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27화 (227/325)

< 제 71장. 잘 왔다. -02 >

촤라락. 촤락.

오른손으로 얼굴을 받치며 삐딱하게 앉아있던 벽우진이 지루한 얼굴로 책장을 넘겼다.

하오문이 털어온 것들 중 하나인 비영귀서의 무공비급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일단 진품은 맞는 거 같은데.”

곤륜파의 모든 무공을 알고, 익히고 있는 벽우진이었다.

그렇기에 적어도 무공에 대한 안목만큼은 대종사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군. 비영귀서가 잘 익히고, 잘 펼친 모양이야.”

짤막한 감상평과 함께 벽우진은 비영귀서의 은신술이 담긴 무공비급을 덮었다.

더 이상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딱 잡기라고 부를 만한 수준이었기에 벽우진은 두 번째 무공비급을 끌어 당겼다.

“호오.”

하품을 연신하던 방금 전과 달리 첫 장을 읽던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무형신투라는 별호를 만들어준 은신술도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벽우진은 그 두 개보다 역체변용술에 감탄했다.

단순히 얼굴의 모양을 바꾸는 것을 넘어 체격과 체형마저도 변형이 가능한 구결에 벽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건 쓸 만한데?”

인위적으로 체격과 얼굴을 바꾸는 것이기에 당연히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보장도 할 수 없었고.

하지만 그런 부작용이 있음에도 효용성은 확실했다.

“챙겨둬야겠군.”

한낱 잡기라고 평가절하하기 힘든 무공에 벽우진은 무형신투의 역체변용술을 따로 빼놓았다.

비청단을 맡고 있는 청범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비영귀서의 은신술은 아예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호오. 이건 기발하면서 재미있군.”

마지막은 무음흑분의 무공비급이었다.

다른 도둑들이 담벼락을 넘는 것과 달리 무음흑분은 특이하게도 땅굴을 팠다.

그렇기에 신기막측한 맛은 있지만 이런 류의 무공들은 특별한 자질을 필요로 했다.

때문에 벽우진은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따로 챙겨놓지는 않았다.

“무형신투의 무공비급은 하오문이라면 탐낼 만 한데. 안 읽은 걸까, 아니면 사본을 만들어 두었을까.”

세 명의 은신처 겸 비고를 털러 갔을 때 서진후와 당필교도 함께 갔었다.

오대신투라 불리는 그들이 단순히 동굴이나 땅속에 묻어둘 리가 없기에 기관진식의 전문가인 당필교도 함께 보낸 것이다.

그 결과들 중 하나가 지금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무공비급들이었고.

“청범이 같이 있기는 했지만 또 모르는 일이니까.”

절대고수는 없지만 온갖 기술자들과 능력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 바로 하오문이었다.

그래서 벽우진은 절대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암기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이라면 무공비급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외울 수 있으니까.

“뭐, 상관없으려나. 내가 조금 손을 보면 되니까. 본 파에 맞게.”

세 사람의 진신절기 외에도 함께 온 무공서들은 상당히 많았다.

도둑답게 쓸 만 하다 싶은 무공서들을 죄다 모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 절정이상의 무공서들은 없었다.

대부분이 구결이 조금씩 소실되어 있기도 했고.

“이것도 별로. 이건 가짜. 응? 채음보양술도 있네?”

산처럼 쌓여 있는 무공비급들을 살펴보면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별의별 무공서들이 죄다 모여 있어서였다.

하지만 선별 과정은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야 잘못된 무공을 익히는 이가 생기지 않을 테니까.

“버리고, 버리고, 버리고.”

벽우진의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그런데 대부분의 무공서들이 버리는 쪽으로 던져졌다.

대부분이 결함이나 하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다 선별했나.”

산처럼 쌓여 있었던 무공비급이 이제는 스무 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중에 벽우진의 선택을 받은 건 단 세 개뿐이었고.

나머지 수백 권은 바닥에 버려졌다.

화르르륵!

잠시 후 버려진 책들에 불이 붙었다.

벽우진이 삼매진화로 아예 불태워버렸던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손을 봐볼까.”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스럽게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날아가는 광경을 잠시 지켜본 벽우진이 먹을 갈았다.

비청단이 익힐 무공들을 손보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상당히 뛰어난 무공이었지만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직 발전시킬 부분들이 남아 있기에 벽우진은 바로 그 부분을 손보았다.

“본 파의 내공심법과도 어울려야 하니까.”

괜히 상성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때문에 벽우진은 무공을 거의 해체하다시피 분해하면서 뜯어고쳤다.

무공이 지닌 장점은 고스란히 유지시키면서 곤륜파의 내공심법과도 잘 어우러지게 손을 보았던 것이다.

스슥! 스스슥!

일필휘지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벽우진은 거침없이 무공구결을 적어나갔다.

최대한 익히기 쉽게,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작성했기에 원래 내용보다 거의 두 배나 구결이 많아졌지만 그럼에도 벽우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안전하게, 제대로 익히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서였다.

더구나 다른 이도 아니고 곤륜파의 제자들이 익힐 무공이었기에 벽우진은 더욱더 신경 써서 무공비급을 작성해나갔다.

“후우!”

쉬지 않고 손을 놀리던 벽우진이 드디어 붓을 벼루 위에 놓았다.

반 시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모든 작업을 끝낸 것이다.

“확인해볼까.”

아직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무공비급을 벽우진은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 쓴 글자가 있는지, 혹은 본래 의도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지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할 수 있기에 한 번 더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완벽하군. 더구나 글씨도 명필이고. 이것 참.”

두터운 세 권의 비급을 내려놓으며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면 볼수록 자신이 너무나 뛰어난 것 같아서였다.

“하늘이 나에게 너무 많은 재능을 준 것 같은데.”

우우웅!

벽우진의 자화자찬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듯이 양팔에 끼워져 있는 일월쌍환이 거칠게 진동했다.

더 이상 그러지 말라고 타박하듯이 시끄럽게 울어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월쌍환의 거센 반응에도 벽우진의 표정은 딱히 변하지 않았다.

똑똑똑.

“사형. 청범입니다.”

“어, 들어와.”

할 일을 마치고 다시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 있을 때 문 너머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뒤이어 서진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석을 달고 계셨습니까?”

“아니. 비청단이 쓸 만한 무공을 재구성하고 있었지.”

“설마 이것만 남은 겁니까?”

서진후가 책상 위에 놓인 열 권이 채 안 되는 비급을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수백 권 중 이것만 남자 당황한 것이다.

“이 정도면 많이 남은 거지. 여기 세 권은 원본. 이건 내가 손을 본 거.”

“본 파의 내공심법에 맞추신 거군요.”

“맞아. 그냥 익혀도 문제는 없지만 효율이 썩 좋지 않아서. 고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고.”

“고생하셨습니다.”

서진후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수백 권의 무공서를 선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 짧은 시간에 수정까지 했다고 하자 놀란 것이다.

하지만 정작 벽우진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고생은 무슨. 별로 힘든 일도 아닌데. 가져 가.”

“지금 봐도 되겠습니까?”

“네가 가르쳐야 하니 읽어 보는 게 좋겠지?”

“그럼.”

서진후가 눈을 빛내며 첫 번째 무공서를 집었다.

그런데 무공서를 읽어 내려가던 서진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탁.

생각보다 빠르게 무공서를 읽은 서진후가 비급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흔들리는 눈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쓸 만하지?”

“너무 뛰어난데요?”

“그 정도는 되어야 비청단에 어울리지 않겠어? 그리고 무공은 누가 익히느냐에 따라 또 다르다는 거 알고 있지?”

“제대로만 익힌다면 신투라 불리는 이들보다 더 뛰어난 은신술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내가 손봤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벽우진이 거들먹거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가 직접 손 본 무공이었다.

그 정도도 안 되면 시간을 투자한 의미가 없었다.

“근데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과하기는. 그 정도는 되어야 네가 구상한 것들을 어느 정도는 이룰 수 있을 걸?”

“으음.”

“처음부터 다 알려주지 마. 순차적으로 가르쳐도 되잖아? 어차피 다 가르쳐도 전부 받아들이는 이도 별로 없을 테고.”

서진후의 얼굴이 밝아졌다.

거기까지는 차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무공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나누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면 되겠습니다. 전반부, 후반부 이런 식으로요.”

“일단 네 제자들부터 익히게 해봐. 이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를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안정적으로 만들었지만 그래도 변수가 많은 게 세상일이니까.”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무공서들은 어디 갔습니까?”

“쓰레기는 태워야 제 맛이지.”

“아.”

서진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째서 그 많은 무공서들이 사라졌는지 이해되었던 것이다.

“하오문하고는 잘 얘기했어?”

“예. 의외로 하오문 쪽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셋의 은신처를 자기들에게 달라고 해서 그냥 주었습니다. 거리가 상당해서 저희가 관리하기 힘들 것 같아서요.”

“잘했어.”

“아마도 안가로 사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관진식에 대해서는 하오문도 일가견이 있으니까요.”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천당가와 제갈세가에 가려져서 그렇지 하오문 역시 기관진식으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기상천외한 부분에서는 두 곳보다 뛰어나기도 했고.

“돌아다니느라 고생했다.”

“고생은요.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수입이 생겼는데요. 괜히 오대신투가 아니라는 듯이 세 명이서 꿍쳐 놓은 재화가 엄청났습니다. 산적들을 털 때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하오문하고도 나눴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주인이 밝혀진 것은 돌려주고. 물론 전부 다 돌려줄 필요는 없다. 돌려줘야 할 만한 이들에게만 돌려주도록 해.”

“그리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우연히 들은 소식인데 점창파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 모양입니다. 내부분열이 일어날 기미가 있습니다.”

벽우진이 두 눈을 껌뻑였다.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점창파의 수장을 떠올리고는 실소를 흘렸다.

“정치질인가?”

“그런 듯싶습니다. 아직은 쉬쉬하고 있지만 저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면 이미 알 사람은 다 안다고 봐야겠지요.”

“피해를 복구하기도 모자란 판에.”

벽우진이 혀를 끌끌 찼다.

다 같이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국에 정치질이나 하고 있자 한심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서진후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더 기회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강성했던 때에는 장문인의 권력이 막강했지만 지금은 다르니까요.”

“개판이구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지 않습니까. 도둑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 과욕을 부린 것처럼요.”

“개방에 서신을 보내야겠어. 지금 같은 때에 제 살 파먹기는 좋지 않아.”

벽우진이 곧바로 붓을 들었다.

생각난 김에 바로 서찰을 쓰려는 것이었다.

“전서응으로 보내겠습니다.”

서진후가 세 권의 비급을 챙기며 기다렸다.

다 작성한 서신을 나가는 김에 자신이 직접 보내기 위해서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낮에 두 노소(老少)가 땀을 뻘뻘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이내 걸음을 멈추고는 멀리 보이는 웅장한 산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저기가 곤륜산이에요, 할아버지.”

“진짜, 진짜 곤륜산이로구나.”

지팡이에 의지한 채 노구를 옮기던 촌부가 벌게진 눈으로 곤륜산을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말이다.

그런 조부의 모습에 소년도 가슴이 울컥했다.

“이제 그만 보시고 얼른 가요. 바라보기만 하다가 하루가 다 가겠어요.”

“그래. 가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산문은 넘어야지.”

< 제 71장. 잘 왔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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