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0장. 도둑들. -01 >
그때 소매가 들썩였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월쌍환이 거칠게 진동하는 것이었다.
마치 무상검이 아니라 자신들을 봐 달라는 듯이 말이다.
“갑자기 왜 그래?”
새벽이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기에 벽우진이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영롱하게 빛나는 적청색의 일월쌍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웅웅웅!
“너희들을 사용하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벽우진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 말에 대답 하듯이 일월쌍환이 나지막하게 울었다.
“하긴. 그 동안 너무 감추고만 있기는 했지. 수련도 무상검으로 하고.”
웅웅웅웅!
일월쌍환이 거칠게 울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냐는 듯이 말이다.
“근데 어쩔 수 없었어. 너희들을 막 사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하거든. 솔직히 나 말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이도 없고.”
우우웅!
벽우진의 말에 일월쌍환이 투정 부리듯 잘게 떨었다.
그러자 벽우진이 빙긋 웃으며 천천히 일월쌍환을 쓰다듬었다.
“아무도 없으니 오랜만에 잡아 볼까나.”
벽우진이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정말 오랜만에 일성검(日星劍)과 월야검(月夜劍)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들. 그렇게 좋으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일성검과 월야검과 쉴 새 없이 검명을 토해냈다.
오랜만에 쐬는 바깥바람에 너무나 신나 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벽우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생각해둔 것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
스윽.
반개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벽우진이 쌍검을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느릿하게 일성검과 월야검을 휘두르면서 말이다.
한데 그가 펼치는 검식은 곤륜파의 것이 아니었다.
스르르륵.
춤을 추는 것처럼 벽우진이 쌍검을 쥐고서 너풀너풀 움직였다.
마치 무희가 검무를 추는 것처럼 한 없이 가볍게 이동했던 것이다.
‘상생의 도. 그리고 활도(活道).’
반개했던 두 눈을 감으며 벽우진이 며칠 동안 고민했던 것을 곱씹었다.
더불어 운정이 삶의 마지막을 태우며 보여주었던 검무도 떠올렸다.
‘정반대의 길이긴 하지만 어차피 극에 이르면 같아지는 법.’
무당파와 곤륜파의 무공은 달랐다.
도맥(道脈)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그 근본은 같았지만 자라난 가지는 달랐다.
하지만 수없이 많이 나뉜 가지들도 결국에는 한 뿌리에 나왔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비록 시작점은 다를 지라도 그 끝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슥.
운정이 보여준 검무를 떠올리며 벽우진은 자신의 깨달음을 온전히 풀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나아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는 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니까.’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조급해하지도, 욕심내지도 않았다.
단지 하나만 생각했다.
웅웅웅!
그리고 그 뜻에 일성검과 월야검이 동조했다.
벽우진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잔잔한 검명을 토해내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던 것이다.
후이이잉.
그런데 그때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벽우진의 검무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미약하지만 바뀌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공력이 아닌 대자연의 기운이 꿀렁거렸다.
스스스스.
하지만 정작 벽우진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무아지경에 빠져서 주변의 변화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람은 물론이고 상당히 자란 나무들의 나뭇잎들이 그를 향해 손짓하는 것을 말이다.
‘조금만 더. 좀 더.’
곤륜산의 정기 역시 그의 움직임에 맞춰 미약하지만 박동했다.
그러나 벽우진은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신 서서히 잡히기 시작하는 무언가를 좀 더 갈구하고 열망했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임을, 깨달음의 순간임을 그는 알아서였다.
우우웅.
그 사실을 일성검과 월야검 역시 알고 있는지 얌전히 벽우진의 움직임을 받아들였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파아아아!
이윽고 벽우진을 중심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또한 주변의 기운이 충만해지며 나무와 수풀들이 생기를 머금었다.
벽우진에게서 흘러나오는 공력과 자연의 기운이 맞물리며 수목들의 생장을 도왔던 것이다.
비록 그 수준은 미약했지만 중요한 것은 벽우진이 이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이었다.
‘으음!’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벽우진이 순간 멈칫거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딱 한 발자국 남겨 놓았던 것이 반 보로 줄어들어 있어서였다.
그와 동시에 벽우진은 망아에서 빠져 나왔다.
“위험했군.”
일성검과 월야검을 늘어뜨리며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지금 멈추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벽우진은 식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는 이루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끝은 내고 가야했다.
“너무 심취했어. 적당히 했어야 하거늘.”
일성검과 월야검을 다시 팔찌로 변환시키며 벽우진이 혀를 찼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어서였다.
그래서 벽우진은 고개를 젓는 것을 넘어 양손으로 뺨을 강하게 때렸다.
“아직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좀 자란 것 같은 수목들을 일별하며 벽우진이 몸을 돌렸다.
사방이 다 막힌 밀실에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책상 위에서 외롭게 어둠을 밝히는 등잔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늦는군.”
“곧 오겠지.”
난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작은 체구의 중년인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약속된 시간에서 벌써 일 각이나 지나서였다.
하지만 그의 앞에 앉아 있던 호리호리한 체격의 털북숭이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온 중원이 좁다 하며 돌아다니는 게 그들이었기에 한 식경 정도는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마음에 안 드는데.”
“어딘 가에서 비명횡사 했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소문이 났겠지.”
중년인이 코웃음을 쳤다.
나름 이 업계에서 유명한 이가 아직 안 온 자였다.
그런 만큼 죽었다면 뒈졌다고 진즉에 소문이 났을 터였다.
“모르지. 워낙에 변용술이 뛰어난 녀석이니까.”
“흐음.”
변용술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중년인도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대신 못마땅한 얼굴로 연신 냉수를 들이켰다.
“여어~!”
다시 반 각의 시간이 지났을 때 밀실의 문이 열리며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 가득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비어 있는 자리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지?”
“아, 중간에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 있어서.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조금 늦게 끝났어.”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나?”
“물론이지. 난 이 일을 좋아하지만 내 인생에서 일 순위는 아니야.”
“또 오입질 하러 갔군.”
중년인이 콧김을 내뿜었다.
일 순위 어쩌고저쩌고 하는 순간 왜 늦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어서였다.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 아닌가.”
“이 사안을 앞에 두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쾅!
흥분한 난쟁이 중년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탁자를 내리쳤다.
하지만 그런 중년인의 모습에도 허우대 멀쩡한 청년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팠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그리고 난 아직 참여한다고 말 안 했는데?”
“그럼 우리 작업이 끝날 때까지 여기에 있어 줘야겠어.”
“싫다면?”
“오랜만에 드잡이질 한 번 해야겠지.”
중년인이 형형한 안광을 뿌렸다.
작업 계획을 알고 있는 이상 절대 자유롭게 풀어주지는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그 매서운 눈빛에도 청년은 도리어 히죽 웃었다.
“가능하겠어? 그쪽 실력으로?”
“나 혼자서는 잘해야 양패구상이겠지. 하지만 ‘함께’라면?”
중년인이 비릿하게 웃었다.
눈짓으로 조용히 앉아 있는 털북숭이를 가리키면서 말이다.
그 모습에 청년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알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흑분(黑蚡). 정말 이럴 거야?”
“어쩔 수 없다. 이번 사안은 보안이 특히 더 중요한 문제라.”
“끄응!”
털북숭이의 말에 청년이 앓는 소리를 냈다.
비영귀서(秘影鬼鼠)라면 일 대 일 승부도 거리낄 게 없지만 거기에 무음흑분(無音黑蚡)이 함께 한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둘을 상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선택해. 함께 할 것인지. 아니면 한동안 여기에 갇혀 지낼 것인지. 물론 후자를 택하면 더 이상 계집질은 못하겠지.”
“기녀를 넣어주면 안 되나? 값은 치를 테니.”
“누구 좋으라고?”
“쳇!”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딱 잘라 말하는 귀서의 모습에 청년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여자 없는 삶이란 그에게 있어 죽음과 다를 게 없었다.
꿈이자 목표가 복상사(腹上死)인 그에게 여자 없이 혼자 지내라는 말은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선택해.”
“그 전에 하나만 묻자.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다른 이도 아니고 패선이 자리 잡은 곤륜파야.”
“패선만 강하지.”
“호법들도 만만치 않아. 그 중 대호법은 구파일방의 수장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저번 대막행에서도 대활약을 했고.”
청년이 미간을 좁히며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아무리 봐도 무리수처럼 보여서였다.
그러나 청년의 말에도 귀서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대호법이나 다른 호법들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 하지만 분명한 건 아직 곤륜파의 전력이 다른 구파일방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다는 거다. 고수들은 있지만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 그리고 곤륜산은 넓어. 어마어마하게.”
“이미 두 번이나 공격을 당한 게 곤륜파다. 침입자에 대한 대비가 안 되어 있을 수가 없어.”
“그럴 테지. 두 번이나 당했으니까. 하지만 그걸 다르게 보면 이미 두 번이나 뚫렸다는 말이기도 하지. 즉 세 번도 뚫릴 수 있다는 말씀.”
“하지만 결과는 죄다 죽음이었지.”
청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귀서의 말도 맞았다.
두 번이나 뚫렸으니 한 번 더 뚫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결과였다.
“그래서 철저한 계획이 필요한 거다. 우리가 셋이나 모인 것이고.”
“다른 두 놈은 의적질이나 하기 바쁘니까. 그런 놈들이 무슨 신투(神偸)라고.”
귀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자고로 양상군자(梁上君子)는 양상군자다워야 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중원오대신투라고 불리면서도 나머지 둘은 전혀 도둑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자리에 부르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실력만큼은 진짜니까. 만약 그 둘이 함께 했다면 곤륜파가 아니라 소림사의 대환단이나 소환단을 노려도 되는데.”
청년이 입맛을 다셨다.
중원오대신투가 전부 모인다면 소림사의 영단이라는 대환단과 소환단을 훔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아니, 황궁의 비고도 노릴 수 있었다.
“그래서 곤륜파를 노려야 한다는 거다. 소림사나 무당파는 힘들지만 곤륜파는 도전해 볼만 하니까.”
“소문만 무성하지 아직 밝혀진 것은 없는 걸로 아는데.”
“영단이나 영약 없이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강해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불과 일 년 사이에? 패선이 신선도 아니고 그건 불가능해.”
“곤륜파의 아래에는 하오문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청년이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도둑과 하오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 제 70장. 도둑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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