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23화 (223/325)

< 제 70장. 도둑들. -02 >

“그건 소문일 뿐이지. 어쩌면 하오문주가 은근히 흘린.”

“곤륜파와 하오문이라니. 누가 봐도 그건 아니라고 볼 거 같은데.”

조용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흑분도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유언비어 같아서였다.

곤륜파가 뭐가 아쉬워서 하오문과 손을 잡을까.

특히 다시 구대문파에 복귀하네 마네 하는 이 시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소문이 아니라면? 두 곳이 진짜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어.”

“이 작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우리 셋뿐이다.”

팔짱을 낀 채로 흑분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하오문의 정보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입 밖에 꺼내지 않은 것들을 알아낼 재간은 없었다.

또한 그나 귀서 역시 따로 하오문에 정보를 산 적도 없었고.

그런 만큼 작전 유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괜히 우리가 너를 이곳에 가둬두겠다고 하는 게 아냐.”

“위험해. 다른 이도 아니고 천하의 그 패선이라고. 적이라고 생각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머리부터 터트리는. 그런 패선이 있는 곳을 털겠다고? 소림무제와 무당권제도 대들지 못하는데?”

“그럼 반대로 묻지. 소림사나 무당파는 할 만 하냐?”

귀서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분명 패선은 무서웠다.

그러나 곤륜파가 소림사나 무당파처럼 난공불락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저을 것이었다.

“두 곳보다야 낫지만.”

“패선은 강하지. 하지만 우리는 셋이고 곤륜산은 크고 넓어. 더구나 요즘 곤륜파에 방문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앞으로 점점 늘어날 게 분명하지.”

“완벽한 계획만 세우면 가능성은 있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기회야. 아니, 어쩌면 패선처럼 절대고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귀서가 청년을 살살 꼬드겼다.

겉으로는 이십대처럼 보이는 청년이지만 실제 그의 나이는 최소 불혹이 넘을 터였다.

무형신투(無形神偸)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가 벌써 29년 전이었으니까.

“으음!”

“환골탈태를 이루고 싶지 않나? 나는 일단 젊음부터 되찾고 싶은데.”

귀서가 얄팍한 입술을 쉴 새 없이 놀렸다.

그런데 청년도 사람인지라 그 말에 마음이 안 동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공력으로 노화를 억누르고 있다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었다.

“곤륜파가 숨기고 있는 영단이나 영약을 손에 넣으면 환골탈태도, 절대고수도 될 수 있다. 소림무제나 무당권제, 제왕검까지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칠성(七星) 정도는 거뜬히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육성이다. 한 명이 오독문과의 전쟁에서 죽었으니까.”

“어쨌거나.”

흑분이 슬쩍 끼어들었지만 귀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칠성이든 육성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중원을 호령하는 고수가 되느냐, 마느냐였다.

“···만약 하나 밖에 없다면?”

“그땐 팔 던가, 아니면 두 명에게 돈을 주고 독식 하던가 결정해야겠지.”

“하나뿐인 영단을 들고서 잠적한다면?”

청년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서 물었다.

그러자 귀서의 입이 처음으로 다물어졌다.

신투라 불리는 이들인 만큼 마음먹고 숨어들면 찾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고 하오문에 도움을 청한다면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소화가 다 되어 분뇨로 배출되었을 터였다.

“처음부터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지. 설마 하니 곤륜파 정도 되는 대문파에 영단이 하나만 남아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 만약 그렇게 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남는 건 하나도 없는 게 되는 거지.”

“그래서 사전조사가 더욱더 필요한 거다. 아니다 싶으면 그때 가서 포기해도 되고. 우리라고 무작정 보물이나 신병이기에 달려드는 건 아니니까.”

흑분의 도움에 귀서가 다시 한 번 꼬드겼다.

인간의 근본적인 욕심을 살살 건드렸던 것이다.

무공을 익힌 이 치고 고수를 꿈꾸지 않는 자는 없었다.

“훔치는 것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렸으니 완벽하게 빠져나갈, 아니 숨을 방도가 필요해.”

“패선의 집요함이야 너뿐만 아니라 우리도 잘 알고 있다. 해서 세외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상은 말해줄 수 없어. 네가 함께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여기까지 말해준 것도 사실 많이 위험하지.”

흑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이상은 아무리 청년이라도 힘들었다.

최악의 경우 청년을 이곳에 가둬둘 것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잡아둘 수는 없었다.

그들만큼이나 기관진식에 해박한 이가 바로 무형신투였다.

“흐으음.”

“고민할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잠깐만 기다려 봐. 결정하기 쉽지 않은 문제라는 거 너희들도 알잖아. 목숨이 걸려 있다고.”

“언제는 목숨이 안 걸려 있었나?”

귀서가 코웃음을 쳤다.

당장 대로에 나가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 적어도 열댓 명은 자신을 잡으려고 달려들 것이다.

원한도 원한이지만 그가 지금껏 축적한 재산을 노리고서 말이다.

그렇기에 귀서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늘 그렇긴 했지만 이번에는 패선이라고.”

“위험이 클수록 얻는 것 역시 큰 법이지.”

“끄응!”

시기적절하게 끼어드는 흑분의 말에 청년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아서였다.

위험하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지만 그 과실이 또 너무나 달콤했다.

성공만 한다면 그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었다.

‘하나가 안 되면 두 개, 세 개를 흡수하면 패선만큼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천하제일인에 가장 근접한 무인으로 꼽히는 이가 패선이었다.

그렇기에 청년은 욕심이 났다.

대장부로 태어나 한 번쯤은 천하를 호령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한낱 도둑으로서가 아니라.

“참고로 여기에 갇히면 네가 좋아하는 오입질도 못한다. 누구도 만날 수 없어. 나갈 수도 없고.”

“후우.”

“아직도 더 시간이 필요하나?”

“아니. 결정을 내렸다.”

깊은 한숨과 함께 흔들리던 청년의 동공이 멈췄다.

드디어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는···.”

청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귀서와 흑분의 시선이 그의 입으로 향했다.

수행원은 문 밖에 세워두고서 양선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랜 만에 만나는 것이니 만큼 더욱더 신경 쓰는 것이었다.

원래도 거물이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거물이 되었기에 양선은 혹시라도 붙어 있을지 모르는 먼지를 털어내며 문을 두드렸다.

“저예요, 장문인.”

“들어와.”

“예.”

다소곳하게 대답한 양선이 천천히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고적한 풍경과 함께 먹물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었는지 벽우진의 앞에는 문방사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앉아.”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신소리는 그만하고.”

“역시 괜한 말이었나요?”

양선이 옅게 웃었다.

예상했던 대로 면박부터 날아와서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예전과 똑같으신 것 같네.’

벽우진의 실제 나이는 칠십이 넘었지만 혼자 보낸 시간이 무려 58년이었다.

그렇기에 양선이나 하오문주는 벽우진을 단순히 칠십 넘은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외견처럼 이십대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기에 둘은 내심 걱정했었다.

무명이 높아지고 위상이 올라가는 만큼 혹여나 성격이 변하지는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언제부터 서로의 건강을 챙겼다고.”

“저는 늘 장문인의 건강을 신경 썼는걸요?”

양선이 매혹적인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적지 않은 만큼 그녀는 남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쩌면 남자보다 더 말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객쩍은 소리 할 거면 그냥 가고.”

“오랜만에 뵈어서 농담 한 번 해봤어요.”

“두 번 하다가는 주먹이 날아가겠는데. 혹시 아나? 주먹을 부르는 애교라는 단어가 있다는 거? 요즘 애들은 이런 말도 사용하더군.”

“그, 그래요? 하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하니까요.”

양선은 벽우진의 농담을 단순히 농담으로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는 벽우진이라면 충분히 주먹부터 휘두르고도 남았다.

그래서 양선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힘도 넘치고, 사랑도 넘치고. 나름 재미있었어.”

“장문인께도 재미있는 일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얘기?”

빠르게 신색을 회복한 양선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벽우진을 그윽하게 쳐다봤던 것이다.

“미녀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는 것을요.”

“아.”

“어땠어요? 우리 아린이보다 더 예쁘던가요?”

“비슷하더군. 근데 그런 관심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서.”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들의 생각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아요.”

“문주는?”

“다행히 아직은 정정하세요. 저로서는 늘 걱정이기는 하지만요. 문주께서도 장문인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표정을 가다듬으며 양선이 대답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짙은 아쉬움이 남았다.

미인계를 사용한 건 하오문이 먼저였다.

때문에 양선은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다행이로군.”

“제자들의 활약도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용봉회를 평정했다고요. 물론 저는 예상하고 있었지만요.”

“평정은 무슨. 그냥 인사 좀 하고 안면을 익힌 거지. 겸사겸사 교류도 좀 하고. 혼자서는 대성하기 힘든 게 무공이기도 하니까.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벽우진이 담담한 얼굴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입가가 미세하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저희도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었지요.”

“어떻게 보면 본 파의 첫 번째 빈객은 하오문이었지.”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니까. 물론 그 대가를 우리 역시 주었고.”

양선이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알싸하면서도 깊은 향이 코를 지나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먼저 손을 놓지만 않으면 그리 되겠지.”

벽우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뭐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양선은 귀신 같이 벽우진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비청단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벽우진 앞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고.’

다 무너진 폐허에서 재건을 시작한 곤륜파였다.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복구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정보망을 구축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고.

아니, 철저하게 당했기에 사실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쉬워. 좀 더 돈독하고 깊은 사이가 되었다면···.’

양선이 두 눈을 내리 깔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속내를 벽우진이 눈을 통해 꿰뚫어 볼까 싶어서였다.

“장문인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확신하지 마. 세상일이라는 게 늘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양 분타주는 똑똑하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 거야.”

“예.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문주님은 장문인을 잘 알고 계시니까요.”

“부탁한 것은 어찌 되었지?”

< 제 70장. 도둑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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