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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229화 (229/325)

< 제 71장. 잘 왔다. -04 >

문중헌의 몸이 격랑에 휩쓸린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동시에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

주르륵!

그래서인지 그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쏟아졌다.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샘이 다 메말랐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오히려 난 네가 와주어서 고맙다.”

“크흑!”

“가자. 네가 곤륜을 잊지 않았듯이 곤륜 역시 너를 잊지 않았다.”

“크헝헝헝!”

문중헌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그간의 한을 털어내듯 울음을 쏟아냈다.

이런 기력이 남아있을 거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대성통곡하는 모습에 손자가 황급히 문중헌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손자이더냐?”

“예, 예!”

“청욱이 어린 시절을 빼다 박았구나.”

워낙에 꼬장꼬장한 인상의 서진후였기에 웃으면서 물어도 손자는 자연스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조부의 사형이라는 신분도 있었기에 손자는 대놓고 어려워하며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리 긴장할 것 없다. 청욱의 손자이면 내 손자와도 별 다를 바가 없으니. 일단 청욱이부터 챙기거라. 여기까지 오느라 고단했을 텐데 일단 씻고 끼니부터 해결하자.”

“예.”

부드러운 서진후의 목소리에 긴장이 조금 풀린 듯 손자가 조심스럽게 조부와 지팡이를 챙겼다.

그리고는 서진후를 따라 이동했다.

말끔하게 씻은 후 평소에는 보기 힘든 고기반찬으로 배를 두둑이 채운 문정일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벽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몇 가구 살지 않는 산골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였다.

그런데도 곤륜파와 패선에 대한 이야기는 들려왔었다.

한데 영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가 업무를 보는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이 휑했다.

“너무 휑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

“까, 깔끔하고 좋은데요?”

“너도 청욱이를 닮아 거짓말에 소질이 없구나.”

서진후가 빙그레 웃었다.

표정만 봐도 문정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알 수 있어서였다.

한편 처음과 달리 등을 곧추세운 문중헌은 청민과 대화 중이었다.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

“청범 사형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간 우리가 겪었던 외로움을 네가 이해할 수 있다면 똑같은 말을 할 거다, 아마.”

“하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청민은 문중헌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는 기억에도 희미한 사형제들이었기에 문중헌의 등장이 너무나 기뻤다.

문중헌이 살아 있다는 건 뿔뿔이 흩어진 다른 제자들도 아직 생존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도망치듯이 산골구석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무공을 잊은 채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자식들도 낳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을 날이 다가오니까 곤륜산이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제게 그럴 염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지요.”

아직도 나올 눈물이 있는지 문중헌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러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말을 하다 보니 도망치던 그날의 광경이 다시 떠올라서였다.

“염치가 왜 없어. 나 역시 도망쳤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사형께서는 나중에 다시 찾아오시지 않으셨잖습니까. 정마대전에 힘을 보태기도 하셨고. 전 그저 숨기만 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지요.”

“아니다. 네 나이 그때 열여섯이었다. 무섭고 두려운 게 당연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사백, 사숙들도 마인 놈들의 손에 무참하게 돌아가셨다. 그때 네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

청민이 고개를 저으며 문중헌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때는 그나 문중헌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살아남는 게 전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자책은 그동안 해온 걸로 충분해. 이제 그만 벗어나거라.”

“예에.”

“근데 진짜 외진 곳에 살았나보구나. 이제야 우리의 소식이 전해진 것을 보면.”

“외부인이 잘 안 찾아오기도 하고, 마을사람들이 밖으로 잘 안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사형들께서 대활약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대막에도 다녀오셨다고.”

공백의 시간이 상당히 길었지만 의외로 어색함은 없었다.

유년시절을 함께 보냈기에 할 말은 넘치도록 많았다.

“사마세가 때문에 피를 많이 봤지.”

“그 얘기를 듣고 감명도 많이 받았습니다. 보통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장문인께서는 어떤 분이신가요?”

“직접 보는 게 나을 거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보다는. 그리고 이미 그건 충분히 들은 것 같은데?”

“허허허.”

문중헌이 겸연쩍게 웃었다.

안 그래도 여기까지 오면서 벽우진에 대한 내용은 수십, 수백 번이나 들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말들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이었다.

“아들은?”

“마을에서 며느리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제가 곤륜파의 제자였었다는 사실을 아들은 모르거든요. 손자도 제가 가고 싶다고 해서 따라온 것이고요.”

“그랬구나. 근데 왜 과거의 일이었다는 듯이 말하느냐. 넌 여전히 곤륜의 제자이건만.”

“······.”

얼떨결에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곤륜의 제자가 아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지도 엄청 오래됐고 말이다.

또한 알고 있는 무공구결 역시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단전을 폐해야 한다면 그럴 생각이었고.

달칵.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서진후의 연락을 받은 벽우진이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온 것이었다.

벌떡!

벽우진의 등장에 자리에 앉아 있던 문중헌, 문정일 조손이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났다.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앉아. 뭘 그렇게 각 잡고 있어? 편하게 앉아.”

깍듯한 두 조손의 인사에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런 벽우진의 모습에도 두 사람은 벽우진이 상석에 앉아서야 어정쩡하게 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애들이 이런 반응이야? 겁이라도 줬어?”

“저희는 아무런 말도 안했습니다.”

“하지만 세간에 떠도는 말은 두 사람 다 들었겠지요.”

“세간에 떠도는 말?”

벽우진의 시선이 서진후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서진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형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듣긴 들었는데, 그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람이 아니라 거의 흉신악살이 도복을 입고 있는 수준이던데.”

“사형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기는 하죠.”

“뭐야?”

벽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문중헌, 문정일이 퍼뜩 놀라며 몸을 굳혔다.

“저희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거냐. 그래. 속가제자였었다고?”

“예. 문중헌이라고 합니다, 장문인.”

문중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항렬로 따지면 그에게 있어 사형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문중헌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청욱이라. 속가제자였다고?”

“그렇습니다.”

“근데 왜 그렇게 긴장해 있어? 마치 남의 집에 와 있는 것처럼.”

“그게···.”

“이제 나이도 적지 않은데 그쯤하면 되지 않겠어?”

문중헌은 순간 울컥했다.

묘하게 그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말에 자기도 모르게 흔들린 것이었다.

“장문인. 저는···.”

“네가 죄인이면 갇혀 있던 나 역시 죄인이겠네. 사문이 망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건 불가항력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너에게도 천년마교의 공격은 불가항력이었다. 네가 고수였었나? 아니면 중원에 이름을 떨친 천재였더냐?”

벽우진의 말에 문중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두 가지 중 그 어떤 것에도 그는 해당사항이 없었으므로.

“그런데 왜 모든 책임을 너 혼자 짊어지려고 하느냐. 책임이 있다면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리고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고 했다. 즉 그 마음을 가슴에 품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포기하는 게 아니라. 넌 포기했느냐?”

“···잊지 않았습니다. 아니.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문중헌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북풍한설보다 더 차갑고 서늘한 냉기가 올올이 피워 올랐다.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린 만큼 그의 복수심 역시 수십 년 동안 쌓였다.

“그럼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저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내가 허락하마. 곤륜파의 장문인인 내가. 너는 잘못하지 않았고, 오히려 잘 버텨주었다. 고마운 건 나다.”

주르륵.

충혈 된 눈에서 결국 눈물이 재차 흘러 나왔다.

그런데 옆에 잠자코 앉아서 듣고 있던 문정일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것인지 울컥한 표정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그 말은 내가 하고 싶구나. 나야말로 와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잘 왔다.”

끝내 문중헌이 엎드렸다.

다시금 눈물샘이 폭발한 것이었다.

곤륜파의 분위기가 점차 밝아졌다.

문중헌을 시작으로 정마대전 당시 살아남았지만 반쯤 숨어 지내던 곤륜파의 제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대부분이 속가제자들이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툭. 툭. 툭.

비밀리에 마련된 비청단주의 집무실에 혼자 안은 서진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런 그의 시선은 책상 위의 보고서에 향해 있었다.

곤륜파의 제자들이 찾아오는 건 너무나 좋은 일이었다.

한데 문제는 곤륜파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걸 사칭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유도 가지가지로군. 단전이 전폐되었다, 아버지가 곤륜파의 속가제자였다. 그래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밖에 배우지 못했다.”

곤륜파가 잘 나가자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고자 찾아왔다는 게 너무나 빤히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진후로서는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곤륜파와 맥이 이어진 이들도 있을 수 있어서였다.

“청욱이 같은 경우면 얼마나 좋을까.”

속가제자이지만 사교성 넘치는 성격으로 서진후는 같은 항렬의 제자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무공에 큰 자질은 없지만 대신 그는 뛰어난 기억력을 부모님께 물려받았고, 덕분에 거의 대부분의 사형제들을 기억했다.

그래서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문중헌을 단 번에 기억해낸 것이기도 했고.

“사기꾼들이 이렇게나 많아서야.”

사문의 명성이 높아지는 건 기꺼운 일이지만 그만큼 골치 아픈 일들도 많았다.

별의 별 놈들이 죄다 모여들어서였다.

“비청단이 없었다면. 어후.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그나마 다행인 건 비청단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청해성 만큼은 개방 못지않은 정보망을 구축했고, 그 외의 지역은 하오문이나 개방에 도움을 청하면 되었기에 현재까지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곤륜파의 제자인 게 확실해도 한 번 더 확인해야 하고 말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근데 무려 여섯 번이 바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마음이 바뀌어도 수십 번은 바뀔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서진후는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었다.

적어도 한 명만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비청단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뒤통수를 맞는 건 이제 신물이 났다.

그렇기에 서진후는 냉정한 시선으로 청욱도 조사했다.

정착해서 살아왔다는 마을,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에게 했던 모든 말들도 사실인지 전부 확인했다.

누가 뭐래도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는 적이었기에 서진후는 돌다리를 두드려보는 심정으로 모든 것들을 확인했다.

“믿을 수만 있다면 인력부족을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으니까.”

< 제 71장. 잘 왔다.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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