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25화 (225/325)

< 제 70장. 도둑들. -04(9권 끝) >

적당히 속도를 조절하며 약선각으로 향하던 비영귀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갑자기 들려오는 폭발음과 함께 약선각 주변이 훤해졌다.

좌우로 수십 개의 횃불들이 일제히 솟구치며 전경이 모조리 드러나자 놀란 것이었다.

‘미, 미리 기다리고 있었어! 이런 개 같은···!’

진심으로 놀란 비영귀서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대경했음에도 본능적으로 빠져나갈 틈을 찾는 것이었다.

물론 1순위는 자신의 퇴로였지만 막혀 있을 가능성도 있기에 비영귀서는 가장 먼저 자기가 정한 퇴로부터 확인했다.

‘아직 틈은 있다!’

무언가에 맞아서 훨훨 날아가는 무형신투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서 비영귀서가 몸을 돌렸다.

벽우진 한 명이라면 이쪽이 세 명이기에 조금의 틈이라도 기대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곤륜파의 도사들이 모조리 나와 있는 상태였다.

지금 달려드는 건 섶을 짊어지고 불구덩이 속으로 달려드는 것과 다를 게 없었기에 비영귀서는 오직 도주만 생각했다.

‘일단은 빠져나가야···!’

무음흑분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 정도 소란이 일었으니 작전이 틀어졌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아니,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목숨이었으니까.

같은 목표가 있었기에, 혼자서는 무리였기에 잠시 협력한 것뿐.

“어딜 가느냐?”

“······!”

놀라기는 했어도 비영귀서는 전문기술자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기척을 낸 적 없었다.

땅굴에서 나온 후 즉시 은신술을 극성으로 펼쳤고.

한데 그의 귓가로 너무나 서늘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 하기는.”

부르르르!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퇴로로 도주하던 비영귀서의 몸이 움찔거렸다.

등 뒤에서 무지막지한 흡입력이 그를 끌어당겨서였다.

어떻게든 그 힘을 떨쳐내려고 비영귀서는 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렸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신형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그극. 그극.

오히려 점점 더 뒤로 당겨지고 있었다.

이를 악물어도 거리가 벌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약선각에 가까워졌던 것이다.

‘젠장! 제엔장!’

그 사실을 본인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았기에 비영귀서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쓰나. 내 얼굴은 봐야지.”

“큭!”

몸을 끌어당기던 흡입력이 갑자기 몇 배는 더 강해졌다.

마치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아, 안 돼!’

순식간에 몸이 붕 뜨자 비영귀서의 안색이 해쓱하게 변했다.

복면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 변화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콰당!

무기력하게 허공을 날아온 비영귀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차마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는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없어?’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비영귀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여기까지 끌려왔음에도 빠져나갈 궁리를 했던 것이다.

죽지 않은 이상 아직 끝난 건 없었다.

그렇기에 비영귀서는 포기하지 않았다.

‘왜 아무도···?’

뱁새 같은 작은 눈으로 창졸간에 주변을 훑은 비영귀서가 몸을 떨었다.

나머지 두 명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분명 아까 전에 무형신투가 무언가에 맞아서 나가떨어지는 것을 봤는데 말이다.

‘설마 공격을 역이용해서 거리를 벌린 건가?’

비영귀서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얍삽하고 교활한 무형신투라면 그 찰나의 순간조차도 이용할 터였다.

자기가 자신의 안위만 신경 쓰는 것처럼 무형신투 역시 마찬가지니까.

‘제기랄! 왜 나만 끌어당긴 건데!’

복면 속의 입술이 거칠게 짓이겨졌다.

그로 인해 피가 흘러나왔지만 비영귀서는 그 씁쓸한 맛을 느낄 새가 없었다.

“불만이 많은 모양인데? 하긴. 혼자만 있으니 외롭겠지.”

아까 전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 음성이 비영귀서에게는 염라대왕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듣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일단 한 명.”

“헙!”

찍소리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던 비영귀서가 처음으로 입 밖에 소리를 냈다.

그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땅에서 갑자기 시커먼 무언가가 솟구쳐서였다.

한데 그 시커먼 인영이 왠지 익숙했다.

‘흑분!’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을 쳤는지 말끔했던 털북숭이 얼굴이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흑분의 눈동자였다.

잔뜩 겁에 질린 그의 모습에 비영귀서 역시 몸을 떨었다.

“이제 하나 남았군.”

쿠웅!

허공에 뜬 채로 끌려온 무음흑분이 비영귀서의 옆에 놓였다.

하지만 그 역시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굳이 벽우진이 아니더라도 좌우에 나란히 서 있는 호법이 냉엄한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기에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즉시 목이 날아갈 것 같은 서늘함을 물씬 풍겨대고 있었기에 무음흑분은 마른침만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잡아올까요?”

“뭐 하러 굳이. 그냥 내가 잡아오면 되는데.”

뒷짐을 지고 있던 벽우진이 서진후를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그때 멀리서 처절한 괴성이 들려왔다.

“으아아악!”

“미, 미친!”

허공에서 버둥대며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무형신투의 모습에 비영귀서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 정도로 믿기 힘든 광경이어서였다.

심지어 거리만 해도 수십 장이었다.

한데 벽우진은 그저 시선만으로 무형신투를 잡았다.

쿵!

잠시 후 무형신투가 두 사람의 곁에 떨어졌다.

땅굴에서처럼 세 명이 모두 모였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고개를 드는 이가 없었다.

그저 바들바들 떨며 머리를 숙였다.

“아까 전의 자신감은 어디로 갔나 모르겠네?”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침묵이 무겁게 이어질 때 드디어 벽우진의 입이 열렸다.

그러자 무음흑분과 비영귀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오체투지를 하듯 머리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했던 것이다.

“왜들 그래? 한 번 더 시도해 보지. 한 번만으로는 아쉽잖아?”

“······.”

장난기 가득한 음성이었지만 셋 중 누구도 거기에 장단을 맞추지 못했다.

하나뿐인 목숨이 걸려 있기에 다들 말을 조심했던 것이다.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허공섭물로···.’

‘미친 짓이었어. 내가 정신이 나갔었지···!’

무음흑분과 비영귀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만 가지 생각과 감정이 휘몰아쳤던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큰 과욕을 부렸는지 말이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었다.

“가둬놔.”

“안 죽이십니까?”

“일단은?”

바들바들 떨며 목숨을 구걸하는 세 도둑을 일별하며 벽우진이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서슬 퍼런 표정으로 셋을 노려보면 청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벽우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장 때려죽여도 이상할 게 없는데 가둬두라고 하자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살려두신다고요?”

“응. 지금은.”

“알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벽우진의 표정에 청민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얼굴을 보아하니 무언가 생각하는 게 있는 것 같아서였다.

“도망칠 수 있으면 해 봐. 혹시 알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청민이 대답하는 사이 서진후가 누구보다 먼저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점혈을 하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얼마든지 시도해 보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 셋은 그저 움찔거리기만 했다.

“입 안도 싹 다 확인해. 혀 밑에까지.”

“절 뭘로 보시고. 아혈까지 확실하게 짚어놓겠습니다.”

청민의 말에 서진후가 피식 웃으며 세 사람의 마혈과 아혈을 점혈했다.

그런 후 제자들을 불렀다.

항렬도 가장 낮을뿐더러 다들 다 큰 장정이기에 힘쓰는 일에 용이해서였다.

“가자.”

“예, 사형.”

이윽고 청민과 서진후를 위시로 세 사람이 산적들을 가둬두었던 동혈로 향했다.

횃불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동굴에 갇힌 비영귀서가 눈알을 굴렸다.

마혈과 아혈을 점혈당한 상태였기에 현재 움직일 수 있는 건 두 개의 눈알이 전부였다.

‘죽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이대로라면 죽음을 피할 수 없어.’

비영귀서의 눈동자에 암담한 기색이 서렸다.

다치지도, 그렇다고 단전이 파괴된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해혈하는 방법을 몇 가지나 알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알고 있는 것들로는 곤륜파의 점혈을 해혈할 수가 없었다.

‘침착하게 생각하자. 죽이지 않았다는 건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소리야. 그렇다면 여지는 있다.’

사방이 꽉 막힌, 그것도 독방에 갇혀 있었지만 비영귀서는 아직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적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다는 벽우진이 자신을 살려두었다.

북해빙궁의 살수와 사왕성의 은월단을 모조리 도륙했던 그 벽우진이 말이다.

‘둘은 어찌 되었으려나.’

이 동굴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를 쳐다보며 비영귀서가 침을 삼켰다.

끌려 올 때는 다 같이 끌려 왔지만 지금은 전부 다 떨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비영귀서는 문득 두 사람이 궁금해졌다.

‘해혈 했을까? 패선이 점혈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장로가 한 것이니만큼 일말의 가능성은 있는데.’

자신은 실패했지만 둘은 성공했을 수도 있었다.

특히 잔머리와 꼼수가 대단한 무형신투라면 가능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해혈 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지.’

입구는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분명히 지키고 있는 이들도 있을 터였다.

일반적인 감옥이라면 모를까 동굴을 개조해서 만든 이런 곳은 은밀하게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설사 빠져나간다고 해도 곤륜파에는 패선이라는 괴물이 존재했다.

‘진짜 괴물이었지···.’

비영귀서의 동공이 흔들렸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다시금 떠올랐던 것이다.

대단하다는 고수들을 멀리서나마 본 적 있는 그였지만 그 누구도 감히 패선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괜히 세간에서 천하제일인이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병신, 머저리였지. 욕심에 눈이 멀어서···.’

비영귀서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후회는 짧았다.

지금은 후회할 시간도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패선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려야 해. 개처럼 짖으라며 짖어야 하고.’

죽음 앞에서는 자존심도 없었다.

그렇기에 비영귀서는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벽우진이 혹할 만한, 거래가 될 만한 것들을 궁리했다.

저벅저벅.

그때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동굴에 발자국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끼이익.

누구부터 찾아갈까 귀를 기울이던 비영귀서의 동공이 커졌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철문이 서서히 열려서였다.

“들어가시지요.”

“그래.”

익숙한 음성과 함께 세 명이 좁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셋 중 한 명은 그도 처음 보는 이였다.

웬 여인 하나가 벽우진과 서진후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키는 맞는 것 같습니다.”

“확인해 봐.”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던 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벽우진이 턱짓했다.

마음대로 살펴보라는 뜻이었다.

“그럼.”

함께 온 여인, 양선이 무표정한 얼굴로 비영귀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겨냈다.

“큭!”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거칠게 복면을 벗겨내는 손길에 비영귀서가 신음을 흘렸지만 양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얼굴로 비영귀서를 내려다봤다.

“이 놈 누구야?”

< 제 70장. 도둑들. -04(9권 끝)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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