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24화 (224/325)

< 제 70장. 도둑들. -03 >

비청단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하오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은밀히 알아봐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개방도 하오문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이 살짝 기대하는 눈빛으로 양선을 응시했다.

“녹림십팔채나 황하수로채, 장강수로채, 동정수로채 모두 은밀하게 조사해 봤는데 딱히 이상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크게 보면 같은 조직이지만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치고 박으면서 영역다툼을 하는 중입니다.”

“비밀리에 준비 중일 가능성은?”

“네 곳 다 따로 정보조직이 없는 곳들입니다. 자기 영역을 잘 벗어나지도 않고요. 그리고 두 번의 실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야. 대막 쪽은?”

“대막도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양선이 말끝을 흐리며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냥 해. 편하게. 욕만 직설적으로 하지 말고.”

“죽은 사왕성주보다 장문인을 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보여주신 신위가 대막 전역에 퍼져 감히 장문인께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중입니다.”

“그래도 개중에는 도전하려는 이가 있을 텐데?”

“대부족들끼리 전쟁 중이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원으로 내려올 여력이 없습니다.”

“거기도 개판이로고.”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떠나기 전에 제갈현이 그리 될 거라고 예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인재가 중원에 많은 것처럼 대막에도 많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미 사왕성주라는 거인이 탄생하기도 했고.

“사왕성주 같은 절대자가 탄생하지 않는 한 계속 부족 간의 전쟁이 이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중원하고도 같지요. 중원 역시 정사마(正邪魔)가 늘 부딪치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정도가 강성하기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진천뢰나 마찬가지지. 숨죽이고 있던 마도와 사도가 언제 힘을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을 시점이니까.”

“맞습니다.”

양선이 슬쩍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보면 하오문 역시 사파라고 할 수 있었다.

정사중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사파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 눈치 보지 말고.”

“아니에요.”

“다른 때보다 더 긴장하는 거 같은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다른 분도 아니고 장문인이신데요.”

양선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였다.

“말 돌리기는.”

“아,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조금 이상한 소문이 있습니다.”

벽우진이 못 이기는 척 넘어가줄 때 양선이 뒤늦게 떠오른 게 있다는 듯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잠시 삼천포로 빠지는 바람에 깜빡하고 있던 게 떠오른 것이었다.

“소문? 본 파와 관련된 건가?”

“예. 진위를 확실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는데 단순히 뜬소문만은 아닌 거 같아서요.”

“말해봐.”

“근래 들어 흑도들 사이에서 하나의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곤륜파에 소림의 대환단이나 소환단, 무당의 태청단에 비견되는 영단이 있다는 소문이요.”

“호오.”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벽우진이 관심을 보였다.

설마 하니 그런 소문이 맴돌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더불어 역시 하오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원 전역에 이런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물론 대놓고 말하는 이는 드물지만 꽤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똥파리들이 꼬이겠는데.”

벽우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기보다는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에 양선이 눈을 살짝 빛냈다.

어쩌면 그동안 풀지 못한 궁금증을 오늘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크게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신경 써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당연히는 아니지. 우리가 도와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간의 정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양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였다면 생색을 톡톡히 내겠지만 벽우진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오히려 빚을 지울 수 있을 때 그리 해놓아야 했다.

벽우진의 성격 상 빚을 절대 잊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따로 원하는 것이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런 거 전혀 없어요.”

“그래?”

“전 그저 지금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렇다면야.”

무슨 속셈인지 알았지만 벽우진은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이 정도까지는 애교로 봐줄 수 있었다.

오히려 이만큼 해주었으니 나에게도 이 정도는 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더 짜증났다.

“소문에 대해서 조사하는 중이니 밝혀지는 게 있으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그래주면 나야 좋고.”

“뜬금없기는 한데 아린이가 곤륜산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어요.”

“헛소리는 하지 말고.”

은근슬쩍 설아린을 거론하는 말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혐오감이 들지 않는 건 이 또한 저들이 살아가는, 아니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란 걸 알아서였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선을 넘지 않기도 했고.

“심기에 거슬렸다면 죄송합니다.”

“푹 쉬다 가. 늘 사용하던 숙소를 비워두었으니.”

“예.”

양선이 공손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벽우진의 축객령에 조용히 물러났던 것이다.

잠시 후 그녀가 나가고 벽우진은 홀로 자리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소문이라.”

벽우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소문이 난다는 사실은 달리 말하면 세인들의 관심이 쏠린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관심은 어떻게 보면 욕심의 척도라고도 할 수 있었고.

아무 이유 없이 소문이 날 리가 없기에 벽우진은 딱딱한 얼굴로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아직도 만만하게 보인다는 건가. 훗.”

돌고 돌아 무슨 생각에 닿은 것인지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두 눈만큼은 웃고 있지 않았다.

동굴처럼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 세 명의 사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비좁은 공간에 웅크려 앉아 있는 그들은 중앙에서 느릿하게 타들어가는 향초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후, 냄새.”

“참아. 향 하나만 더 태우면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근데 신기하기는 하네. 괜히 흑분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어.”

“나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지.”

얼굴의 반 이상을 덮고 있는 털을 씰룩이며 흑분이 히죽 웃었다.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보적인 이 기술로 그는 오대신투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기에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대단하기는 한데, 나는 가르쳐줘도 못할 거 같아. 흙냄새가 너무 심해. 근처에 뒷간이 있어서 그런가.”

“···그런 말 하지 마. 더 냄새 나는 거 같으니까.”

“근처에 뒷간이 있는 건 맞지만 냄새가 날 정도는 아닌데. 킁킁! 내가 맡기에는 오히려 이 정도면 상쾌한 수준인데. 영산이라 흙도 좋고.”

투덜거리는 두 사람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흑분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상등품의 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였다.

얼마 전에 산불이 나서 그런지 더욱 좋은 상태의 흙에 흑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좋은 수준이라고?”

“너나 나에게는 안 맞는 방식이야.”

“하지만 현재로서 침입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인 건 사실이지. 어느 누가 땅굴을 파서 경내에 침입할 거라고 생각하겠어?”

“기상천외한 방법인 건 인정.”

귀서를 쳐다보며 무형신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난번과 달리 후덕한 인상의 촌부와 같은 모습을 한 그는 호흡을 할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꿈에서도 예상하지 못했을 걸.”

“다만 기다리는 게 힘들 뿐.”

무형신투의 시선이 세 사람의 중앙에서 애처롭게 타고 있는 향으로 향했다.

시간을 재기 위한 용도로 가져온 초는 아직도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근데 이거 정확히 향 하나당 일 각이 지나는 거 맞아? 더 오래 걸리는 거 아냐?”

귀서가 코를 찡그리며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체감 상으로는 일 각보다 더 걸리는 것 같아서였다.

“정확해. 작업 하루 이틀하나.”

“흐으음.”

“지루해도 참아. 괜히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어. 그 끝이 무엇인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툴툴거리던 귀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입이 들키는 순간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붙잡았다.

“시간이 남은 김에 다시 한 번 작전을 확인하자고.”

“그러지.”

무형신투가 품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무려 오 일 동안 각기 다른 모습으로 곤륜파 경내를 돌아다니며 완성한 지도였다.

금지라고 할 수 있는 장소들은 외인이기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위치들은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여기 약선각이다.”

“침투경로는 셋이고.”

동그랗게 표시되어 있는 약선각을 흑분과 귀서가 뚫어져라 쳐다봤다.

영단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바로 약재들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약선각이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최우선적으로 확인해야 했다.

“만약 이곳에 영단이 없다면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 그때부터는 각자의 감에 의해 찾는 거지.”

“재수 없게 패선의 처소에 있을 수도 있으니 약속된 시간까지 찾지 못하면 곧바로 퇴로를 이용해 빠져 나가야 해.”

“이번 작전의 핵심은 속전속결이다.”

세 사람이 서로를 쳐다봤다.

들키는 순간 작전은 실패였다.

아무리 곤륜파의 영단이 탐이 나더라도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둘 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고.”

“누가 할 소리.”

신신당부하는 무형신투의 말에 귀서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마치 자신의 실력이 더 뛰어난 것처럼 말하자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만약 들키면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고. 적어도 한 명은 성공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잡힌 사람이 덜 억울하지. 자신은 비록 죽지만 나머지 둘이 인생역전하면 성공한 거 아냐?”

“네가 붙잡히고도 그런 말이 나올지 모르겠군.”

“난 절대 안 들킬 자신이 있거든.”

“나도 마찬가지다.”

흑분이 코웃음을 쳤다.

무형신투의 실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의 실력이 압도적인 것은 또 아니었다.

괜히 비영귀서가 기분 상한 게 아니었다.

“이제 반 각 남았군.”

“슬슬 준비하자고.”

대화하는 사이 마지막 향도 어느새 반만 남겨놓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흑분이 입을 열었다.

“후우. 시작인가.”

“제대로 한탕 하자고.”

“만약에 사로 잡혀도 입은 꾹 다무는 걸로.”

푸스스스···.

마지막으로 정비하는 사이 향이 꺼졌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흑분이 땅굴 위로 솟구쳤다.

앞장서서 흙을 파며 길을 연 것이다.

파파팟!

마치 두부처럼 파헤치며 솟구친 흑분이 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올라왔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없다!’

잽싸게 사위를 확인한 흑분이 땅을 박찼다.

약속한 방향으로 몸을 날린 것이었다.

그 뒤로 솟구친 무형신투와 비영귀서 역시 각자의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세 사람이 움직였음에도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중간이 딱 좋아.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어둠에 녹아든 비영귀서의 두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굳이 자신이 앞장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혼자라면 모를까 미끼가 될 수 있는 이가 무려 두 명이나 있었다.

그런 만큼 그는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할 작정이었다.

스스슥!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비영귀서는 약선각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변을 꼼꼼히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곤륜파가 숨기고 있는 영단을 훔치는 것도 중요했지만 들키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했다.

퍼퍼펑!

< 제 70장. 도둑들.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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