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26화 (226/325)

< 제 71장. 잘 왔다. -01 >

“비영귀서라고 중원오대신투라 불리는 다섯 명의 대도(大盜) 중 한 명입니다.”

“아닐 수도 있잖아? 역체변용술 같은 게 있다고 들었는데.”

“뛰어난 역체변용술의 경우 키와 체형까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하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비영귀서는 역체변용술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피면구를 쓴 것도 아니고요.”

“읍읍!”

거칠게 얼굴을 꼬집고 주무르는 손길에 비영귀서가 두 눈을 부릅뜨며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비영귀서의 모습에도 양선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아혈 좀 풀어봐.”

“예.”

벽우진의 지시에 서진후가 아혈만 풀었다.

하지만 아혈을 풀어주었음에도 비영귀서는 눈알만 뎅구르르 굴렸다.

먼저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비영귀서.”

“······.”

“아니라고 잡아떼는 건가?”

양선이 물었지만 비영귀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두 눈을 내리 깐 채로 쉴 새 없이 벽우진의 표정과 눈빛을 살폈다.

“마음대로 해. 고문해도 상관없고. 우리도 고문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아, 산적들 때 말씀이시죠?”

“응. 알아낸 건 없었지만 그래도 경험은 있지.”

부르르르!

비영귀서가 몸을 떨었다.

그래도 명문대파라 불리는 곤륜파였기에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역시나 정파라고 해도 이면이 있었다.

도가문파에 고문이라니.

“되게 실망한 표정인데? 그런데 어쩌나. 고문은 곤륜파가 하는 게 아냐. 내가 하는 거지. 정확하게는 하오문이.”

“······!”

“아혈을 풀었는데 끝까지 입을 안 여네?”

꾸우욱!

양선이 싱긋 웃으며 섬섬옥수처럼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비영귀서의 아랫배를 꾹 눌렀다.

바로 무인에게 있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심장과 다를 바가 없는 단전을 찔렀던 것이다.

“흐어업!”

길쭉한 손톱이 날카롭게 파고드는 감촉에 비영귀서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단전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비명이 절로 나온 것이었다.

“거 봐. 말할 수 있으면서.”

“어, 어째서 하오문이?”

“난 그것보다 왜 네놈들이 곤륜파를 노렸는지가 궁금한데. 그것도 무형신투, 무음흑분과 함께 말이지.”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된 비영귀서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양선이 말했다.

그러자 비영귀서의 동공이 더욱 격렬하게 흔들렸다.

왜 하오문의 인물이 벽우진과 함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유언비어가 아니었단 말인가?’

툭.

헛소문이라 치부했던 소문을 떠올릴 때 양선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얼굴에 닿았다.

눈 밑을 손톱 끝으로 그었던 것이다.

“큭!”

“지금은 머리를 굴릴 때가 아니야.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할 때지. 생각을 하지 마. 넌 그저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돼.”

따끔한 고통과 함께 찢어진 부위에서 피가 올올이 맺히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정신도 번쩍 들었다.

“무, 무엇을 말이지?”

“지?”

양선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가로로 그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핏방울이 아니라 피가 솟구쳤다.

“윽!”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 같네. 네가 어떤 처지인지 말이야. 너 말고도 입이 두 개나 더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언제 웃었냐는 듯이 양선이 정색했다.

서리가 내릴 것처럼 싸늘한 안광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비영귀서를 노려봤던 것이다.

그 살벌한 눈빛에 비영귀서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무, 무엇을 말입니까?”

“벌써 까먹었나? 왜 곤륜파를 노렸는지에 대해서 물었는데.”

“그건···.”

비영귀서가 말끝을 흐렸다.

차마 벽우진이 지켜보는 앞에서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여기에 그의 사정을 배려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꾸욱!

양선의 발끝이 비영귀서의 아랫배를 눌렀다.

언제라도 단전을 박살낼 수 있다는 듯이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마, 말하겠습니다!”

“나는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아. 물론 장문인께서도 마찬가지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언급하지 않아도 알겠지? 이제 마지막이야. 여기서 더 어물쩍 거리면···.”

양선은 굳이 뒷말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알아듣지 못할 리는 없어서였다.

“영단, 영단을 훔치러 왔습니다. 대환단이나 태청단에 버금가는 영단이 있다는 소문에···.”

“소문?”

“아니.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단이 없다면 영약이라도요.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무형신투, 무음흑분과 힘을 합쳤다? 인생역전을 노리고?”

“예에.”

비영귀서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터져 나올 패선의 분노를 마주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내가 미쳤지! 왜 쓸데없이 욕심을 부려서는!’

불가능하지만 비영귀서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무형신투와 무음흑분에게 서신을 보내던 그때로 말이다.

만약 그때 둘을 부르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이제 상상에서나 가능했다.

“의외로 술술 부네?”

“제 목숨은 금쪽 같이 여기니까요. 게다가 아직 두 명이 더 남아 있기도 하고요.”

“하긴.”

꿀꺽!

두 눈을 감고 있는 비영귀서의 귓전으로 벽우진의 담담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의외로 화난 기색이 보이지 않자 비영귀서가 실눈을 떴다.

잘하면 살아서 여길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저기···.”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네놈에게 허락된 건 내가 묻는 말에 질문하는 것밖에 없다고.”

“히익!”

살기 가득한 양선의 눈빛에 비영귀서가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혈이 점혈당했기에 그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비영귀서.”

그때 벽우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동시에 양선이 뒤로 물러났다.

“예, 예!”

“너에게는 선택지가 두 개 있어. 순순히 묻는 말에 모든 걸 대답하고 고통 없이 죽느냐, 아니면 하오문의 고문기술자에게 온갖 고문이라는 고문은 다 당하고 고통스럽게 죽느냐.”

“사,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신다면 다시는 곤륜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중원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십시오!”

비영귀서가 간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금이라도 벽우진의 마음을 흔들어 보고자 구구절절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앞에 있는 양선은 칼과 같은 도구일 뿐 결정권은 없었다.

그렇기에 비영귀서는 벽우진에게 매달렸다.

“하하하!”

한데 그때 벽우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뜬금없이 파안대소 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비영귀서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왜, 왜 그러십니까?”

“참으로 낯짝이 두껍고 뻔뻔한 거 같아서. 보물을 노리고 몰래 잠입하다가 들킨 주제에 살려달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앞으로는 개과천선해서 착하게 살겠습니다! 제발 아량을 베풀어···.”

“어쩌면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하는지. 이제는 지겹다, 지겨워.”

벽우진이 말을 잘랐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양선을 쳐다보며 턱짓했다.

“네놈의 선택지는 앞서 말한 두 가지뿐이야.”

“예외는, 없습니까?”

“역지사지라는 말을 떠올려 봐. 너 같으면 살려두겠어? 네가 평생 동안 모은 금은보화들을 털어가려고 했는데?”

비영귀서의 입이 자연스럽게 다물어졌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한 가닥 기대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지금까지 모은 모든 것들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네 것은 아니지. 훔친 것들이지.”

“······.”

“잘됐군.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말이지.”

비영귀서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무슨 말인지 그는 단박에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양선의 손가락이 다시 단전에 닿았다.

“설마···?!”

“우리 쉽게 가자고. 어차피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할 것들 아냐? 그러니까 그냥 말해. 주인 없이 땅속에서 썩는 것보다는 그래도 제 가치를 하는 게 낫지 않아?”

“안 된다!”

“역시 후자인 건가.”

양선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벽우진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어려운 길을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였다.

“알아서 해.”

“예.”

그것을 벽우진 역시 모르지 않았기에 몸을 돌렸다.

이 다음은 하오문에 맡길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문인.”

“잘 부탁해.”

“원하시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벽우진이 나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중년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지난번에 만난 적이 있는 하오문의 고문기술자였다.

“내가,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죽으면 죽었지 절대 네놈들에게 주지는 않을 것이다!”

열린 문틈 사이로 흘러나온 비영귀서의 외침이 통로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순순히 협조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목소리에서 절절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역시 쉽지 않네요.”

“애초에 쉬울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잖아? 저런 반응이 정상이지.”

“그래도 아쉽습니다. 잘만 활용하면 이이제이의 한 수가 되었을 수도 있는데. 잠입술만큼은 강호일절들 아닙니까.”

“통제할 수 없는 독은 차라리 쓰지 않는 게 나아. 어중간하게 목줄을 매어두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벽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역시 세 명의 능력을 잘만 사용한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셋을 믿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목줄을 채울 수는 있으나 그걸 이유로 저 쪽에 붙어버릴 가능성도 있는 만큼 벽우진은 고민하지 않고 폐기했다.

“확실히 양날의 검이기는 하죠.”

“그러니까 우리는 실속만 챙기자고.”

“더불어 기술도 얻고요. 대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요.”

“건물을 급하게 올리면 그만큼 빨리 무너지는 법이다. 느리더라도 튼튼하게 지어야 해.”

서진후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는 것은 좋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의 곤륜파는 더더욱 말이다.

“근데 일이 정말 끊이질 않고 생기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잠잠했던 적이 드뭅니다.”

“유명세를 치른다고 생각해야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것 말고는 딱히 이유를 찾을 수 없어서였다.

“아직도 본 파를 좀 만만하게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번 일이 중요해. 일벌백계하는 모습을 보여야 더는 좀도둑들이 설치지 않을 거야.”

“근데 사형.”

“왜?”

아스라이 들려오는 비영귀서의 비명소리를 뒤로 한 채 걸음을 옮기던 벽우진이 옆을 돌아봤다.

자신을 부르는 서진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굳이 하오문에 맡길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문기술자 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자신은 있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꺼낸 말이라는 듯이 서진후가 진지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벽우진이 자신과 청민의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양선을 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너의 손이 더러워질까봐 하오문을 불렀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틀렸다. 하오문의 조력이 필요하기에 양 분타주를 부른 것이다. 청해성이라면 모를까 전 중원으로 범위를 넓히면 아직 비청단의 역량으로는 힘들어. 그리고 손을 더럽혀야 한다면 너희가 아니라 내 손을 더럽힐 것이다.”

“아.”

“그 또한 일파의 수장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니까. 너희들이 감당할 게 아닌. 뭐, 그렇다고 해서 지저분하게 일을 처리할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피해자는 우리들 아니냐? 비천단으로  저 녀석들을 유혹한 것도 아니고.”

벽우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찌됐든 피해자는 곤륜파였다.

또한 명분 역시 자신들에게 있었고.

그렇기에 벽우진은 웃으며 서진후를 다독였다.

< 제 71장. 잘 왔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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