아올 자격 정도는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물론입니다. 아가야. 의자 하나 가져오너라.”

중년인이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막내며느리에게 말했다.

손님을 이대로 세워둘 수는 없어서였다.

게다가 그냥 손님도 아니고 패선이었다.

“아닙니다. 잠시 들른 것뿐입니다. 가족 분들께 불편을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고개를 젓는 벽우진의 모습에 중년인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도 손님인데 이렇게 세워두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단호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가족 분들께 인사도 드리고 이걸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래도 식사는 하시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손님을 보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더구나 하삼이 때문에 오셨는데요.”

장하삼의 부친이 이건 정말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벽우진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삼이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으면 해서요. 또한 이 자리는 제게 허락된 자리도 아니고요.”

스윽.

말을 마친 벽우진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무언가를 중년인에게 건넸다.

비단으로 감싸인 길쭉한 물건에 중년인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하삼이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입니다. 아버님께서 대신 받아주시지요.”

“예?”

“그럼.”

당황한 중년인에게 벽우진은 정중히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중년인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벽우진의 모습은 이내 사라진 뒤였다.

말 그대로 바람처럼 사라진 모습에 중년인은 물론이고 가족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벽우진이 건네주고 간 물건이 없었더라면 다들 똑같은 꿈을 꾸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소문과는 진짜 다르네요.”

“그러니까요.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되는 것 같습니다.”

벽우진이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며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입을 열었다.

둘 다 벽우진이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여전히 놀란 기색이었다.

“뭐, 나야 곤륜산에서 뵈었을 때 그런 걸 느끼긴 했지만.”

“무슨 소리. 그 날 형 욕 엄청 했잖아. 곤륜파 때문에 셋째가 죽었다고.”

“커험!”

둘째의 말에 첫째가 헛기침을 했다.

사실이기에 딱히 할 변명거리가 없어서였다.

“셋째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 줄이야···.”

“한 번 열어봐요. 장문인께서 직접 가져오신 건데.”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슬렀는지 아내가 소매로 눈가를 슥슥 비비며 다가왔다.

그러자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비단을 벗겨냈다.

“이건···.”

“검이네요. 근데 새 것 같은데요?”

고급스러운 비단에 감싸여 있던 물건은 바로 검이었다.

그것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검의 모습에 중년인이 두 눈을 감았다.

무슨 의미로 벽우진이 이 검을 주었는지 그는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근데 조금 해괴망측하지 않아요? 곤륜파의 속가제자가 되어서 돌아가셨는데.”

갑자기 내려앉은 적막에 막내며느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굳이 저 검을 가져왔어야 했나 싶어서였다.

이제 겨우 잊어 가는 시점에서 말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감사하지. 장문인께서 이 검을 주고 간 이유는 하삼이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더구나 장문인께서 직접 오시지 않았더냐. 큰일을 하시는 분이신데.”

산골마을에서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신선처럼 생각하는 이가 벽우진이었다.

무인들이야 두 말할 필요가 없었고.

특히 청해성에서 벽우진이 가지는 위상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잊지 않겠다···.”

“어떻게 보면 약속을 하고 가신 게지.”

“하삼아.”

장하삼의 모친이 벽우진이 주고 간 검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는 죽은 아들을 껴안듯이 소중이 검을 품 안에 안았다.

서진후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안쪽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없었다.

평소에는 귀신 같이 그가 온 것을 알아차렸는데 말이다.

“기척이야 늘 없었고.”

시간을 두고서 두 번 두드린 후 서진후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역시나 비어 있는 방 안의 풍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디 가신다는 말은 없었는데.”

곤륜파의 장문인이 사용하는 집무실답지 않게 방 안은 단출했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몇 개의 책장이 전부였다.

정말 딱 필요한 것만 있는 집무실의 풍경에 서진후는 실소를 흘리고는 평소 벽우진이 업무를 보는 가장 안쪽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하삼이네 가셨구나.”

책상 위에는 마치 그가 방문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작은 쪽지 하나가 있었다.

그에게 남긴 벽우진의 글이 있었던 것이다.

“거리가 상당할 텐데. 하긴, 어검비행으로 가면 성도도 금방이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말을 타고 며칠을 갈 거리도 벽우진은 하루도 안 걸려 갈 수 있었다.

어검비행술을 펼치면 거리는 무의미해졌던 것이다.

“의외로 정이 많으시다니까.”

< 제 72장. 명문대파(名門大派).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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