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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221화 (221/325)

< 제 69장. 공생지도(共生之道). -02 >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해오는 진구를 향해 벽우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치료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볼 작정이었다.

또한 등선규는 진구의 제자임과 동시에 곤륜파의 제자였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진구가 부탁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가져왔습니다, 장문인.”

“감사합니다.”

비현이 건네는 작은 목함을 받아들며 벽우진이 가만히 서 있는 등선규를 쳐다봤다.

앞으로의 일 때문인지 누가 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등선규는 흔들리는 눈으로 벽우진과 목함을 번갈아 쳐다봤다.

“우리는 물러나 있자꾸나.”

“예.”

비천단을 먹는 것으로 치료는 시작될 터였다.

그렇기에 비현은 등이규를 데리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끝까지 견뎌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해. 절대 소리를 내지 말고.”

끄덕끄떡.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등선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을 할 수 없기에 행동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넌 할 수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제자니까. 그러니까 잘 견뎌서 네 목소리를 내게 들려다오.”

꾸욱!

등선규가 진구의 두툼한 손을 붙잡았다.

손바닥이고 손등이고 굳은살로 가득한 꺼끌꺼끌한 손이었지만 등선규에게는 너무나 따뜻하고 든든한 손이었다.

그 손을 강하게 붙잡으며 등선규가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각오를 행동과 눈빛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준비는 다 된 것 같네.”

“잘 부탁드립니다, 장문인.”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보죠.”

“예.”

살짝 젖은 목소리로 대답한 진구가 비현과 등이규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두 눈은 여전히 등선규에게 향해 있었다.

달칵.

진구가 이동한 것을 확인한 벽우진이 목함을 열었다.

그러자 정신을 맑게 해주는 듯한 청아한 향이 순식간에 연공실 안을 가득 채웠다.

“가부좌를 틀어라.”

벽우진의 지시에 등선규가 머뭇거리지 않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는 흔들리는 눈으로 비청단을 쳐다봤다.

“먹는 즉시 운기하거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넌 그저 운기행공만 하면 된다.”

끄덕끄덕.

벽우진은 많은 걸 지시하지 않았다.

딱 한 가지만 지시했다.

나이가 어릴뿐더러 이마저도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또한 어떤 고통을 느낄 지도.

“나 역시 믿는다. 네가 견뎌 내리라는 것을.”

부르르르!

“그럼 시작하자꾸나.”

손바닥 반만 한 목함 안에 들어 있던 자두 크기의 비청단을 등선규는 망설이지 않고 삼켰다.

그런데 혀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녹아버리는 느낌에 등선규가 눈을 껌뻑였다.

당연히 꼭꼭 씹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아서였다.

“흐으으!”

하지만 놀람은 잠시뿐이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간 비청단이 순식간에 열기를 뿜어내자 등선규가 눈을 부릅떴다.

열기도 열기지만 몸 안에서 폭발하는 기운이 너무나 흉포했다.

마치 몸통에서부터 전신을 갈가리 찢겨버리겠다는 듯이 날뛰는 무지막지한 기운에 등선규는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정신 차리거라!

때마침 들려오는 벽우진의 호통소리에 등선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진구에게 전수 받은 내공심법의 구결대로 운기하기 시작했다.

비천단의 기운을 조금씩 제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 너무 강해!’

하나 겨우 좁쌀만 한 크기의 공력으로 거대한 비천단의 기운을 통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르고 달래는 것도 어느 정도 비벼볼 정도의 수준에서나 가능하지 지금 등선규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했다.

부들부들!

가부좌를 틀고 있는 등선규의 동체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일 정도로 불규칙하게 들썩였던 것이다.

그 모습에 진구와 등이규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턱.

대신 벽우진이 나섰다.

이를 악물고서 뚫어져라 지켜보는 둘과 달리 벽우진은 차분한 신색으로 등선규의 명문혈에 두 손을 겹쳤다.

그리고는 명문혈을 통해 자신의 내공을 흘려보냈다.

-내가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운기하거라.

노도처럼 흘러 들어온 벽우진의 공력은 순식간에 비천단의 기운을 제압했다.

폭군처럼 등선규의 전신혈맥을 집어삼키던 비천의 기운이 벽우진의 공력 앞에서는 순한 양으로 돌변했던 것이다.

그 신기한 모습에 등선규는 역시나라는 생각과 함께 진구가 가르쳐준 태청일원기공(太淸一元氣功)에 집중했다.

순한 양이 되어버린 비천단의 기운을 서서히 태청일원기공에 녹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계속, 계속 해야 해. 멈추지 말고.’

벽우진은 말했었다.

절대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고.

또한 운기행공을 멈춰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끄으윽!’

물론 그게 쉽지는 않았다.

아무리 순한 양으로 변했다고 하나 비천단이 뿜어대는 기운은 크고 강대했다.

반면에 그 기운이 이동하는 그의 전신세맥은 너무나 약하고 여렸다.

그렇기에 단순히 운기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참아야 해···!’

이게 어떤 기회인지 등선규는 너무나 잘 알았다.

비천단이라는 영단이 천고의 영약이라는 것도.

그렇기에 등선규는 난생처음 느끼는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오직 그만을 위해서 준비했음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실망시켜서는 안 돼!’

등선규의 얼굴이 결연한 기색이 서렸다.

비천단은 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등선규는 이를 악물었다.

무시무시한 고통이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었지만 등선규는 오직 하나만을 생각하며 견뎠다.

우드득. 우득!

그때 등선규의 육신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작았지만 점차 커지더니 이내 육신 전체가 꿀렁거렸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환골탈태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아, 흡!”

첫 관문을 무사히 넘은 듯한 모습에 안도의 탄성을 내지르던 등이규가 황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가장 중요한 이 순간을 방해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다급히 입을 막은 등이규는 진구와 비현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방해가 된 건 아닌가 확인하는 것이었다.

우드드득!

그 사이에도 등선규의 몸은 계속해서 변화를 일으켰다.

입고 있던 낡은 도복은 전신모공에서 흘러나오는 비천단의 기운에 재가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일제히 떨어졌다.

“후우!”

등선규가 순식간에 민머리가 되었을 때 벽우진이 명문혈에 대고 있던 손을 뗐다.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들어 그가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어서였다.

스르르륵.

그것을 증명하듯 등선규의 두피에서 윤기가 좔좔 흐르는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자라났다.

또한 곤충이 외피를 벗듯이 등선규의 피부도 한 꺼풀 벗겨졌다.

“후우우우.”

동시에 등선규가 깊게 날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등이규가 벽우진과 진구, 비현을 번갈아 쳐다봤다.

“환골탈태는 성공했다. 이제는 결과를 기다려봐야지.”

“자, 잘 됐을까요?”

“눈 뜰 때까지 기다려 봐야지.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벽우진의 말에 등이규가 두 손을 맞잡은 채로 형을 쳐다봤다.

환골탈태에 성공했으니 자연스럽게 치료가 되었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등선규는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데요.”

“개인마다 편차는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잘못된 것이 아니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

벽우진의 제자들과는 사뭇 다르게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는 등선규의 모습에 진구가 안절부절 못하며 비현을 쳐다봤다.

눈을 떠도 진즉에 떴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초조해하는 진구와 달리 비현은 담담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멀쩡해서였다.

스윽.

잠시 후 등선규가 눈을 떴다.

비천단을 먹기 전과는 확연히 다른 깊은 눈동자를 빛내며 눈을 뜬 등선규는 가장 먼저 자신을 내려다봤다.

왠지 모르게 한기가 느껴지자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살펴봤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근처에 있던 벽우진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모포를 들어 덮어주었다.

“가, 가사하니다. 어?”

눈을 뜨기 무섭게 몸을 덮는 모포를 움켜잡던 등선규가 순간 움찔거렸다.

발음이 많이 뭉개지기는 했지만 알아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말이 흘러나오자 깜짝 놀란 것이었다.

“다행히 치료가 된 모양이네.”

“어어?!”

“고생했다.”

“혀엉!”

등을 토닥이는 벽우진의 손길에 등선규가 주저앉았다.

그리고 등이규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역시 선명하게 들었었다.

등선규의 입에서 분명하게 말이 흘러나온 것을 말이다.

“크흐흐흑!”

아기의 옹알이와 별다를 게 없던 소리만 내던 등선규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단어를 내뱉자 등이규는 감격한 얼굴로 대성통곡했다.

그런데 그의 눈물도 등선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십 년 동안의 서러움과 한을 토해내듯 등선규는 주저앉은 채로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았다.

“괜찮아. 괜찮아, 형. 이제 다 나았어.”

“이규야.”

“형!”

자기도 울면서 형을 달래던 등이규는 등선규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에 다시 한 번 감동했다.

그리고는 아예 안겨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장문인.”

“저보다는 선규가 고생을 많이 했지요. 고통이 정말 심했을 텐데. 역시 진 호법님의 제자답습니다.”

“허허허.”

“가서 달래주시지요.”

“그럼.”

진구가 못 이기는 척 벽우진을 지나 등선규, 등이규 형제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가 다가가자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스승인 진구가 오자 고마운 마음이 복받친 것이었다.

“참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남자 셋이 우는 장면은 좀 그렇지만 말이죠.”

“흔치 않은 장면이기에 더욱더 의미 있지 않습니까.”

비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무뚝뚝한 진구가 눈물을 글썽거리는 건 그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었고.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든 장면이기는 하죠.”

“그보다 걱정입니다. 아직 많은 이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비현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시기적으로 늦출 수 없었기에 등선규 먼저 했지만 원래는 순서가 있었다.

그리고 대기하는 인원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애초에 각오했던 부분이기도 하고. 그리고 결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힘쓰는 게 낫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약선각(藥仙閣)을 운영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일단 약재부터 차근차근 채우는 중입니다. 재배도 다시 시작했고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곧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벽우진은 자연스럽게 비현과 함께 연공실을 나섰다.

세 명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알아서 자리를 피해준 것이었다.

동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시각에 벽우진은 홀로 곤륜산을 거닐고 있었다.

산적들의 막돼먹은 짓으로 인해 불타버린 곳들을 조용히 가로질렀던 것이다.

휘이이잉.

묘목들을 심기는 했지만 아직 예전의 녹음을 재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그래서인지 유독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느껴졌다.

예전이었다면 빽빽한 나뭇잎으로 인해 풍성한 소리가 났을 텐데 말이다.

“할 수 있을까.”

민둥산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휑한 느낌이 나는 숲을 가로지르며 벽우진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무상검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웅웅웅웅!

“응?”

< 제 69장. 공생지도(共生之道).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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