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30화 (230/325)

< 제 72장. 명문대파(名門大派). -01 >

서진후가 턱을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극심한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게 현재의 곤륜파였다.

장로는 단 둘 뿐이고 호법들이 있다고 하나 문파 내부의 일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약간의 관심도 제자를 들이고 나서는 아예 사라졌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으니까.”

오죽 했으면 한동안 문파 내 안살림을 서예지가 도맡아서 했을 정도였다.

지금은 그가 비청단을 관리하면서 그 몫을 이어받기는 했지만 단 세 명이서 대문파를 이끌어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똑똑똑.

“접니다, 청범 사형.”

“들어 와.”

문이 열리고 문중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처음 봤을 때와 사뭇 달랐다.

잔뜩 굽어 있던 등은 꼿꼿이 세워져 있었고 비쩍 말라 있던 몸에도 살이 어느 정도 붙은 모습이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데 살 좀 찌니까 정말 보기 좋다. 진즉에 그러지 그랬어.”

“밥이 잘 넘어가질 않아서요.”

“운기행공은?”

서진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중헌에게 자리를 권하며 그 앞에 앉았다.

그런데 그의 말에 문중헌이 머쓱하게 웃었다.

“꾸준히 하고는 있습니다만···.”

“쉽지 않지? 혈맥은 다 굳었고, 몸 상태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고.”

“맞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해야 해. 나나 두 사형이 네가 고수가 되길 바라는 게 아니야. 그저 사문의 무공을 익히고, 오래 살아주었으면 해서 자꾸 잔소리하는 거지.”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중헌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해준다는 것 자체가 기뻤다.

이런 말도 다 관심이 있고 애정이 있기에 하는 소리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생활은 좀 어때?”

“적응이 안 되기는 하지만, 좋습니다. 일단 마음이 편합니다.”

“그건 다행이네. 근데 왜 적응이 안 돼? 구조는 예전이랑 똑같은데. 새로 지었을 뿐이지 모든 게 똑같은데 말이지.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이 없다는 것뿐.”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긴. 59년의 세월이 짧지는 않지.”

평범한 촌부라면 진즉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세월이었다.

무인이라고 해서 꼭 오래 사는 것만은 아니었고.

전쟁이나 문파 간의 분쟁으로 인해 일반 양민보다도 더 이른 나이에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엄청 긴 시간이지요. 그리고 장문인께 머무는 걸 허락 받기는 했으나 계속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라.”

“돌아가려느냐?”

“저야 눈칫밥을 먹더라도 이곳에 머물 수 있지만 손자 녀석은 아니니까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본 파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속가제자들이 수련하는 것도 자주 지켜보고.”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들이니까요. 본산제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리 작지 않은 마을이다 보니 또래가 있기는 해도 이곳처럼 많지는 않았다.

게다가 제대로 된 무인을 처음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문정일은 하루가 멀다하고 곤륜파 경내를 쏘다니고 있었다.

“일단 너는 머물고 싶다 이거지?”

“장문인께서 허락하신다면요.”

“그럼 이참에 일을 해보는 건 어때? 사문을 위해서.”

“일이요?”

문중헌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당황한 것이었다.

“일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야. 나나 청민 사형을 보조하는 정도? 너도 며칠 지내 봐서 알겠지만 현재 본 파에 사람이 없는 건 알고 있지?”

“예.”

“그래서 나는 네가 그 부분을 좀 도와주었으면 해. 싫으면 어쩔 수 없고. 강요하지는 않아.”

“어···.”

문중헌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놀람과 부담이 뒤섞인 듯한 그의 표정에 서진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부담은 갖지 말고. 그냥 네 의중을 물어보는 거니까.”

“제가 맡아도 될까요?”

“비중 있거나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게 아냐. 간단하면서도 자잘한 일이지.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일 텐데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맡기겠어?”

“보조 정도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문중헌이 눈을 빛냈다.

많이 늦었지만 사문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고맙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업무를 보면서도 수련을 게을리 하면 안 돼. 개인수련은 기본이야.”

“물론입니다.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부진 얼굴로 대답하는 문중헌의 모습에 서진후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야 청욱이라는 도명을 하사 받은 이다웠다.

“아, 정일이의 마음은 어떤 거 같아?”

“정일이요?”

“응. 너희 둘만 괜찮다면 곤륜파의 무공을 가르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청류 사형도 자질이 상당하다고 하셨고. 마른 체형이지만 강골이라던데.”

“장문인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문중헌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다른 이도 아니고 안목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벽우진이 손자의 자질을 높게 평가하자 놀란 것이었다.

“응. 근데 당사자가 싫어하면 별 수 없지. 말을 냇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으니.”

“제가 보기에 관심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네가 한 번 가르쳐 봐. 기본기 정도는 너도 수련하면서 가르칠 수 있잖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기본공이라고 해도 모든 무공은 문파의 것이었다.

때문에 문중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허락한 것이면 문제가 되겠지만 장문인께서 허락하셨으니 마음 편히 가르쳐도 돼.”

“아!”

“잘 가르쳐 봐. 내가 보기에도 근골은 좋아 보였으니까.”

“감사합니다, 사형.”

“나한테 고마워할 것은 없고. 그럼 이제 네가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자.”

문정일에 대한 것을 마무리 지으며 서진후가 본격적으로 업무에 대해서 말을 시작했다.

그러자 문중헌의 눈빛 역시 진지해졌다.

사문에 관한 일인 만큼 허투루 들을 수는 없어서였다.

“흐읍!”

“좀만 더 참아!”

“꼴찌는 뒷간 청소다!”

이른 아침부터 연무장이 소란스러웠다.

본산제자들은 물론이고 속가제자들도 전부 모여 몸을 단련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연무장의 한 쪽에서 문정일이 묘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되게 열심히 하네.”

기마자세나 달리기 등 곤륜파의 제자들은 별 거 아닌 단련을 엄청난 집중력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장난기를 찾기 힘들 정도로 진지하게 훈련에 임하는 모습에 문정일은 미간을 좁혔다.

쓸데없이 너무 진지한 것 같아서였다.

“우와.”

그러다가 서예지를 발견하고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집에서 곤륜산까지 오면서 숱한 마을과 도시를 가로 질렀지만 그의 짧은 인생에서 최고의 미녀를 꼽으라고 하면 그는 주저 없이 서예지를 선택할 터였다.

그 정도로 서예지의 미모는 압도적이었다.

심대혜도 미인이었지만 서예지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

“괜히 청해일미라 불리는 게 아니네. 아, 요즘에는 검봉이라는 별호로 불린다고 했던가?”

문정일이 중얼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자신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지만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졌다.

“자세 흐트러지지 않게! 곧고 올바르게!”

“예!”

심지어 서예지는 양일우와 함께 가장 앞에서 솔선수범 했다.

남자들이 대제자라 할 수 있는 양일우를 따른다면 소녀들과 여아들은 전부 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서예지를 따랐다.

그것도 대여섯 살이나 될 법한 아이들이 작은 검을 들고서 말이다.

“우리도 뒤질 수 없지!”

“물론이에요!”

“차합!”

마지막 세 번째 무리는 심대현이 이끌고 있었다.

권장지각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모아서 진구의 제자들과 함께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나름 분류를 해서 효율적으로 수련하는 것이었다.

“헤에.”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 법한 형제 두 명이 엄청난 열의를 뿜어내며 수련에 매진했다.

진짜 수련하다가 죽을 것처럼 말이다.

그게 문정일은 신기하면서도 놀라웠다.

마을의 꼬맹이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기에 사실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가 않았다.

“저게 명문대파의 모습인가.”

“많이 신기해?”

“히익!”

편하게 땅바닥에 엎어져서 구경을 하던 문정일이 대경실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아, 미안. 내가 너무 기척 없이 왔나?”

“자, 장문인!”

놀라서 옆으로 몸을 훌쩍 날린 문정일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벽우진이 방금 그자 엎드려 있던 자리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아 있어서였다.

“그래도 내 얼굴은 기억하나보네.”

“아, 안녕하십니까!”

“너무 크게 인사할 거 없어. 왜 쓸데없이 인사에 기합을 넣어? 나 아직 정정하니까 작게 말해도 다 들려.”

“죄송합니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구경하고 있었어요. 오전 수련은 봐도 된다고 해서···. 혹시 안 되는 거였나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문정일이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자신이 실수한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안 될 게 뭐 있어. 본 파의 비전무공을 수련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냥 단체훈련 하는 건데. 근데 애들 구경하는 걸 보면 무공에 관심이 좀 있나 봐?”

벽우진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청욱의 손자라서 한 말이 아니라 문정일의 근골은 나쁘지 않았다.

지금은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른 꼴이지만 살이 좀 오른다면 다른 이들도 알아볼 터였다.

게다가 혼자서 조부를 모시고 먼 길을 올 정도로 효심이 깊기도 했고.

“관심은 있는데요. 제 주제에 관심을 가져도 되나 싶기도 하고···.”

“네 주제가 어때서?”

점점 더 작아지는 문정일의 목소리에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분제가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무림은 조금 달랐다.

힘이 있으면 타고난 신분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었다.

그래서 본래의 신분을 감추고 무인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어, 저는 농사꾼의 아들인데요.”

“내 제자들은 눈 색깔이 다른 혼혈들도 있고, 땅꾼의 자식도 있는데?”

“······.”

문정일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변방이라는 청해성이라고 하지만 제자들의 구성이 상당히 다양했다.

“게다가 조부가 곤륜의 제자인데 무슨 자격 타령이야?”

“음···.”

철이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래 봤자 열다섯 살 소년이었다.

그렇기에 문정일은 벽우진의 눈치를 살피며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건 네 마음이야.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야 해. 물론 주변 환경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네 마음이 말하는 걸 모른 채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지는 마. 언제나 네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해. 이왕 태어난 거, 네가 진짜로 원하는 걸 하면서 사는 게 좋지 않겠어?”

“예에.”

“뭐, 그래도 신중한 건 마음에 드네. 다짜고짜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지 않는 점은.”

“보통은 장문인께 그러지 못할 것 같은데요.”

“있더라도. 얼굴 두꺼운 사람들이 은근히 많아.”

무당파에서 열렸던 용봉회를 떠올리며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정말 난감하다 못해 짜증이 났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저기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사내대장부가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왜들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거예요? 꼬마 애들도 집중력이 장난 아니던데.”

문정일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지켜볼수록 계속 커져가는 의문을 벽우진에게 물었던 것이다.

< 제 72장. 명문대파(名門大派). -01 > 끝

ⓒ 윤신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